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11

일어나 주님과 함께 뛰자(아가2:10-13절)

Posted by on Jul 11 2011

일어나 주님과 함께 뛰자
(아가 2:10-13절)

[10-13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8-9절은 나의 사랑 하는 자가 너무 보고싶어 간절히 찾았더니 그가 노루와 사슴처럼 큰 산과 작은 산을 순식간에 넘어 자기가 있는 창가에서 창틈으로 자신을 엿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술람미 여인이 깊이 기도하자 환상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비록 신부의 값은 치러졌지만 아직 예비신부이기 때문에 합방을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안으로 들어와 한몸이 되지 못하고 창틈으로 애타게 바라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하는 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술람미 여인은 고백합니다. 환상중에 보고 환상중에 듣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만 볼수있고 들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자가 이렇게 말했다 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고 함으로써 그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분은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지 간에, 심지어는 나는 나 자신도 나를 값없는 사람으로 여길지라도 나의 왕되신 그 분은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 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때로는 비록 남편으로 부터 혹은 아내로부터 그리고 주변 친구들로부터 핀잔을 듣고 사람 이하 취급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의 왕 우리 주님께서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 라고 부르신다면 확신만 있으면 세상 슬플것도 가슴 아파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모두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나의 왕께서 나의 신랑이 되어 주시고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라고 부르시는데 다른 사람들의 나를 향한 멸시와 천대라도 나를 아프게도 슬프게도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사람의 value 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평가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나의 왕되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자신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신 그 분께서 나에게 “일어나라, 함께가자” 고 청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네 인생을 너 혼자서 달리다 보니 지치고 쓰러지고 차가운 겨울의 나락에 떨어져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마음도 기력도 없지만 이제는 나와함께 가자, 자 어서 일어나라 그분은 재촉하십니다. 10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다시 13절에 반복합니다. 이것은 강조의 의미도 되지만 신실함, 간절함, 그리고 urgent 속히 일어나라는 재촉입니다.

왕께서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라고 재촉하시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겨울이 지났다 하였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겨울, 모든 기회의 문, 소망의 문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지났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갑고 을씨년스런 겨울비도 그쳤습니다. 여란스럼 폭풍도 지나갔고 포근한 봄비에 눈은 다 녹았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도 이제는 다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지면에는 소망의 새 싹들이 돋아나고 아느새 꽃이 피어 만발하였습니다.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포근한 봄날 꽃은 피어 만발하고 새는 지저귑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풍경입니까?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주렁 주렁 달려있습니다. 이제 곧 보라색으로 탐스럽게 영글어 갈 것입니다. 또한 포도나무는 꽃이 만발하여 벌들이 윙윙 거리고 곧 탐스런 송이들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화창합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내 인생의 겨울도 지나고 꽁꽁 얼어 붙었던 나의 삶이 드디어 풀리는 구나 라는 느낌이 와 심장이 거선의 고동처럼 뛰는 소리를 냈습니다. 훈훈한 봄 내음에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내 가슴은 둥둥 뜨고 나무마다 풍성한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너무 황홀하여 무아지경에 빠졌는데 나의 왕 나의 주님은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자” 라고 부르십니다.
지금까지 너 스스로 뛰다가 넘어져 겨울의 추위와 고독과 아픔에 고생 많았지. 이제는 나와 함께 뛰자.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갔고 인생의 봄이 왔도다. 이제 나와 함께 뛰자 주님의 초청의 멀씀에 가슴이 시리도록 감사하고 감격하고 울고 또 울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감격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 주님과 함께 뛰십시다.

 

Jul 06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사도행전 1:4-5절)

Posted by on Jul 06 2011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사도행전 1:4-5절)

