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4

하나님을 믿는자의 승리(스가랴2:1-13절)

Posted by on Mar 14 2016

지난 주에 보았듯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이민왔던 스가랴는 황폐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자기 민족과 국가의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불에 타 없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각국에 티끌처럼 흩어졌던 민족들이 돌아와 나라가 세워지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을 총독으로 세웠고, 여호수아라를 제사장으로 삼아, 페르시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집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페르시아는 오늘날 미국처럼 강대국이고 문화적으로도 발달된 선진국이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왔지만 이제 바벨론도 망하고 또한 2-3세대가 지나가면서 그 후손들은 잘 정착하여 잘 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면서 포로로 잡혀왔던 2만4천9백명의 이스라엘 민족들이 거의 200년을 지내면서 이미 큰 민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 대한 민국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특히 사상적으로 상당한 위기라고 합니다.
국가의 채무는 이전 어느 대통령 때보다 무겁다고 합니다. 여기에 수출은 부진하고 청년 일자리를 만든다고, 임금 피크제라는 극약처방을 하여 50대 후반들은 억지로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북한 문제가 저렇게 심각하게 되니까, 북한 주민들은 중국이 자기들을 덮칠것이라며 탈북할 기회만 찾고있다고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이 전면전은 아닐지라도 국지전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 라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한미는 물론 일본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 까지 합하여 연합작전을 하고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 우리 조국을 위해 역이민 갑시다. 미국에 있는 집과 재산 다 팔아서 조국으로 돌아가 나라 빚도 갚고, 조국을 위하여 이몸을 바칩시다” 라고 한다면 과연 몇사람이나 갈까요? 그리고 간다고 나서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미국에서 살기 힘들고 적응하기 힘든 사람들, 혹시 거기가면 좀 나아질까 하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도 대부분은, 정말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자 하는 열정, 하나님을 위한 희생을 각오하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살기 힘들어 하던 사람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좀 나을까 하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와서 성전을 짓다가 좀 힘드니까 다 팽개치고 자기 살길 찾아 나서버린 것입니다. 닦아놓은 성전 터에 기둥 몇개가 흉물스럽게 서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저것 보기 싫으니 얼른 다시 집시다 하는 사람도,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겠다는 의식도 없이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그러한 스가랴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환상을 보는 것을 기이히 여기는데, 여러분들도 깊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볼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1절에 보면 침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를 드리던 중 주의 사자, 즉 천사를 봅니다. 그는 너무 놀라 제사를 드리다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하였듯이, 누구든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음성으로도 들려 주시고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21-22절에는 사가랴가 말도 못하게 되니까 사람들이 “그가 환상을 본줄 알더라” 하였듯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사가랴가 환상을 본게로구만” 하며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러한 환상을 보는 사람도, 혹은 음성을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는데 갑자기 “너 미국간다” 라는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밑도 끝도없이 들리는 이 음성, 자기가 미국가게 해 달라고 구한 적도 없는데 들린 이 음성, 정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냥 마음속에 담고만 있었는데, 그 2년후 자기 남편이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더랍니다.

 

그러므로 환상이나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말한다고 신비주의에 빠졌다 라는 선입견을 버리십시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환상인지, 마귀가 주는 것인지, 아니면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착각해서 나타난 것인지 영 분별을 잘 할수 있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계속해서 환상을 보고 있는데, 스가랴 2장 1-2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였습니다. 환상 중에 스가랴는 한 사람이 척량줄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척량 줄” 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 미다”는 토지나 건물의 경계선을 측량할 때 사용되는 도구로서, 다림줄(Plumb Line)이라 해서 실에 추를 달아 건물이나 어떤 물체가 지면에 수직으로 잘 서있는가를 판단하는 도구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땅을 측량하려고 측량기를 들고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스가랴가 환상중에 본 이 사람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 땅이 얼마나 넓어야 하는가를 재 려고 척량줄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손에 척량줄을 잡은 이 사람은 앞뒤 내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에 기초만 해놓고15년 동안 방치해두자,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이 성을 재건하시고자 천사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00여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하여 무너지지만, 남은자들을 통하여 그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애 선지자는 구체적으로 70년후에 수축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짓다가 성전 지을 재료도 바닥이 나기 시작하자, 성전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약속을 안지킬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70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직접 예루살렘으로 오신 것을 환상을 통하여 본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공사를 재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면 반듯이 지키십니다. 사람은 잊어 버리고, 때로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하나님과의 약속도 못지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반듯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지 못했습니다. 아니, 나이는 먹어가고 경도도 끊겼는데 무슨 애기입니까? 그래서 자기의 몸종 하갈을 씨받이, 즉 아들을 낳기 위해 여자를 취하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취한 하갈을 통하여서도 열매를 맺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난 아들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 이삭을 괴롭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혼란된 삶이 아닙니까?

