Aug 27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창세기27:1-10)

Posted by on Aug 27 2011

창세기 27:1-10절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
                                                                                                                                                                                                                         June 19/ 2011

미국의 아버지날은 본래 6월 19일인데 실제로는 6월의 세번째 일요일에 지킵니다. 그런데 오늘이 6월 19일 인만큼 처음 재정했을 때와 동일한 날짜입니다. 첫 아버지날은 미국 워싱턴주 스포케인에 살던 Sonora Smart Dodd 여사에 의하여 제청되었습니다.

어머니날이 처음 시작된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 어머니날이 공식적으로 지켜진지 2년 후인 1910년 5월, 교회에서 어머니날 설교를 듣던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자신을 비롯한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곧 아버지날도 제정할 것을 제안했고, 이 안은 곧 그 도시의 목회자와 스포케인 YMCA 회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날짜는 Dodd 여사의 아버지 생일인 6월 5일로 정하기로 했으나, 그때로부터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로 2주일 뒤로 미루어 19일이 되었습니다.

곧 전국적으로 아버지날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으나 어머니날처럼 빨리 의회에서 이 날 제정에 대한 안이 통과되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남성으로만 되어 있던 당시 의회에서 의원들이 아버지날 제정이 자화자찬하려는 의도로 오해될까봐 꺼려했던 탓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전승 탈무드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스릴수 없어 이 땅에 아버지를 두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신한다 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모로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첫째, 본능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비하여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관계속에서 개발됩니다.
자녀는 어머니의 몸의 일부이기 떄문에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9개월을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Bondage 는 본능적입니다. 서로 탯줄로 이어졌는데 이 탯줄을 통하여 서로의 감정도 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만할때 탯줄을 짤라내지만 그래도 그 탯줄 양끝에 남아있는 세포를 통하여 어느 일정기간동안 어느정도는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보이지 않아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아이가 극한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느낄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체험을 통하여 이해되고 발전되어 갑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이런 생물학적인 Bondage 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처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삭은 자기 두 아들들과 특히 작은 아들과는 대화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맏아들 에서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그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는 것 외에 그 아들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장자권을 물려주겠다는 그것으로 아들에게 자기의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사냥을 같이 나갔으면 좋았으리만, 장자권을 물려 줄 터이니 아들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된 것입니다.

야곱 역시도 자기 형과 거래를 합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저권을 사겠다는 장삿꾼 속셈을 언제부터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이삭의 가족은 본의아니게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오늘날에도 이런 가정들이 있습니다. 부부싸움도 물론 성격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 때문에 싸웁니다. 성격차이도 알고보면 돈을 어떻게 벌고 사용하느냐에 대한 이견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관계로 다져져야 할 가족끼리의 관계가 물론 사랑도 있지만 그 사랑 마져도 거래관계로 전락해 버린다면 얼마나 슬픈 관계입니까?

사랑하는 아버지들이여!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십시다. 조건없는 희생의 사랑, “너를 위해서는 내 목숨도 포기할수 있다” 라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다.