                                                                                                                                                                                                                                                                                                                                              June 5/2011
잘 아시다 시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실망한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치고 숨었다가 결국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등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등극할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따랐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 참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체포되고 신성모독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잠하게 죽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 행여나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까 애타게 기다렸지만 끝내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난 3년간 가정도 포기하다시피 하고 줄기차게 따라다녔는데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만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 그 분을 따라다녔던 잔당들을 색출한다고 합니다. 잡히면 그분처럼 끔찍하게 못박혀 공개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노라고 하여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공포에 질린채 예루살렘의 어느 골방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하루하루를 조바심 속에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즉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의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분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며,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바로 이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지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와는 상관도 없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오셨던 하늘로 당장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40일 동안 사람들, 특히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골방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않고 살아있음을 여러차례 여러방법으로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무너진 제자들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라, 내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그리고 믿어라” 고 하십니다. 그래도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먹는 빵좀 가져와봐, 나는 귀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예수다” 라며 빵을 잡수십니다. 이렇게 하여 무너진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마침내는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게 되는 순교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것이 바로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탄생입니다. 즉, 교회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분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불신과 절망속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순교자로 변화 되었듯이 믿음이 약하고 절망과 불안에 시달리는 자들이 믿음으로 굳게서며 예수님의 귀한 제자들로 거듭태어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실망한 제자들처럼 비록 연약하고 의심으로 가득찬 믿음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때가되면, 주님의 때가되면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한분한분 역시도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그 분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리는 제자들처럼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40일 동안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제자들을 부르셔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4절을 NIV 로 보니까 “On one occasion, while he was eating with them, he gave them this command: ‘‘Do not leave Jerusalem, but wait for the gift my Father promised, which you have heard me speak about.” 고 되어 있습니다. But other versions do not have “while he was eating”.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식사자리였든 아니었던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 승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때, 이제 떠나면 다시는 만날수 없다는 것을 피차 아는 그러한 분위기 일때, 특히 임종을 앞둔 부모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할까요? 여러분들은 무슨 말을 하실것 같습니까? 저는 우리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이런 말은 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저하고 친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서울공대를 나오시고 OSU 에서 공부를 하신뒤 50대에 신학교에 가셔서 사역을 하시다가 얼마 전에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급히 출국을 하셨는데, 95세의 어머님이 이 65세된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예수 잘 믿어라, 얼마 안남았다” 하시고 운명하셨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 한말씀 하시려고 미국에서 목회하는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숨을 거두지 못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고 주님께서 부르신 소명대로 성심껏 목회를 해왔고, 이제 은퇴를 앞둔 이 나이든 아들 목사에게 “예수 잘믿어라” 고 하시더랍니다. 지금보다 더 잘 믿어라, 지금보다 더 똑바른 신앙생활하라, 더 확신을 가지고 섬겨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다,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는 의미 아닙니까? 종말이 가까우면 핍박도 심해지고, 살기도 힘들어지고, 유혹도 많아질 텐데, 그 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예수 잘 믿어라 고 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이러한 임종을 앞둔 부모님처럼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서로 헤어지면 저 천국에서나 다시 만날수 있는, 지구상에서는 마지막 만남, 마지막 순간에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받을때까지 기다리라” 이 마지막 명령이자 부탁은 구체적으로 3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자기들의 스승을 처형하고 자기들의 꿈을 산산조각낸 끔찍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거기 숨어 있으면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합니까? 그리하여 제자들은 틈만 있으면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번째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십니다.

고난과 불안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다가 엄청난 수치를 당하고 다시 올라옵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 베델로 가지않고 숙곳에 정착하려다가 딸이 강간을 당하는 수치를 당한 후에 베델로 올라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위험이 닥치고 환난이 닥치고 고난이 닥치면 어떻습니까?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리 피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요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은 고난의 예루살렘을 피하지 말고 축복의 예루살렘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실패의 그 자리, 나의 아픔과 고통의 산싫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죽기를 바랐을 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욥 36:20-21) 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의 겨울이 곧 올 텐데 네가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것은 죄다” 라며 위로하거나 동정하시지 않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끝내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욥 40:7) 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믿음이 좋든 그렇지 못하든 고통중에 서 있기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하루속히 피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견디며 해결하고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해결하고 극복할 때까지 피하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고통의 그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예루살렘이 축복의 예루살렘이 될때까지 그 자리를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픔과 수치와 실패의 예루살렘이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인하여 기쁨이요 수치를 씻는 예루살렘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선물은 다름이 아닌 성령을 받는 것이었고,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이 무엇이길래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하십니까? 왜 무엇때문에 이렇게 간절히 당부를 하십니까?