 

이처럼 약속하신 것들을 반듯이 지키시는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한 것들을 보상해 주신다는 약속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민 생활에 힘들고 바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일성수하시고 십일조와 헌금 하시면서 주님 섬기시는 것, 주님께서 다 보시고 계십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잃은것 손해본 것, 예수님 섬기느라 희생한 것,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 보상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절에, 다른 천사가 와서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합니다. 달려가서 라고 한 것은 지금 이 계시가 매우 급한 것, 임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다시 재건되어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아지게 될 것이고 계속 늘어나서 결국 예루살렘은 성벽이 없는 엄청나게 큰 성읍이 될 것인데, 그 때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산호세는 아주 작은 도시였습니다. 주변에 과수원이 많았고, 집값도 3만에서 4만불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산 중턱을 넘어 산 봉우리까기 까내리고, 거기에 고급 호텔을 짓고 은퇴촌을 건설하더라고요. 지금은 산호세 인구만 해도 100만이 넘고, San Francisco를 포함한 이 베이 지역 전체는 80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도 옛날에는 4만명 정도 살 정도의, 산 분지에 있던 조그만 도시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천연 요세지였습니다. 그곳에 성을 건설하고 적들이 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 뺑둘러 성벽을 다 쌓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 건설되는 예루살렘은 그 조그만 분지를 넘어 멀리까지 퍼지는데 얼마나 큰지 성벽을 쌓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이 얼마나 넓고 크게 번창하는지 성곽, 즉 성 벽을 쌓을수가 없다는데, 당시 스가랴 생각으로는 참 난감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성을 건설하고는 보호막으로 반듯이 성곽, 즉 높고 튼튼히 쌓은 성벽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벽 각 구석에 요새(Fortress)를 지어, 그 위에서 적이 오는가 보초도 서고, 공격해 오는 적을 대항해 싸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곽이 없으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적이 오는지 누가 어디서 감시할 것이며, 사방에서 적이 쳐들어 오면 어떻게 막을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스가랴의 마음을 읽은 하나님께서는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성을 지켜줄 사람도 없고 나가 싸울만한 병사들도 없으니까 I myself will be a wall of Fire around it, 내가 스스로 불로 성곽이 되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 가셔서 영광이 되어 주신다 하셨습니다.

 

원어로 보면, 내가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곽이 되어 주고, 내가 가서 영광이 되어 주신다는, 즉 “내가 직접 가서” 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셨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왜 어떻게 우리나라가 망할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면 왜 성전이 불탔습니까?” 라는 탄식과 불신으로 가득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내가 가겠다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해 주겠다” 라며 그들에게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로 성곽이 되어 주십니까?
열왕기 하 6장에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열왕기 하 6:14절에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였듯이 아람 왕이 수많은 병사들을 야밤에 몰래 보내어 엘리사가 거주하던 집을 사방으로 에워 쌓습니다.

그러자 15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엘리사의 시중드는자 게하시가 아침에 밖이 웅성웅성 하여서 보니, 수많은 아람병사들이 자기와 엘리사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엘리사에게 와서 “우리, 완전 포위 되었나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완전히 죽은 목숨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이에 엘리사 선지자는 16-17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게하시의 영적인 눈이 열리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깨우쳐 집니다.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엘리사가 거주하던 도단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그 불말과 불병거로 새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구도 감히 침범하지 못할뿐만이 아니라, 설령 침범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불말과 불 병거를 보내 주시니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임재 (The Shekinah Glory) 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영광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작년에 Randy Clark Conference 에 갔더니,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North Carolina 주에서 컨퍼런스를 하고 있는데, 이틀째 되던 날, 참석자가 천여명 되는가운데 오전 세미나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아!” 하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지금 컨퍼런스에 참여한 천여명이 모두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니 빛이 비치는데 기둥, 아니 세로로 세워진 칙경 한 1미터쯤 되는 연통같은 빛이 그 Conference Room앞줄 오른쪽에 비치고 있더랍니다. 어떻게 보면 불기등인데 훨훨타는 불기둥이 아니라, 금빛 은빛 빨강 파랑 오색찬란한 빛으로 된 그 불기둥이 바닥에서 거의 천정에 닿을 정도로 서 있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 그리고 두려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자기도 좀 두려웠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두려운 척 하면 안될 것 같아 강단에서 내려와,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아주 조심스럽게 그 불기둥을 관찰하였더니, 그 안에 먼지처럼 작은 금조각 같은 것이 수억개가 떠다니면서 빛을 발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떨리지만 가만이 손을 넣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괜찮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 불기둥 있는 곳으로 들어 갔답니다. 그래도 괜찮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강단으로 올라와 강의를 계속하였답니다.

 

 

그러자 잠시후 앞줄에 앉았던 노인 양반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 들린다” 라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알고보니 6.25 참전용사인데, 한국 전쟁때 폭탄이 옆에 터져 고막이 나갔답니다. 지금 85세인데, 지금까지 60년 이상을 거의 귀머거리로 살아 온 것입니다. 그러데, 그날 이 기둥이 그 사람위로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그렇게 터졌던 고막이 다시 생겨나고 청력이 다시 회생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니까 계속해서 강의만 하였답니다. 강의가 끝나고 보니까 그 사이즈가 아주 작아져서 오른쪽 천정쪽에 있더랍니다. 그리고 몇시간 후에 사라졌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 이것이 바로 셰키나 하나님의 영광이었는데, 자신이 그것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한번만 더 나타나면 강의고 무엇이고 다 내려놓고, 당장 방송국에 전화하여 취재하도록 하고, 아픈 사람들 다 나와서 그 통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도시의 아픈사람들 예수 안믿는사람들, 성령을 거부하는 사람들 다 나오라고 하겠다 벼르고 있는데,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안 나타나신다고,자기 일생 일대기에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가랴의 환상을 통하여, 이러한 세키나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임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꼭 이렇게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나타나시는데, 우리는 이 때에도 민감하게 잘 분별할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6-7절에,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7.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방땅에서 도피하라, 도피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죽이고 바벨론 땅에 그야말로 티끌처럼 흩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성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데, 이것이 바로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바벨론 성에서 부터 돌아오라 하십니다.