아버지의 사랑은 더불어 살면서 관계를 통하여 개발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면 아버지의 사랑도 끊어집니다.
나이든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삭은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은 배웠지만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백세된 아버지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만한 기회가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나이차이가 많아서 그랬었는지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기는 하였어도 아들로서 아버지와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결박하고 죽여 재물로 바치려했던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 충격은 평생 잊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권리가 있는 것인지,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다는 것은 어떤 사랑인지……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너무 바쁘다보니 아들과 시간을 같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서는 힘들 것입니다. 한때 큰 회사의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임종시에 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낼수 있었을 텐데 인생을 참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저도 아버지와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은데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이 아들은 고등학교때 풋볼 쿼터백이었다고 합니다. 평소 게임에는 아버지가 바빠서 오지 못했지만 마지막 졸업 게임에는 아버지께서 참석해 달라고 미리부터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제일 잘 보이는 제일 좋은 좌석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아들은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아버지의 예약된 좌석에만 눈이 갑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고 양 팀이 입장을 하는데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크게 울리자 아버지께서 자기 스탭들과 막 들어오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응원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저절로 났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뛰면서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쌓은 기록을 이미 갱신하고도 남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아버지께 손을 흔들려고 보니 아버지는 언제 퇴장하셨는지 죄석은 비어있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은 집을 나갔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무척 사랑하였지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회사일을 우선순위로 살앗던 아버지, 회사의 번영이 모든것을 다 해결해 줄지 알고 회사를 위하여 헌신하였건만 그 결과는 실로 비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둘째, 하나님의 사랑처럼 아버지의 권위도 주변사람들이 인정할 때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남편 이삭을 무시합니다. 이삭에게 어떠한 약점이 있었는지 아니면 리브가의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녀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채 남편의 사랑하는 맏아들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을 속일 계획을 세웁니다.
가족끼리 이러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니 정말 기가막힐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이런 모든 음모를 다 알고서도 말한마디 못합니다. 어떤 분은 이삭이 놀란 것은 하나님께서 큰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신 약속을 망각했었다가 생각해 내고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비약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 말씀은 리브가가 들은 것이지 이삭이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그 말을 했을 지라도 이삭이 믿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삭이 놀란것은 자신이 속임을 당했다는,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인 리브가가 아버지 이삭의 권위를 무시하자 자녀들도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아버지 역할을 전혀 할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권세도 주변에서 인정해 주어야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세가 무너지자, 자녀들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쟁을 아무도 말릴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처럼 돌일킬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셋째, 이바지의 권위를 무시한 자녀는 더 큰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부모님으로 부터 편애를 배웠던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요셉에게는 비단옷을 입히고 양치는 형제들이 양을 잘 치고있나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형제들의 감독이 되게 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무시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을 속였듯이 유다는 야곱을 속입니다.
그것도 똑같이 염소새끼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맏아들 루우벤으로 부터 아버지로서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첩과 동침을 하는 치욕, 야곱은 죽는 그 순간까지 루우벤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보다는 다른사람(뱀)의 말을 중시여기던 하와나 아내의 과오를 덮어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변명하고 덮어씌운 아담으로 부터 아버지의 권위는 약탈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멀어 자녀의 잘못된 행위에 아무런 훈계도 하지 못한채 아내의 눈치를 보며 축복을 해야했던 이삭, 혹시 오늘 우리 가정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아버지들이여 영적으로 깨어 영적인 가장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Aug 13

성령이 임하시면(행1:6-8)

Posted by on Aug 13 2011

사도행전 1:6-8절
성령이 임하시면
                                                                                                                                                                                                                         June 05/2011

1: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하셨듯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바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기에 자기들이 원하는 질문을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 때에 주님께서 로마를 정복하고 나라를 회복하시렵니까? 그러면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하십니다.

오늘 이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3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물론 나의 종말의 때도 준비해야 합니다.
이제 부할 승천하신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곧 오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히 그 날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회복시킬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 땅을 통치할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두가지로 답변을 하십니다.
첫째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에 대하여서는 아버지의 권한이니, 즉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주관대로 하시니 우리에게는 알 권리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더욱 확실히 알수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안다 라고 할 때에는 Ginosko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신다 라고 할 때에는 Oida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라는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것이 복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알고 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생번에 오시지 않을 것 같으면 주님 오시는 일에는 관심도 갖지 않고 그저 자기 삶에 바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알게 되면 삶을 미리부터 포기해 버리고, 아무런 계획이나 노력도 없이 그저 마구잡이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언지 오실려는지 그리고 자신의 종말이 언제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종말이 언제쯤 되겠다는 것은 대충은 알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쇠약해지고 몹쓸 병이 들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종말을 위해서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종말을 맞이하는 가에 보면 일반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일이나 연구에 몰두합니다. Southern Semoinary 의 Wayne Oats 교수님은 92세가 될때까지도 계속 학교에 나오셨으며, 임종 한달 전 까지 연구실에 나오셔서 책을 집필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CCC 창시자 Bill Bright 목사님은 암 선고를 받고나서 죽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을 즉각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몸이 더 빨리 쇠약해져서 할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항암치료도 받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겨우 마치고 나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소위 말하면 Bukit List 를 작성합니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 그 일들을 부지런히 실향하게 됩니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에 여행도 가고, 자기가 잘못한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합니다. 사보고 싶었던 것을 사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더이상 미루지 않고 당장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차분히 죽음을 맞게 됩니다.