주님은 앞으로 닥칠 심한 박해에 대하여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8:23절 이하에 사건은 바로 앞으로 닥칠 교회의 핍박에 대한 예고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떠있는 나룻배, 잔잔한 호수를 저어가야하는 나룻배가 갈릴리 호수 복판에 떠 있으니, 풍랑은 일고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날이 뜨거운 날은 뜨거운 태양볕으로 인하여 무덮고 습기많은 공기로 뒤덮혀 있습니다.  거기에 위의 북쪽에 있는 시리아의 허르몬 산의 눈녹은 찬물이 내려오면 소용돌이 바람이 불고 커친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더운날 갈릴리 호수를 노저어 간다는 것은 풍랑을 만나러 간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낮에 갈릴리 호수로 노저어 가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획된 대로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 깊은 잠이 드십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아 공포에 질립니다. 배가 그렇게 흔들려도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깊은 잠이 들었다 할지라도 배가 그렇게 물결이 그렇게 출렁이고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이 흔들리면 그리고 제자들의 비명소리가 나면 금방 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깨우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으시고 주무십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배에 함께 하시는 이상 그 배는 절대로 뒤집히거나 침몰하지 않을 터인데, 제자들은 두려워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렇게 위험한 위험하고 숨막히는 상황에서도 주무시는 것 같이 침묵하시는 주님을 소리질러 깨운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만난 이 나룻배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떠있는 유람선처럼 시설좋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신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앞으로 태어날 교회는 쉴새없이 풍랑을 만나고,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비바람을 다 맞으면서 열심히 노를 저어도 금새라도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무시는듯 침묵하시는, 하지만 주님께서 그 배에 함께 하시기 떄문에 침몰하지는 않는 이러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누가복음 21:27-28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앞으로 너희에게 닥칠 박해와 핍박은 오늘 나에게 한 것보다 더욱 심할 터이니 그 때를 위하여 오늘은 눈물을 흘리지 말고 보관해 두어라 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닥칠 박해와 핍박이 이렇게 극심할 것임을 미리보신 주님은, 이 핍박과 박해를 이겨낼 무기를 주고자 제자들로 하여금 그 무기를 갖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기는 다름아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의견도 분분하고 신학적으로 정립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자들이 그떄까지 얻지 못한 것, 체험하지 못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므로 제자들은 지금 귀신을 몰아내는 권세와 병든 자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 자들 고치는 능력이나 은사가 아닙니다. 아마도 이것은 육안으로 볼수없고 만질수도 없는 영적인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함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받은 정도를 지나,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셔서 특별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으면 이제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것을 깨우치거나 지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이 늘 나에게 인식을 시켜주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가 되면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으며,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함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나면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할수 없으며 믿어지는 정도를 넘어서 그 분과 함께 살게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정할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모두 이러한 상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극심한 박해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기 떄문임을 주님께서 먼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성령으로 침례 받으신 체험이 없으십니까? 성령으로 침례 받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으로 침례받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의심하지 않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참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저를 포함한 한국사람들은 서양사람들에 비하여 인내심이 더욱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저에게 인내심을 갖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기도는 즉시 응답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식품점에 가면 마이크로 오븐에 덮히면 곧 먹을수 있도록 한 얼린 음식이 많이 나옵니다. 커피도 끓여 먹으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귀찮으니까 인스탄트로 먹고, 더구나 요즘 우리가 먹는 그 커피 좀 보십시오. 그 안에 프림과 설탕까지 다 들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오늘 점심 메뉴는 피자입니다. 밀가루 반죽하여 펴서 그 위에 피자소스 뿌리고, 양파, 버섯, 토마토 썰어넣고, 그 위에 치즈 얹혀서 오븐안에 10분만 넣으면 금새 뜨끈뜨끈한 피자가 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하기 싫으니까 소파에 반쯤 누워 텔레비젼 보면서 피자 Order합니다. 그러면 30분 이내에 문 앞에서 “딩동, 피자 가지고 왔습니다”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내하기 힘든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기다리라고 당부하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중에 기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의 성패는 얼마나 잘 인내하고 기다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사랑은 오래참고” 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오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오래 참을 수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지 못하고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거나 다른 길로 빠져버리니까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Lord, do not turn away from me. How long should I wait? 주님,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한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 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응답을,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단련됩니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자기성찰을 하게 됩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하시며 기다림을 통하여 일꾼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고자 하면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꾼을 찾으십니다. 우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자입니다. 고난의 장소를 피하지 않고 실패의 언덕에서 도망치지 않고 고난과 실패의 장소를 기쁨과 승리의 장소로 변화시키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자를 택하십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얻은 수준을 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자,  예수가 항상 심장에서 고동치는자,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생명까지도 내 놓을수 있는 열정있는 자들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줄 아는 신앙의 소유자를 택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바로 항상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Jul 05