 

 

이 책이 기록되기 훨씬 전에 돌아 온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데, 뭐하러 생고생하러 예루살렘으로 역이민 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들은 돌아와 내 무너진 성을 수축하라” 고 하십니다. 내가 그 성을 환난에 처하게 할 터인즉 너희들은 내가 거주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고 하십니다. 또한 돌아와서 지금 예루살렘에 거하는자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성에 거하는마음을 끊으라” 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몸은 돌아왔지만 바벨론에서의 70년 동안살면서, 바벨론 우상 섬기면서, 좋은 음식 기름진 음식 먹으며 재밌게 살던 그 추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껍데기만 왔지 속 마음은 아직도 바벨론의 살진 음식, 음란한 생활을 그리워 하는데, 이제는 다 버리고 마음까지도 가지고 오라 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뭐라고들 합니까?
출애굽기 16: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불평하였습니다. 노예신분으로 주인 솥 살짝 열고 고기 훔쳐먹던 일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또한 민수기 11:5-6절에,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라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이수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페르시어 바벨론 옛추억 다 잊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도, 예배시간에도, 몸만 교회에 와 있지 생각은 다른 곳에 있을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에배를 드리면서도, “예배 끝나고 무엇하지? 점심은 무엇을 먹지?”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네 마음도 예배당 안으로 데리고 와서 네 마음과 몸이 합심하여 예배를 드려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8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참 놀라운 표현입니다. 발 바닥에는 가시가 찔려도, 참을수 있는데 눈에는 조그만 티끌만 들어가도 못참습니다. 그리고, 누가 내 팔을 친다할지라도 참을수 있는데, 조그만 일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참으로 참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너희를 핍박하고 힘들게 한 자들, 그들이 한번만 더 그렇게 하면 그가 내 눈을 주먹으로 친것처럼 내가 참지않고 처벌하겠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를 헤치거나 괴롭힐 놈들이 없을 터인니 너희는 안심하고 돌아오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9절에,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하셨는데, 무슨 뜻이냐면, 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치면, 그들은 저희가 부리던 종에게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내가 내 백성을 위하여 손을 들라치면 내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 바벨론 페르시아는 물론 이수라엘을 괴롭혀온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노략질, 약탈과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여 종과 주인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렇게 엄청나고, 이제 이 일이 다름질 치는 것 처럼 임박해 왔는데, 너희는 “Shout and be glad”, 크게 소리지르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방 땅에 안주하여 “먹을것 풍부하고 등다숩고 배부른 이것이 천국이 아니냐!” 하는 너희들은 속히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라, 소리지르고 기뻐뛰어라 고 하십니다. 

여하튼, 여기 시온의 딸들은 오늘날 예수믿는 우리들을 의미하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이 너무좋고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소리지르고 뛰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드리고 그렇게 찬양하고 그렇게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면, 정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대로 예배를 드리면 이단소리 듣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소리지르고 춤추고 두르리고 하지 마십시요. 자연스럽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께서 임하시면, 성령께서 그렇게 시키시면, 그렇게 소리 지르고 뛰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찬양을 하는 중에, 예배를 드리든지 말씀을 읽으시든지 기도를 하시는 중에, 언제가 마지막으로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펄쩍펄쩍 뛰어 보셨습니까? 언제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말로 표현할수 없어서 가슴을 두두리며 소리지르며 엉엉 울어보셨습니까? 아직 한번도 그런 체험을 하시지 못하신 분들, 하나님을 깊이 믿으시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너무 기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올고 뛰고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11절에,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하셨습니다.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하였는데”,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만 하여도 그 즉시 죽게 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백성가운데 거하십니까?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예언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루어 졌지 않습니까?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 더러운 추악한 내 마음속에 와사시겠다는 것입니까? 대통령도 아니고, 높은 사람도 아닌, 친한 친구만 온다고 하여도 방청소를 하고 난리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방문하신다는데 …… 그러므로 회개하셔서 항상 마음의 청소를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러운 것은 쓸어서 쓰레기 통에 버리시고, Vacuum 으로 마음의 먼wl도 털어 버리고, 그리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12-13절에,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황폐한 예루살렘에 거하시겠노라고, 내가 너를 다시 축복하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특히 13절에, “Be silent, all flesh, before the LORD; for He is aroused from His holy habitation” 이제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너희는 잠잠하라 고 하셨는데, 원 뜻은 이제 하나님이 계시니 너희는 혈기를 부리지 말라 는 뜻입니다.

 

 

왜 혈기를 부립니까?
배가 든든하고 쌓아둔 것이 있어서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하면, 햘기를 잘 안부리는데, 살기가 힘들면 혈기를 부리더라고요. 요즘 저를 포함한 우리 한국 사람들 혈기들 많이 부립니다. 사소한 일에도 혈기부리고 목숨을 걸고 싸우더라고요. 매운 고추먹어서가 아닙니다. 살기 힘드니까 그리고 짜증이 나고 억울한 생각이 드니까 혈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민 생활에 몸도 망가지고 마음도 아픕니다. 처음 올때 그 꿈은 사라지고 황폐해질대로 황페해진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 어쩌면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같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Behold, 볼지어다 내가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네 황폐해진 마음을 내가 기름진 밭으로 회복시켜 줄 것이라. 네가 짓다 만 성전, America Dream 을 가지고 왔는데 생활고에 지치고 가정사에 찌들어 포기하고 방쳐 놓았던 그 America Dream, 내가 이루어 주마.