여하튼 이렇게 자신의 종말이 오고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정리할수 있지만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 주권에 속한 예수님의 때를 자기들마음대로 해석하여 “이 때다 저 때다”하며 많은 사람을 들을 미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미리 아시고 다음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4-5) 그리고 계속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26)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미리 예고하고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적같이 갑자기 오실 것이며, 노아의 홍수와 산모가 해산하는 것처럼 갑자기 닥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오심이 그만큼 가까워진 것에 대한 징조입니다. 아마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에 속아 세상이 주님 오실 날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 갈때 갑자기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세상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고 연세가 많거나 작거나 할것없이 자신들의 종말을 준비하며 더 늦기전에 열심히 전도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천들처럼 주님을 기다리되 깨어 근신하며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여여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대답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에 대한 시기에 대하여 전전긍긍하지 말고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많은 경우 주님을 사랑하며 성령충만함보다 사역을 앞세웁니다. 예수는 믿지만 아직 성령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역만 앞세울때 사역에 능률도 오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고갈되어 큰 시험에 빠지거나 다른사람들에게 상처를 줄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을 입을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입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흔히 방언이 터지고 행동이 좀 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도행전 8:15-17절에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9:5-6절에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하였듯이 예수를 믿는것과 성령을 받는것이 마치 두단계로 되는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그 순간부터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함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점차 내 마음을 지배하게되어 내 마음이 Full of Spirit 이 되어 온전히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입으면 방언이 터지기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이란 예수님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 즉 지금까지는 주로 머리로 믿었던 것을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때에는 할수 없었던 일, 하지 않았던 일들, 특히 주님께 그리고 섬기는 교회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등을 성령충만함을 입었을 때에는 할수있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두려워 할수없었던 일들도 성령충만함을 입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과 동시에 성령충만함을 입게되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오래동안 걸려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령충만함을 입을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을때 열흘째 되던날 모두 성령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입으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며” 했는데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주님의 권능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귀신들이 스스로 물러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병든자위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때 병든자가 고침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는 믿는자들에게 주님께서 나와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고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굳게 서서 평소에는 엄두도 못내던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충만함을 입으면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인란 헬라어 단어는 순교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증인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증인이 아니라 순교를 각오한 증인이라는 정말 차원이 다른 의미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입어 성령께사 시키시는대로 행할때 기꺼이 순교도 사능한 것입니다. 성령 충먼함이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위한 열정이 가득하게 되겠습니까?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떻게 모둔 것을 내려놓고 이프리카 오지에 들어가겠으며 남미 정글에서 평생을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복음을 증거할수 있겠습니까? 일시적인 감정으로 그렇게했다면 얼마 가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말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생명의 위협을 받게되면 곧 철수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이 없다면 어떻게 공개처형을 당하는 북한에서도 신앙생활을 할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떻게 두려움을 잊을수 있겠으며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떻게 죽음을 당할줄 알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의 11제자들 모두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증거해야 합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가감없이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수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댜신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 죄가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 약속하신대로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주님과함께 저 천국에서 영원히 같이 살게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저 천국에 계시는데 이제 곧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셔서 악인과 의인을 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목숨을 걸고 증거하는 것이 증인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고 권능을 받으면 스스로 이러한 증인의 삶을 살게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또한 그리스도의 증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신 것처럼 입술로가 아니라 그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달과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증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주님은 그 순서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나의 가족, 친척,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예루살렘, 나의 가족전도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모님이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 그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신 분이다” 그렇습니다. 자기와 늘 같이 먹고 마시고 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칫 가족들로부터 “너나 잘 하세요” 라며 외식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기 가장 쉬울 것입니다.

그 다음로는 자기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전도를 해야 하는데, 나와 이해관계가 있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참아야하고, 희생을 해야하고 양보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땅끝은 어디입니까? 어쩌면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선교하는 것에 비유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북한이 우리의 땅끝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예루살렘은 어떻습니까? 사마리와는 아떤 관계입니까? 여러분들의 땅끝은 어디입니까? 만일 북한이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북한의 문이 속히 열리도록 기도하십 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곧 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그리고 북한 문도 곧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아직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 성령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성령 충만함을 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열심히 기도해 보십시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여명의 성도들이 기도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그 분들처럼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권능을 받고 주님의 참된 증인으로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l 11

일어나 주님과 함께 뛰자(아가2:10-13절)

Posted by on Jul 11 2011

일어나 주님과 함께 뛰자
(아가 2:10-13절)