나를 보고싶어 찾아오시는 주님(아가 2:8-9절)

Posted by on Jul 05 2011

나를 보고싶어 찾아오시는 주님
아가 2:8-9절

[8절]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앞절에서는 술람미 여인이 왕의 품속에 안겨 있었습니다.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왕이 직접 자신에게 와서 자신을 그 잔치에 직접 데리고 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술람미 여인은 현기증이 났습니다. 얼른 기운을 차리고자 동료 여인들에게 건포도를 달라 사과를 달라 합니다. 그 때 왕이 자신을 은밀한 침실로 데리고 가서 왼손으로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져줍니다. 그러면서 술람미 여인은 왕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왕이 자기 안에 자신이 왕 안에 있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간곳없고 오직 왕과 자신 둘만 있는 그러한 상태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8절에 와서는 왕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왕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은 왕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왕이 자기 곁에서 떠낫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시 전까지 왕의 품 안에 있었는데, 그 품안에서 편히 쉬며 왕과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멀리서 왕의 소리가 들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이 방금 전까지 나와 함께 계셨는데, 그리하여 나는 황홀감에 빠져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님은 이미 자기 곁을 떠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아직 천국에 있지않고 이 자상에 있기 떄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육신을 덧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헨리 메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거듭난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과 한몸을 이루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하였는데 주님이 직접오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하지만 잠시 뿐입니다. 잠시 후에는 주님은 또 우리를 떠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덧입고 있는 이상 우리 속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영원히 같이 하실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동안만 Visitation 하셨다가 또 떠나십니다.

그렇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왕이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는 데에도 피곤합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하여 건포도가 필요하고 사과가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저 천국에 있었더라면 그녀는 피곤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건포도나 사과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킬 필요없이 언제든지 먹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주님과 가까이 때로는 멀리, 즉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합니다. 주님은 물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더” 라며 나무에 가지가 꼭 붙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지만 인간인지라 성령 충만하였다가 다음순간에는 깊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왕이여 속히 돌아오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왕이 달려옵니다. 산을 넘어 달려 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면서 환상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먼 거리에 계실지라도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 분께서 산을 넘고 골을 넘어 오시는 모습, 시 공간을 초월하여 오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또한 음성을 들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헨리 메튜는 요한복음 14:3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를 인용하면서 종말때에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에 비유하였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지만 또한 이 땅으로 오시고 계십니다. 헬라어로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용됩니다. 영어도 이런 개념이 없고 우리 말에도 이런 개념이 없이 오직 헬라어에만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면서 지금 또한 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야 예수그리스도 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종말론적로만 생각하면, 주님이 지금 오시고 계시는 모습을 다 볼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짜와 장소를 알수 있다는 해석이 될수 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위험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리스도의 예비신부된 우리가 깊이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오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통하여 보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9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라고 하였는데 왕은 예비신부와 하나가 되고싶어 그녀가 있는 창가에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 유대인들의 결혼에 대한 풍습을 잘 이해 하여야지 이해 할수 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결혼하고자 하면 우선 자기가 마음에 정한 신부의 아버지를 찾습니다. 그러면 신부의 아버지는 술상을 차려놓고 그 예비신부를 부릅니다. 그러면 신랑될 그 남자가 술을 한잔 따라 줍니다. 그 잔을 받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받아 마시면 “난 당신의 신부가 되겠습니다” 라는 의미로서 그 때부터 신부의 아버지와 신부의 몸값을 흥정하게 됩니다.

일단 신부값이 정해지면 그 남자는 신부의 몸값을 마련하느라 열심히 동분서주하며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값이 어느정도 마련되면 자기 아버지와 함께 혼인 날짜를 정하게 됩니다.