그러므로 네 마음을 청소하여 하나님을 받아 드려라. 그리고 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데, 이제는 혈기를 부리지 말아라. 하나님 앞에 잠잠하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 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 붙잡고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이 약속의 말씀 붙잡고 주님과 함께 새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Mar 01

단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스가랴 1:7-21절)

Posted by on Mar 01 2016

                                                                                                                                                                        Feb 27/2016

엊그제는 동부에 있는 외국 목사님이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기도원을 하나 소개시켜 달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래도 한국사람들이 기도를 제일 많이 하지않느냐, 한국 교회가 가장 영성이 가장 깊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캘리포니아는 너무 멀기 때문에 혹시 뉴욕쪽이든 어디든 하나 소개시켜 달라 하여서 Google에 들어가서 한국 기도원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실망스럽더라고요.

 

 

대부분의 기도원이 내가 생각하던 기도원이 아니었습니다. 한 때에는 아주 유명했던 수양관, 수 많은 교회들이 와서 수련회, 금식기도, 영성집회를 하던 그 곳이, 이제는 화려한 리조토로 거듭났지만, 영적으로는 황폐한 예루살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도원들이 이제는, 와서 먹고 쉬고 놀고가는 휴양소, 소위 말하는 한국의 주말 펜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한 기도원은 여자분이 받는데, 기도원 원장 목사님이시냐고 물었더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하면서, 방 2칸에 화장실 딸린 기도원 방이 하룻밤에 250불씩이고, 밥은 사먹고 잠만 자려면 아주 쪼그만 방이 있는데, 목사님이시니까 하루 $60만 내십시요” 하더라고요. “매일 예배는 있습니까?” 하였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하면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는데, 이 분이 기도원을 인수하여 리모델 하여 이렇게 숙박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경치좋고 공기 좋아서 뉴욕에서도 오고 필라델피아에서 사람들이 자주 온다고 꼭 놀러오라는 것입니다.

 

 

 

한 때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웠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사는 물론 아주사 부흥운동처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1907년 평양 대부흥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대한민국이, 불과 2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순으로 첫번째에서 17번째가 우리 대한민국 땅에 있었는데, 이제 그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계적인 교회 성장학자 Peter Wagner 목사가 명성교회 새벽예배에 설교에 초총을 받아서 갔는데, 새벽 3시 예배에 누가올까 하였더니 예배당이 미어터졌다며, 우리나라를 새벽의 나라 조선이라 소개한 것이 불과 2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교회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는 첫 계명부터 무시하는 WCC에 가입할수 있습니까?

 

 

 

오늘 한국교회들이나 선교단체에서 아프리카등 미개한 나라에 선교사를 수천명씩 파견한다고 자부하는데, 보고하는 것처럼 정말 아름다운 선교들을 하고 계십니까? 정말 원주민들이 복음에 굶주려 그렇게 그 먼길을 걸어서 몰려옵니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왕복 차비에 일당에 구호품 받으려고 오는 것은 아닐까요?

 

 

십여년 전에 중국 선교에 가자고 하여 따라갔더니, 게중에는 11시간 기차를 타고 왔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감동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왕복 차비에 호텔에 재워주면서 호텔 음식 먹여주고 마지막 날은 관광까지 시켜 주는데 그보다 더 좋은 관광 여행이 어디 있습니까? 전기도 안들어 오는 깡촌에서 서울 나들이를 온 셈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도전받은 것은, 게중에는 우리들보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보다 영성이 더욱 깊은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지,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찬양하며 열심히 예수믿는 그 사람들로부터 은혜와 도전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때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리 불리우던 우리 대한민국이 어찌 이렇게 쉽게 식어져 버렸는지…….

 

 

1885년 인천 항구를 통하여 조선 땅에 처음오셨던 미국 북장로교 출신의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냄비팸비라고 하였던데, Nambi Pambi 이게 무슨소리인가 하였더니 냄비처럼 부르르 끓다가 만다는 뜻이었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냄비근성이 있다고 서양에 소개하신 분이 바로 이분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냄비가 되었든 돌 솥이 되었든 식었으면 다시 달구면 되겠지요.

 

 