[10-13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8-9절은 나의 사랑 하는 자가 너무 보고싶어 간절히 찾았더니 그가 노루와 사슴처럼 큰 산과 작은 산을 순식간에 넘어 자기가 있는 창가에서 창틈으로 자신을 엿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술람미 여인이 깊이 기도하자 환상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비록 신부의 값은 치러졌지만 아직 예비신부이기 때문에 합방을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안으로 들어와 한몸이 되지 못하고 창틈으로 애타게 바라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하는 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술람미 여인은 고백합니다. 환상중에 보고 환상중에 듣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만 볼수있고 들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자가 이렇게 말했다 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고 함으로써 그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분은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지 간에, 심지어는 나는 나 자신도 나를 값없는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나의 왕되신 그 분은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 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때로는 비록 남편으로 부터 혹은 아내로부터 그리고 주변 친구들로부터 핀잔을 듣고 사람 이하 취급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의 왕 우리 주님께서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 라고 부르신다면 확신만 있으면 세상 슬플것도 가슴 아파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모두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나의 왕께서 나의 신랑이 되어 주시고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라고 부르시는데 다른 사람들의 나를 향한 멸시와 천대라도 나를 아프게도 슬프게도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사람의 value 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평가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나의 왕되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자신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신 그 분께서 나에게 “일어나라, 함께가자” 고 청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네 인생을 너 혼자서 달리다 보니 지치고 쓰러지고 차가운 겨울의 나락에 떨어져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마음도 기력도 없지만 이제는 나와함께 가자, 자 어서 일어나라 그분은 재촉하십니다. 10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다시 13절에 반복합니다. 이것은 강조의 의미도 되지만 신실함, 간절함, 그리고 urgent 속히 일어나라는 재촉입니다.

왕께서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라고 재촉하시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겨울이 지났다 하였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겨울, 모든 기회의 문, 소망의 문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지났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갑고 을씨년스런 겨울비도 그쳤습니다. 여란스럼 폭풍도 지나갔고 포근한 봄비에 눈은 다 녹았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도 이제는 다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지면에는 소망의 새 싹들이 돋아나고 아느새 꽃이 피어 만발하였습니다.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포근한 봄날 꽃은 피어 만발하고 새는 지저귑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풍경입니까?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주렁 주렁 달려있습니다. 이제 곧 보라색으로 탐스럽게 영글어 갈 것입니다. 또한 포도나무는 꽃이 만발하여 벌들이 윙윙 거리고 곧 탐스런 송이들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화창합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내 인생의 겨울도 지나고 꽁꽁 얼어 붙었던 나의 삶이 드디어 풀리는 구나 라는 느낌이 와 심장이 거선의 고동처럼 뛰는 소리를 냈습니다. 훈훈한 봄 내음에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내 가슴은 둥둥 뜨고 나무마다 풍성한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너무 황홀하여 무아지경에 빠졌는데 나의 왕 나의 주님은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자” 라고 부르십니다.
지금까지 너 스스로 뛰다가 넘어져 겨울의 추위와 고독과 아픔에 고생 많았지. 이제는 나와 함께 뛰자.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갔고 인생의 봄이 왔도다. 이제 나와 함께 뛰자 주님의 초청의 멀씀에 가슴이 시리도록 감사하고 감격하고 울고 또 울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감격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 주님과 함께 뛰십시다.

 

Jul 06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사도행전 1:4-5절)

Posted by on Jul 06 2011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사도행전 1:4-5절)