몸값이 다 마련되면 신부를 데릴러 가야 합니다. 우선 몸값이 지불되면 이제 신랑은 자신이 편안한 날에 아버지와 함께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신부를 데릴러 갑니다. 이 과정이 다 끝날때 까지 산랑은 신부를 만날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너무 보고싶어 견딜수 없으면 밤에 몰래 와서 살짝 만나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하였듯이
이처럼 본문의 왕은 술람미 여인을 너무도 보고싶어노루처럼 사슴처럼 서리없이 재빨리 산을 넘고 골을 지나 몰래 예비 신부의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창살 틈으로 예비신부를 바라봅니다.

이처럼 주님은 아직 당신의 신부는 아지니지만, 이미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렀기 때문에 하루속히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날짜를 아직 아버지와 상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우리를 데리러 오실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허락만 떨어지면 오늘이라도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 우리가 너무도 보고 싶어서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관찰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햐 눈치채지 못하게 창문 틈으로 살짝 살짝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예비신부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혼인날짜를 아버지와 상의하시면서 우리를 몰래 찾아와 감찰하시는 우리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어떻게 하여야 겠습니다. 만일 주님의 순결한 신부된 우리가 중간에 외도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창 틈으로 보시는 주님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그저 잠만 쿨쿨 잔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Jul 03

교회의 본질과 능력(사도행전 01:03절)

Posted by on Jul 03 2011

교회의 본질과 능력
(사도행전 01:03절)
                                                                                                                                                                                                                                                                                                                      May 22/2011

지난 주에 본 것과 같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입니다. 의원 누가는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며 자신이 먼저 기록한 누가복음을 한줄로 간단히 요약합니다. 누가복음의 소위 말하는 Scope(범위) 는 예수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고 사도들에게 명하시고 또한 승천 하실 때까지의 일이라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그 후부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3절에,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했는데,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하신 사역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당신께서 다시 사셨음을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여러 곳에 나타내셨습니다. 곧바로 아버지께로 달려가고 싶었겠지만 아직 세상에 할 일이 계셨던지라 40일 동안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40일 동안이나 머무시면서 그 일을 하셨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고린도 전서 15:13-15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16-20절에 다시한번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이 다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으면 예수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죽어서 아무것도 해 줄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까? 죽은 사람을 믿어서 무엇이 유익이 됩니까? 또한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어떻고 모세가 어떻고 다윗왕이 어떻고 모두 교훈적인 이야기일뿐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면 뭣하러 기도는 하는 것이며, 무엇하러 교회는 다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도 나이든 영감의 미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로마군에 의하여 십자가에 매달린채 불태워 죽임을 당하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웃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원형극장에서 소에 떠받쳐 갈비가 부러지고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와도 “내가 지금 나의 왕 예수님 앞에 나아가니 나의 옷깃을 여미어라” 고 호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몰래 숨어서 만나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도둑질 하지말고 거짓말 하지 맙시다” 라고 서로 말하고 또 다음장소를 약속하고 헤어졌답니다. 찬송가는 커녕 성경도 없었던 그들에게는 몰래 잠시만나서 서로 “주님께서 살아계심” 을 확인하고 다음 만날 장소를 약속한후 헤어지는 이것이 예배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순교할 수있는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 라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를 하는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이 지금 나와함꼐 하신다 라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저같이 절망하고 낙심하여 우울증에 빠져있어야 마땅한 사람도 평강을 누리며 삽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알고 느끼기 때문에 내 처지에 상관없이 허허 웃으며 살수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웃고 다니니까 더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분들도 있지만, 나를 보면 힘이난다 라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이러한 환경속에서도 언젠가는 주님의 때가 이를 것이요, 그 때에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아니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기에 주님은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동안이나 지상에 머무시며 당신께서 살아계심을 나타내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다시 사셔서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에수님의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였다고 그 장면을 다 보여주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저희 아버님이 1981년 6월 9일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당시 모습이 생생한데, 제가 돌아가시기 14일 전에 4일 휴가를 얻어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온 10일 만에 돌아가셔서, 제 친척되시는 분께서 염하는 것도 다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산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금 이 장소에, 이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나타나셨다면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그 분을 철저하게 여기 저기를 보면서 확인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얼굴 모양은 어떠한지, 키는 비슷한가, 옷차림은 어떠한가 등을 볼 것입니다. 남북 이산가족을 확인 할 때에는 어렸을때 흉터를 보고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마찬가지로 몸에 무슨 특별한 흉터는 없는가?