오늘 본문의 스가랴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오늘 우리나라처럼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때에는 전 세계의 신앙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세계 각지에서 조공을 바치러 줄을 서서 왔고, 화려한 성전에 감탄했던 신앙의 본산지가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자 하나님의 영광과 보호하심이 그들을 떠났고, 마침내는 야만인 바벨론에게 무참히 짓밣히고 성전이 불탔고 초토화 되어버렸습니다. 그 성전이 불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사람들의 칼날에 죽었는지, 들짐승들이 골목마다 수북수복 쌓여있는 시체들을 뜯어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뼈들이 비바람에 흙먼지에 씻기며 굴러다닌지 어언 50여년이 흘렀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그곳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선 곳곳에 굴러다니는 해골들을 치우고, 폐허된 도시를 다시 건설하고자 성전터를 다시 쌓고, 그 위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성전을 짓다가, 성전지을 재료도 떨어지고 자기들 먹을 식량도 떨어지자 곧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는데 전념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해 버립니까? 이들도 냄비근성 때문입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건설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 전세대 사람들, 자기 부모님 세대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 70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겠다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그 약속을 굳게 믿고 간절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들 부모님들 중에는 비록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오 하나님! 우리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하고 위선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라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대사람들이 다 죽은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 자손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계 최 강국이요 세계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에 살면서 등다숩고 배부르니까, 그리고 예배드릴 성전도 없으니까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페르시아라는 이 이방땅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러한 사명을 깨우치지도 못하였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이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깨우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을 통하여 성전 지을 재료도 공급해 주셨고, 성전 기물도 다 돌려 받았지만 좀 힘드니까 당장 그만둬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짓다 놓아둔채 15년이 지나갔지만, 그간 판판하게 잘 다져놓았던 성전터가 페이고 쌓아놓은 주춧돌도 빠져나갔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빨리 완공하여야 하는데 라는 마음의 부담을 가진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내가 희생하며 힘들게 얻은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에게 끌려다니는 신앙은 쉽게 타협하고 포기하거나 변질될 수 있습니다. 모태신앙 자랑할 것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 쉽게 무너질수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아들보다, 안믿는가정에서 태어나 혼나고 맞으면서도 주일헉교 열심히 다닌 사람이 믿음이 더 좋더라고요. 이러한 분들은 위기가 닥쳐도 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일을 하시더라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타락하고 무지한 것 같지만 우리보다 낫은 것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겁없이 선포하는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 오는데도, 아니 막강한 병사들을 모아서 성을 에워쌓고 있는데도 성안에서는 친 이집트 파와 친 바벨론파가 피를 튀기며 논쟁만 하고 있었습니다. 친 이집트파가 득세하면서, 이집트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이것을 안믿는 놈들은 바벨론과 내통한 놈들이다 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면 종북으로 몰리기 쉬운 오늘날 우리상황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비리와 부정을 보고서 아무도 쉽사리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스라엘에는 이사야같은, 한번만 그런 소리 하면 목을 치겠다는 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왕에게 경고하다 처형당한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왕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도, “지금은 바벨론에 투항하십시요, 그러면 저가 왕의 목숨도 살려줄 것이요 성전도 불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하나님깨서 우리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라고 간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우물속에 쳐 넣어진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묶여서 포로로 끌려가는데, 그렇게 정처없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아, 선지자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70년 후에는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로로 잡혀가든지 감옥을 가든지 아니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러 간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망이 없이 가는 것과, 더 낫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가는 것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합니까? 왜 무엇 때문에 순교를 합니까? 더 좋은 나라를 바라보며 순교하는 것 아닙니까? 고통중에 죽어가면서도 “우리 잠시후에 천국에서 만나요” 미소지으며 주님 앞에 가는 그 모습,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없이 어떻게 가능할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설의 손 뿐만이 아니라 기도의 손도 놓고 있을 때에 스가랴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때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임하게 됩니다.

 

 

스가랴는 원래 제사장 베레갸의 아들입니다. 스가랴가 아직 어렸을 때에 자기 아버지 베레갸는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 등에 업혀 왔는지 걸어 왔는지 그것은 알수 없지만, 스가랴는 어려서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저희가 동부에서 여기 켈리포니아로 올때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 때문에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특히 우리 아들 같은 경우는 난지 두달부터 한 두살 많았던 아이들 열댓명과 10여년을 같이 커온 교인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서로 엄청나게 친하였었는데, 그 친구들을 다 떼어놓고 오면서 아픔이 많았었지요.

 

 

스가랴 역시도 페르시야에 자기 친한 친구들 다 떼어놓고 오면서 아픔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지, 자기가 좋아서 온 것이 아니었거든요. 아마도 왜 예루살렘으로 역 이민와야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놀 친구도 장소도 마땅하지 않아 불만도 많았을 텐데, 설상 가상으로 예루살렘으로 이민온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 베레갸는 죽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스가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기 집안을 대표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집안을 대표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어린 나이였지만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이미 하나님의 뜻과 자기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친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스가랴는 금수저를 물고 나온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 아니 그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는 일찍부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자기보다 나이먹은 제사장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학개와 그에게만 환상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먹고살기에 바쁜 때에, 그는 그만큼 신실하게 기도하였었다 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어쩌면 기도하지 않던 스가랴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독제로 인하여 공포로 떨 때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마다 교회마루바닥 두드리며 “서울로 유학간 우리아들 안 잡혀가게 해 주옵소서, 우리남편 밥줄 안끊어지게 해 주옵소서” 라며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그 발걸음들이 까페로 해외 관광으로 이동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 종소리로 4시 반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소음공해라고 종탑 끌어내린지 오래입니다.

 

 

북한이 원자탄을 넘어 수소탄을 만들었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이제는 전 세계 어느곳이든 타격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대륙간 탄도탄 실험이었다며 갑론을박만 하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는 목사님은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군이 압록강 주변에 집결하여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는 신문을 보여주자, “이제 김정은이 종말이 얼마 안남았네” 하며 통쾌하게 웃으시는 목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중국이 왜 압록강 주변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것입니까? 김정은 잡으려고 그런 것입니까? 김정은 잡으려면 가만이 가서 잡지 왜 누구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를 보라고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하자 “그런데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라며 불쾌하게 생각하지 국가에 위기가 닥쳤으니 기도하자고 않하십니다. 특히 지금은 사순절 고난주간인데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목숨걸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목숨걸고 기도합니까? 하루에 겨우 5시간 작정기도하면서 비실비실 하고 있는 것이지, 저도 목숨 내놓고 죽자사자 매달리지 못합니다. 하기야 어떤 목사님을 보니까, 사모님이 암 말기인데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겠지요” 라고 하실뿐 목숨걸고 기도하지 못하더라고요.