                                                                                                                                                                                                                                                                                                                                              June 5/2011
잘 아시다 시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실망한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치고 숨었다가 결국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등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등극할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따랐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 참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체포되고 신성모독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잠하게 죽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 행여나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까 애타게 기다렸지만 끝내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난 3년간 가정도 포기하다시피 하고 줄기차게 따라다녔는데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만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 그 분을 따라다녔던 잔당들을 색출한다고 합니다. 잡히면 그분처럼 끔찍하게 못박혀 공개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노라고 하여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공포에 질린채 예루살렘의 어느 골방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하루하루를 조바심 속에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즉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의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분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며,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바로 이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지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와는 상관도 없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오셨던 하늘로 당장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40일 동안 사람들, 특히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골방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않고 살아있음을 여러차례 여러방법으로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무너진 제자들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라, 내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그리고 믿어라” 고 하십니다. 그래도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먹는 빵좀 가져와봐, 나는 귀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예수다” 라며 빵을 잡수십니다. 이렇게 하여 무너진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마침내는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게 되는 순교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것이 바로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탄생입니다. 즉, 교회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분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불신과 절망속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순교자로 변화 되었듯이 믿음이 약하고 절망과 불안에 시달리는 자들이 믿음으로 굳게서며 예수님의 귀한 제자들로 거듭태어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실망한 제자들처럼 비록 연약하고 의심으로 가득찬 믿음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때가되면, 주님의 때가되면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한분한분 역시도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그 분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리는 제자들처럼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40일 동안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제자들을 부르셔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4절을 NIV 로 보니까 “On one occasion, while he was eating with them, he gave them this command: ‘‘Do not leave Jerusalem, but wait for the gift my Father promised, which you have heard me speak about.” 고 되어 있습니다. But other versions do not have “while he was eating”.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식사자리였든 아니었던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 승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때, 이제 떠나면 다시는 만날수 없다는 것을 피차 아는 그러한 분위기 일때, 특히 임종을 앞둔 부모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할까요? 여러분들은 무슨 말을 하실것 같습니까? 저는 우리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이런 말은 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저하고 친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서울공대를 나오시고 OSU 에서 공부를 하신뒤 50대에 신학교에 가셔서 사역을 하시다가 얼마 전에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급히 출국을 하셨는데, 95세의 어머님이 이 65세된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예수 잘 믿어라, 얼마 안남았다” 하시고 운명하셨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 한말씀 하시려고 미국에서 목회하는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숨을 거두지 못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고 주님께서 부르신 소명대로 성심껏 목회를 해왔고, 이제 은퇴를 앞둔 이 나이든 아들 목사에게 “예수 잘믿어라” 고 하시더랍니다. 지금보다 더 잘 믿어라, 지금보다 더 똑바른 신앙생활하라, 더 확신을 가지고 섬겨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다,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는 의미 아닙니까? 종말이 가까우면 핍박도 심해지고, 살기도 힘들어지고, 유혹도 많아질 텐데, 그 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예수 잘 믿어라 고 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이러한 임종을 앞둔 부모님처럼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서로 헤어지면 저 천국에서나 다시 만날수 있는, 지구상에서는 마지막 만남, 마지막 순간에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받을때까지 기다리라” 이 마지막 명령이자 부탁은 구체적으로 3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자기들의 스승을 처형하고 자기들의 꿈을 산산조각낸 끔찍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거기 숨어 있으면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합니까? 그리하여 제자들은 틈만 있으면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번째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십니다.

고난과 불안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다가 엄청난 수치를 당하고 다시 올라옵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 베델로 가지않고 숙곳에 정착하려다가 딸이 강간을 당하는 수치를 당한 후에 베델로 올라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위험이 닥치고 환난이 닥치고 고난이 닥치면 어떻습니까?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리 피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요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은 고난의 예루살렘을 피하지 말고 축복의 예루살렘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실패의 그 자리, 나의 아픔과 고통의 산싫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죽기를 바랐을 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욥 36:20-21) 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의 겨울이 곧 올 텐데 네가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것은 죄다” 라며 위로하거나 동정하시지 않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끝내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욥 40:7) 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믿음이 좋든 그렇지 못하든 고통중에 서 있기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하루속히 피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견디며 해결하고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해결하고 극복할 때까지 피하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고통의 그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예루살렘이 축복의 예루살렘이 될때까지 그 자리를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픔과 수치와 실패의 예루살렘이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인하여 기쁨이요 수치를 씻는 예루살렘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선물은 다름이 아닌 성령을 받는 것이었고,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이 무엇이길래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하십니까? 왜 무엇때문에 이렇게 간절히 당부를 하십니까?