그 다음으로는 목소리도 확인하겠지요. 그리고 묻겠지요, 당신이 정말로 우리 아버님이십니까? 내가 분명히 우리 선산에 묻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디 계셨다가 이제 오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당신이 귀신이 아니라 실제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하고, 먹을것을 주어도 보고 등등 확이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다시 돌아오시자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귀신인가 하여 놀라 기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 있는 분이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신지 아니면 허상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눈으로 자세히 확인하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있던 방에 나타나셨을 때 하였는데, 나타나셨다는 Greek word “ophthalmia” 는 눈 혹은 눈알에 라는 의미입니다. 눈에 대하여 연구하고 눈병을 치료하는 안과를 “Ophthalmology” 라고 하는데 바로 헬라어 Ophthalmia 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 뜻대로 말한다면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자세히 관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몇명이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20명이 있었다면 “이 분이 과연 예수님이신가?” 하고 40개의 눈으로 자세히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참다못하신 예수님은 “애들아, 먹을것 좀 가져와 보아라” 하시면서 귀신은 먹지 못하지만 나는 살아있기 떄문에 먹는다 라며 잡수십니다.

물론 이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어느 곳에 가셨을때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귀신으로 생각하면 예수니께서 하신대로 “너희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가져오라” 고 해 보십시오. 귀신들도 많은 짓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이 사람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을 지상에 머무시면서 우선 실망하고 넘어져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가 다시 모으셨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주님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꾸준히 격려하고 힘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 주님께서 임재하신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배도 부활하신 주님께 드리고 선교도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하여야 하고 구제와 봉사및 각종 행사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설교도 부활하신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요, 기도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만일 교회에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빠진다면 성경에서 의미하는 교회와는 다른 기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결여 되었다면 그 예배는 온전하지 못한 예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행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은 이 40일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일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40일 동안이나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공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일반 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가는가에 대하여서는 자주 언급하면서도 정적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라에 대하여서는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허지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였으면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무려 40일 동안이나 설명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신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잘 이해하는 것이 우리 믿는자들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에 Heaven 과 Kingdom of God 이 있는데 우리 말로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나 천국이나 모두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지만 그 성질에 대하여 말할때에는 다릅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지역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안식할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성도들이 주님앞에서 밤낮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합니다. 성벽은 청옥 황옥 백옥등 이루 말할수 없이 화려한 보석으로 되어있고 밤과 낮이 따로 없이 항상 밝고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하며 평화스러운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지역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아래에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몰아내고 병든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병이 나을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이러한 이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에는 일어나지만 어느때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하에 있을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악의 새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가복음 1:15절에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하셨습니다.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께서 사역을 하시기 시작하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지역적인 개념이 아니라 진행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자를 고칠때, 그 모인 무리들이 교회이며 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자들이 늘어나면서 Kingdom of God 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근원을 따지자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광야교회를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민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맛보게 하며 또한 그 나라를 목표로 두고 살게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설립 목적은 죽 예수님께서 당신의 칫값을 주고 교회를 세우시는 첫번째 목적은 우선 당신께서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주신 첫번째 사명은 전도를 포함한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기초를 둔 교회라면 우선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나 설교등 예배의 모든 순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슬프고 절망적인 마음이 위로받고 새힘을 얻어야 할 것이며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기적의 능력을 체험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자가 귀신이 나가며 고통에 시달리던 자가 평안을 되찾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후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세상으로 나가서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배에서 이러한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채 전도하고 선교하러 나간다면 과연 주님의 능력이 그 자리에 임하실 것을 기대할수 있을까? 그저 책임감이나 채면 때문에 하는수 없이 하는 전도나 선교에 과연 주님의 능력을 기대할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에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떄문에 교회들이 점차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능력을 거론하면 이단이나 이상한 종교인으로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의 일환으로 생긴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서도 프로그램 잘 짜고 다양한 행사를 주관하여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교회에서 성경에 없는 일, 부활하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 전서 2: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합니다. 왜 이런 각오와 결단을 말합니까?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아덴에서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철학적 지식이 높았던 아덴사람들 앞에서 당대의 최고학문을 배운 학자처럼 남성명사 여상명사를 교대로 사용해가며 최고의 명설교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저 몇사람만 관심을 가졌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교만했음을 철저히 회개한 바울은 고린도로 내려와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겠노라” 고 작정을 합니다. 이제는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지식적인 설교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터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갰다” 고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제 부터는 아덴에서처럼 전도하러 나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아름답게 할까 연구하고 연습하자 않고 그 시간에 기도 한번 더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결론적으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결국은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4: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결국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 그분의 기름부으심(Anointing) 을 체험하며 그 분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때 우리를 통하여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능력이요 권세이며, 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 인 것입니다.