 

 

이처럼 요즘 목숨걸고 기도하기 참 힘드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목숨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싫더라도 힘들더라도 졸립고 피곤하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변에서 눈총을 주어도 해야 합니다.

 

 

사가랴가 신실하게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이어서 음성이 들립니다. 8절에,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11절에,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합니다. 예루살렘 온 지경을 다 돌아 보았는데, all the earth is peaceful and quiet,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더이다 라고 합니다.

 

 

이 환상들은 스가랴의 극가와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평온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Quiet, 조용하다 라고 하였는데, 오랜만에 제 시골 고향에 갔더니 온 동네가 정말 쥐죽은 듯 조용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우리 동네에도 쥐가 하도 많아서 낮에는 헛간에서 짹짹소리 밤에는 집누리 속에서 짹짹소리가 낫는데, 사람들이 떠나니까 쥐들도 먹을것 없어 떠난것 같아요.

 

 

옛날에는 동네 가운데에 아이들이 꽉 차서, 구슬치기, 재기차기, 잣치기, 팽이돌리기 등등하며, 몰려다니고 소리지르고 온통 아수라장이었었는데, 그 많았던 사람소리 발자국 소리는 다 어디가고 풀만 수북히 자라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물길어 가고, 빨래 뚜드리는 소리, 애들 목욕시키면서 혼내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소리가 희미하나마 들릴만도 한데……

 

 

지금 예루살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않고, 있어도 들에나가 일하느라 사람들이 없습니다. 성전이 속히 완공되고,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소와 양을 꿀고 줄줄이 섰어야 하는데, 짓다만 그대로 흉하게 서 있을 뿐 조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이 쳐들어 오지도 않습니다. 와서 쳐부수고, 죽이고, 빼앗아 갈것이 있어야 쳐들어 오는데, 와 보았자 빼앗아 갈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적막합니다.

 

 

그러면서 12절에,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하였는데, 이것은 스가랴가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스가랴는 극가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14-15절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합니다.

 

 

이것, 참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악한 길로 가자 바벨론을 통하여 쳤습니다. 즉 바밸론 왕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칠 권한을 줄 터이니 가서 좀 쳐서 정신좀 차리게 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아주 초토화를 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아들이 말을 안들으니까 이웃집 사람에게 우리 아들 부모님 말씀 잘 들으리고 혼좀 내 주십시요 라고 부탁하였더니, 알았다고 하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자기 아들 다리를 작신 분지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옆집사람에게 화가나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와서가 아니라 바벨론이 잔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다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환난받는 사람들, 고난받는 사람들, 어려움 겪는 사람들 구박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사람이 비록 잘못을 저지르고 죄의 댓가를 치루느라 고통중에 있을 지라도, 꼴 좋다 내가 그럴줄 알았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남을 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16절에,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셨습니다.

 

 

스가랴는 환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그발강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특히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던 에스겔에 나타났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황폐해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온 것입니다. 성전이 화려했을 때에는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왜 폐허가 되어 해골만 나뒹구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까? 한 사람, 스가랴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 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라라”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마음으로 돌아 오십니다.

 

 

스가려는 환상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건축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먹줄을 튕기고 대패질을 하고 돌을 다듬는 소리가 들립니다. 도로가 여기 저기 뚫리고 건물들이 올라가며 집들이 지어지는등 예루살렘 성이 엄청나게 크게 번성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앞에 보이는 현실은 텅빈 도시, 사람이 살지 못할정도로 페허가 된 Ghost Town, 괴물도시, 페허 뿐이지만, 스가랴는 환상속에서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 시내를 다니며, 이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교통이 얼마나 혼잡하고 소음이 심한지 정신이 없을 정도의 도시로 크게 회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히부리서 11:1절의 “보이지 않는 실상을 미리 볼수있는 믿음의 능력” 인 것입니다.

 

 

환상에서 깨어난 스가랴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환상을 고합니다. 사람들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이 다시 회복되고 빼앗겼던 명성을 다시찾게되는 소망을 다시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중단되었던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대로 도시가 형성되어 갑니다.

 

 

이제 우리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스가랴 당시의 예루살렘은 그냥 평지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 살지 않는 울퉁불퉁한 산지도 아닙니다. 여기저기 해골이 굴러다니고, 타다만 나무와 돌맹이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낮에도 섬찟하여 함부로 다닐수 없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밤이되면 여우와 늑대등 짐승들이 짖어대는 끔찍한 폐허입니다.

 

 

하지만 한사람의 간절한 기도, 한 사람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예루살렘은 재건돠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가랴 한사람의 기도로.