주님은 앞으로 닥칠 심한 박해에 대하여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8:23절 이하에 사건은 바로 앞으로 닥칠 교회의 핍박에 대한 예고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떠있는 나룻배, 잔잔한 호수를 저어가야하는 나룻배가 갈릴리 호수 복판에 떠 있으니, 풍랑은 일고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날이 뜨거운 날은 뜨거운 태양볕으로 인하여 무덮고 습기많은 공기로 뒤덮혀 있습니다.  거기에 위의 북쪽에 있는 시리아의 허르몬 산의 눈녹은 찬물이 내려오면 소용돌이 바람이 불고 커친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더운날 갈릴리 호수를 노저어 간다는 것은 풍랑을 만나러 간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낮에 갈릴리 호수로 노저어 가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획된 대로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 깊은 잠이 드십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아 공포에 질립니다. 배가 그렇게 흔들려도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깊은 잠이 들었다 할지라도 배가 그렇게 물결이 그렇게 출렁이고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이 흔들리면 그리고 제자들의 비명소리가 나면 금방 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깨우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으시고 주무십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배에 함께 하시는 이상 그 배는 절대로 뒤집히거나 침몰하지 않을 터인데, 제자들은 두려워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렇게 위험한 위험하고 숨막히는 상황에서도 주무시는 것 같이 침묵하시는 주님을 소리질러 깨운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만난 이 나룻배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떠있는 유람선처럼 시설좋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신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앞으로 태어날 교회는 쉴새없이 풍랑을 만나고,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비바람을 다 맞으면서 열심히 노를 저어도 금새라도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무시는듯 침묵하시는, 하지만 주님께서 그 배에 함께 하시기 떄문에 침몰하지는 않는 이러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누가복음 21:27-28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앞으로 너희에게 닥칠 박해와 핍박은 오늘 나에게 한 것보다 더욱 심할 터이니 그 때를 위하여 오늘은 눈물을 흘리지 말고 보관해 두어라 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닥칠 박해와 핍박이 이렇게 극심할 것임을 미리보신 주님은, 이 핍박과 박해를 이겨낼 무기를 주고자 제자들로 하여금 그 무기를 갖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기는 다름아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의견도 분분하고 신학적으로 정립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자들이 그떄까지 얻지 못한 것, 체험하지 못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므로 제자들은 지금 귀신을 몰아내는 권세와 병든 자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 자들 고치는 능력이나 은사가 아닙니다. 아마도 이것은 육안으로 볼수없고 만질수도 없는 영적인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함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받은 정도를 지나,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셔서 특별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으면 이제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것을 깨우치거나 지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이 늘 나에게 인식을 시켜주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가 되면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으며,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함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나면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할수 없으며 믿어지는 정도를 넘어서 그 분과 함께 살게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정할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모두 이러한 상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극심한 박해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기 떄문임을 주님께서 먼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성령으로 침례 받으신 체험이 없으십니까? 성령으로 침례 받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으로 침례받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의심하지 않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참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저를 포함한 한국사람들은 서양사람들에 비하여 인내심이 더욱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저에게 인내심을 갖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기도는 즉시 응답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식품점에 가면 마이크로 오븐에 덮히면 곧 먹을수 있도록 한 얼린 음식이 많이 나옵니다. 커피도 끓여 먹으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귀찮으니까 인스탄트로 먹고, 더구나 요즘 우리가 먹는 그 커피 좀 보십시오. 그 안에 프림과 설탕까지 다 들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오늘 점심 메뉴는 피자입니다. 밀가루 반죽하여 펴서 그 위에 피자소스 뿌리고, 양파, 버섯, 토마토 썰어넣고, 그 위에 치즈 얹혀서 오븐안에 10분만 넣으면 금새 뜨끈뜨끈한 피자가 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하기 싫으니까 소파에 반쯤 누워 텔레비젼 보면서 피자 Order합니다. 그러면 30분 이내에 문 앞에서 “딩동, 피자 가지고 왔습니다”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내하기 힘든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기다리라고 당부하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중에 기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의 성패는 얼마나 잘 인내하고 기다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사랑은 오래참고” 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오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오래 참을 수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지 못하고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거나 다른 길로 빠져버리니까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Lord, do not turn away from me. How long should I wait? 주님,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한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 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응답을,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단련됩니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자기성찰을 하게 됩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하시며 기다림을 통하여 일꾼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고자 하면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꾼을 찾으십니다. 우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자입니다. 고난의 장소를 피하지 않고 실패의 언덕에서 도망치지 않고 고난과 실패의 장소를 기쁨과 승리의 장소로 변화시키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자를 택하십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얻은 수준을 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자,  예수가 항상 심장에서 고동치는자,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생명까지도 내 놓을수 있는 열정있는 자들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줄 아는 신앙의 소유자를 택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바로 항상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Jul 05

나를 보고싶어 찾아오시는 주님(아가 2:8-9절)