하지만 깨우침으로 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획한다고 그렇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9: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신 것처럼 기도외에는 이런 능력을 받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교회의 본질과 권세가 회복되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l 02

너희는 나를 도우라(아가 2장5절)

Posted by on Jul 02 2011

너희는 나를 도우라(아가 2장5절)

[5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이제 술람미 여인은 왕을 너무 사랑하다보니 병이 낫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왕이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하객들을 초청한 뒤 자신을 끌고 그 잔치에 왔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지금 너무도 현란하고 두렵고 황홀하여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기력이 쇠미해졌습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 것을 환상으로 보고있습니다. 제가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던중 주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아가 8:6-7절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Put me like a seal over your heart, Like a seal on your arm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Jealousy is as severe as Sheol; Its flashes are flashes of fire, The very flame of the LORD.”Many waters cannot quench love, Nor will rivers overflow it; If a man were to give all the riches of his house for love, It would be utterly despised.”

이 말씀을 놓고서 “주님,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이 술람미 여인처럼 나도 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도 주님의 가슴에 도장을 새기듯 새기시고 나를 속히 내게 오셔서 나를 도와 주십시오” 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제게 가까이 오시면서 제 몸은 공중으로 뜨면서 이 세상은 간곳없고 다른 세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제 머리털 하나하나가 다 곤두서는 것 같고 피가 온통 마리에 모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상태로 있으려니 얼마나 신경이 곤두세워지고 현기증이 일어나는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려면서도 “주님, 가시지 마십시오. 제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말씀해 주십시오” 라며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제 입술은 물론 온 몸의 어느것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니 제 입술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제 영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윽고 주님이 가시자 제 몸이 공중에서 다시 내려오면서 다시 이 세상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서 손끝하나도 움직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엎드려 오래도록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술람미 여인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환상가운데 보면서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웠겠습니까? 온 몸의 피와 신경이 한곳에 쏠리는 듯한 상태로 초 긴장하여 그 환상을 두렵고 똘리는 마음으로 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힘이 빠졌겠습니까? 정신이 혼미해지고 현기증이 나서 움직일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있다가 정신이 들자 기력이 쇠미하여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고 부탁을 합니다. 여러 음식이나 과일중 특별히 건포도와 사과라 하였는데 물론 이 과일들에 영적인 의미를 둘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건포도는 영양이 대단이 높은 식품입니다. 그리고 포도는 그 당시 가장 흔한 과일이요 식물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본문의 “건포도”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쉬솨” 는 “건포도 떡” 이라는 의미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히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사무엘 하 6:19절에”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눠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고 하였듯이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에 들여온 후 제사를 마치고 모든 백성에게 축복하고 이렇게 식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사과는 과일중의 가장 좋은 과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과는 원래 중동지방에는 없었는데 이미 기원전 4000 경에 페르시아 지방에서 사과나무를 가져와서 재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 는 잔치집에 모인 사람들 곧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 여인들, 즉 같이 신앙생활하던 동료들 혹은 자기 신앙을 이끌어 주는 사역자들을 의미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건포도 떡과 사과는 영의 양식을 상징한다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깊이 사모하다보면 주님의 Inner Chamber 에 들어가는 체험을 하기도 하며,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혹은 오늘 본문의 술람미 여인처럼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보게도 됩니다. 하지만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체험이 일시적일 뿐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즉 이 세상에 살면서 잠시동안 저 천국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는 아닙니다. 이 지상에 남아있는동안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역은 또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체험은 우리의 신앙에 확신을 주고 힘이 넘치게 합니다. 하지만 데살로니카 전서 5:14 절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고 하신 것처럼 아직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자들 앞에서 교만히 행하지 마시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데 사용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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