 

 

이처럼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한분한분이 소중합니다. 여러분 한분이 여러분 가정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때 여러분들의 가정이 다시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분한분이 베이지역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시면 이 베이지역이 횃불처럼 타오르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남북이 총칼을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서울사람 평양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예수님을 찬양할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였던 종들이 풀려나오듯이, 죄악의 쇠사슬에 묶인 우리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죄와 수치와 허물의 쇠사슬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흩어졌던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듯이 세상을 향하여 나갔던 발걸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골짜기 마다 예수의 노래가 메아리치며 가정마다에는 예수님 이야기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흩어졌던 민심이 하나로 모이고, 한반도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동방의 큰 횃불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다, 우리에게도 스가랴를 주시라고. 우리에게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스가랴를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비전을 받을수 있는 스갸랴를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Feb 22

하나님께로 돌아가자(스가랴 1:1-6절)

Posted by on Feb 22 2016

                                                                                                             February 14/2016
이번 주부터 4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사순절 동안은 먼 여행을 삼가고, 쾌락을 삼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씩을 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분은 자기가 콜라를 즐기는데 그 것을 끊는다, 텔레비젼을 안보겠다, 술을 끊겠다 라는 등등의 각오를 하더라고요. 저는 이 사순절 기간동안 만이라도 절제하는 것을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최소한 한가지씩만이라도 희생하셔서 부활주일 때  간증하는 시간때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스가랴 서를 가지고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데, 스가랴서를 택한 이유는 기도하는 중에, “오늘날 우리 한반도 정세가 이스라엘의 스가랴 선지자 시대와 비슷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잘 살아야지 이민자로 사는 우리의 삶의 위상도 높아집니다.

제가 1983년에 미국에 왔는데, “Where are you from, 너 어디서 왔니?” 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Korea, South Korea”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Japan 은 알겠는데, Korea가 어디에 있지?” 라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야, 난 삼성이 일본회사인줄 알았는데 한국회사라면서? 조그만 나라가 대단해!” 라고 합니다.

한국 위상이 올라가니까 이민자를 대하는 미국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대한민국이 잘 살아야 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이 이스라엘의 스가랴 시대처럼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가랴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면 오늘의 위기는 곧바로 기회로 바뀌어질수 있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한 역사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로 혼신을 다하여 흩어진 12지파를 하나로 뭉쳐 통일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 솔로몬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도 지었지만, 자기 아내를 위하여서는 엄청난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궁전을 짓습니다. 성경에는 솔로몬의 이러한 짓이 미웠는지 그의 아내가 거할 궁궐에 대하여서는 14년이 걸렸다는 것 외에는 크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솔로몬이 이러한 엄청난 공사를 하느라 국고를 탕진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워낙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잠잠하고 있다가 그가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게 되자 백성들이 세금때문에 못살겠다고 세금좀 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르호보암 왕은 “너희들이 아직 배가 불러서 그렇다” 면서 세금을 더 징수하겠다고 백성들을 윽박질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여 북쪽에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12지파중 10지파가 따라 가버립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우리 한반도처럼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뉘어져 동족끼리 서로 불천지 원수처럼 싸웁니다.

그리하여 막강했던 이스라엘 대 제국이 하루아침에 약소국이 되어 강대국 앗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조공을 바쳐가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한편 북왕국 이스라엘에 비하여 열세였던 남쪽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두려워 늘 좌불안석 불안감에 쌓여 삽니다. 그러다가 여호사밧왕 때에 와서는 결혼정책으로 평화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에 구테타가 일어나면서 평화조약은 꺠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힘약한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면 그 땅이 모두 자기 땅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남쪽으로는 이집트에 그리고 북쪽에는 앗시리아에 열심히 조공을 바치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을 친다는 명목으로 유다땅으로 들어온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쳐 멸망을 시키고서, 당장 기수를 유다로 돌려 예루살렘을 에워쌉니다. 아차, 정말 큰 실수였구나 깨달은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 북왕국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며 자기 아들 이름을 사라진 지파중의 하나인 므낫세 라 짓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가 퇴각을 합니다.

앗수르가 물러 갔으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섬겨야 했는데, 곧바로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유대 지도자들은 친 바벨론파와 친 이집트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때 이사야, 예레미야, 스바냐 등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 국가적인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왕을 비롯한 제사장들을 중심으로한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호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로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이 성전에서 떠났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매국노라 밀어부치며 감옥에 쳐넣고 심지어는 톱으로 쓸어 죽이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안듭니까?

하지만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을 당하였고,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일부는 바벨론으로 끌려가 전쟁포로생활을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대로 70년이 지나자 잡혀갔던 포로들의 후손들의 일부가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나이어린 스가랴도 자기 아버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 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어오게 된 것은 정말 순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을 멸망시켰던 바벨론은 60여년후 지금의 이란 땅 페르시아에 멸망을 당합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종말론 사상이 매우 강한 조르아스터 교를 신봉하였습니다.
그는 말세에 선신과 악신의 전쟁이 있는데, 마침내는 선신이 승리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 유다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선신이므로,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다시짓고 우리 페르사에 왕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페르시아 왕의 조서를 받고 유대인들은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하여 성전을 지을 재료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빼앗겼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몇년 흐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사람들이 성전건축을 중단하고, 들에나가 밀을 심네 팥을 심네 하면서, 모두 먹고 사는 데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기 위하여 보내여졌다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그들이 귀환을 원하고 바라며 기도하고 노력하여 취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하는 사랑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 대한 사명감이 약했으며, 환경이 어려워지자 금새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건축이 멈춰졌어도 이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기도하는 사람도 벌로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현재의 삶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짓다가 말고 방치해둔지 15년째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천사들이 환상으로 나타나 그에게 멧세지를 주십니다. 이것이 스가랴서가 기록되게 된 동기입니다.