Posted by on Jul 05 2011

나를 보고싶어 찾아오시는 주님
아가 2:8-9절

[8절]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앞절에서는 술람미 여인이 왕의 품속에 안겨 있었습니다.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왕이 직접 자신에게 와서 자신을 그 잔치에 직접 데리고 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술람미 여인은 현기증이 났습니다. 얼른 기운을 차리고자 동료 여인들에게 건포도를 달라 사과를 달라 합니다. 그 때 왕이 자신을 은밀한 침실로 데리고 가서 왼손으로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져줍니다. 그러면서 술람미 여인은 왕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왕이 자기 안에 자신이 왕 안에 있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간곳없고 오직 왕과 자신 둘만 있는 그러한 상태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8절에 와서는 왕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왕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은 왕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왕이 자기 곁에서 떠낫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시 전까지 왕의 품 안에 있었는데, 그 품안에서 편히 쉬며 왕과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멀리서 왕의 소리가 들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이 방금 전까지 나와 함께 계셨는데, 그리하여 나는 황홀감에 빠져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님은 이미 자기 곁을 떠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아직 천국에 있지않고 이 자상에 있기 떄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육신을 덧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헨리 메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거듭난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과 한몸을 이루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하였는데 주님이 직접오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하지만 잠시 뿐입니다. 잠시 후에는 주님은 또 우리를 떠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덧입고 있는 이상 우리 속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영원히 같이 하실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동안만 Visitation 하셨다가 또 떠나십니다.

그렇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왕이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는 데에도 피곤합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하여 건포도가 필요하고 사과가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저 천국에 있었더라면 그녀는 피곤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건포도나 사과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킬 필요없이 언제든지 먹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주님과 가까이 때로는 멀리, 즉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합니다. 주님은 물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더” 라며 나무에 가지가 꼭 붙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지만 인간인지라 성령 충만하였다가 다음순간에는 깊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왕이여 속히 돌아오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왕이 달려옵니다. 산을 넘어 달려 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면서 환상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먼 거리에 계실지라도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 분께서 산을 넘고 골을 넘어 오시는 모습, 시 공간을 초월하여 오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또한 음성을 들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헨리 메튜는 요한복음 14:3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를 인용하면서 종말때에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에 비유하였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지만 또한 이 땅으로 오시고 계십니다. 헬라어로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용됩니다. 영어도 이런 개념이 없고 우리 말에도 이런 개념이 없이 오직 헬라어에만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면서 지금 또한 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야 예수그리스도 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종말론적로만 생각하면, 주님이 지금 오시고 계시는 모습을 다 볼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짜와 장소를 알수 있다는 해석이 될수 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위험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리스도의 예비신부된 우리가 깊이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오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통하여 보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9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라고 하였는데 왕은 예비신부와 하나가 되고싶어 그녀가 있는 창가에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 유대인들의 결혼에 대한 풍습을 잘 이해 하여야지 이해 할수 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결혼하고자 하면 우선 자기가 마음에 정한 신부의 아버지를 찾습니다. 그러면 신부의 아버지는 술상을 차려놓고 그 예비신부를 부릅니다. 그러면 신랑될 그 남자가 술을 한잔 따라 줍니다. 그 잔을 받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받아 마시면 “난 당신의 신부가 되겠습니다” 라는 의미로서 그 때부터 신부의 아버지와 신부의 몸값을 흥정하게 됩니다.

일단 신부값이 정해지면 그 남자는 신부의 몸값을 마련하느라 열심히 동분서주하며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값이 어느정도 마련되면 자기 아버지와 함께 혼인 날짜를 정하게 됩니다.

몸값이 다 마련되면 신부를 데릴러 가야 합니다. 우선 몸값이 지불되면 이제 신랑은 자신이 편안한 날에 아버지와 함께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신부를 데릴러 갑니다. 이 과정이 다 끝날때 까지 산랑은 신부를 만날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너무 보고싶어 견딜수 없으면 밤에 몰래 와서 살짝 만나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하였듯이
이처럼 본문의 왕은 술람미 여인을 너무도 보고싶어노루처럼 사슴처럼 서리없이 재빨리 산을 넘고 골을 지나 몰래 예비 신부의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창살 틈으로 예비신부를 바라봅니다.

이처럼 주님은 아직 당신의 신부는 아지니지만, 이미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렀기 때문에 하루속히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날짜를 아직 아버지와 상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우리를 데리러 오실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허락만 떨어지면 오늘이라도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 우리가 너무도 보고 싶어서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관찰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햐 눈치채지 못하게 창문 틈으로 살짝 살짝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예비신부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혼인날짜를 아버지와 상의하시면서 우리를 몰래 찾아와 감찰하시는 우리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어떻게 하여야 겠습니다. 만일 주님의 순결한 신부된 우리가 중간에 외도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창 틈으로 보시는 주님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그저 잠만 쿨쿨 잔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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