한편, 스가랴서는”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살고있던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묵시를 기록하는데, 유다왕 아무개 몇년이라고 기록되어야 하는데, 유다 왕대신 페르시아 다리오왕 2년이라고 기록합니까?

참 슬픈 이야기 이지만 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에 지금 섬길 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을 때, 고종 몇년 순종 몇년 데신에, 소하 몇년 이렇게 일본 왕이름을 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본 왕이 우리나라 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섬길 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강제로 자기나라 왕을 섬기라고 했기 때문에 할수없이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민족은 있는데 나라가 없는 슬픔, 이것은 정말 말할수 없는 비극입니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에 청년들은 취직이 안되고, 부자가 대물림 하기 때문에 헬조선이라고 부른답니다. 서울에 아파트 한채라도 장만하려면 의사, 변호사, 혹은 대기업 사원이나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게 다 의사되고 변호사되고 대기업에 취직할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자들은 그렇게 조건이 준비된 남자만 찾으니까 청년들이 장가를 못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도 가난하게 살기 싫다고 시집을 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잣집 아들들은 돈 한푼 안벌어도 외제 고급차 타고 잘나갑니다. 수원대학교 총장은 박사논문이 남의 것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고, 자기 아들은 그 학교 다니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알아서 박사학위를 만들어 주었더라고요. 그리고 자기 학교 졸업생과 내연관계를 맺고 그녀에게 아파트를 사주었더라고요. 돈없는 남자 만나서 평생 고생하느니 그렇게 돈 잘쓰는 유부남 만나서 몇년 동거하면서 아파트 한채 챙기는 것이 능력이요 성공의 지름길처럼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신세한탄하며 대통령 욕하고 정부 비판하며 나아가서는 헬조선이라 나라까지 비판합니다. 물론 이것은 정부가 잘못하는 것들 중의 지극히 일부입니다. 이보다 훨씬 잘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럴지라도 내 조국도 있어야 하고, 대통령도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무능하다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60년대에는, “아이고 저것이 뭣하러 생겨나서 밥만 축내?” 하며 자기 딸에게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도 가난해서 먹을 양식도 귀한데 당시에는 피임도 못했으니까, 자녀를 적게 낳는 사람들이 6-7명 아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런 딸이 시집가서 한복한벌해서 친정에 다녀갔는가 봅니다. 그렇게 딸을 구박하던 아주머니가, 저녁밥 지으려고 물떠가느라 북석대는 동네 공동샘에 때아닌 한복을 입고 나와서 “아무 것이 엄마, 나좀 봐봐, 이것 괜찮아? 우리 복순이가 해왔는데 너무 촌스럽지 않어?” 하면서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 글을 쓰는데 연대를 기록해야 하는데 자기나라 왕이 없어서 자기 왕이름을 쓸수 없었던 그 서러움이 얼마나 컸을 까요. 민족은 있는데 나라도 없고 왕도 없는 그 슬픔,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하게, 그들에게는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하나님이 있었고,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건축을 포기한 이스라앨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고 내게로 돌아오라”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라며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한 적이 엊그제 같은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한짓거리들을 본받지 말라 하였습니다.  도대체 그들 조상의 무엇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까?

 

 

그들은 페르시아 왕이 “너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 고 보냈기 때문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몸은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마음은 아직 페르시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돌아오면 좋을줄 알았는데, 조상들이 말씀하신대로 살기 좋은 곳인줄 알고 왔더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열심히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점차 살기가 힘들어져 자연스럽게 중단해 버리고, 누가 다시 일어나 건축하자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페르시아에서의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는 너희 조상을 본받지 말고 내게로 돌아오라” 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조상들의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첫째, 강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는 누르는 노예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의 헌법은 성경에 입각하여 약자와 피해자를 보호해야한다는 정신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처음에는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타락하여 자기들이 가진 권세로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착취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아무도 제사장을 고소하거나 항의할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페르시아에 노예로 살면서, 페르시아 관리들에게는 아부하고 자기 민족들중 약한자들은 짓밟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법은 그나라 관리들이 포로들을 어떻게 관리할까?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었겠지요. 우리 민족도 일제하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법이 일본을 위하여 만들어졌으니까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 죽여도 괜찮지만 조선사람들이 일본사람 죽이면 사형감이지요.

이것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는데, 노예근성을 가진 나라일수록 그 나라의 헌법은 지배자와 가진자,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대한민국 법을 보십시요. 성경에는 계획적으로 이웃을 죽인자는 처형시키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법도, 계획적인 살인은 사형이나 무기징역등 아주 엄격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자기 아내를 죽여도 5년살고 나오더라고요.

겨울에 난방비가 비싸서 연탄도 제대로 못때는 사람들이 잘사는 서울에도 꽤 많이 살고 있는데, 그런사람들은 지원해주지 않고 왜 돈잘버는 기업에 매년 수천억원씩 지원해 주더라고요. 일반 사람은 마약을 하거니 판매하다 걸리면 당장 징역행인데, 여당 대표사위나 전직대통령 아들은 환각파티를 열고 남녀 엉클어져서 피워대도 검찰이 손도 못댑니다.

오늘날 친일세력을 정리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지만,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일은 우리나라 헌법부터 약자,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자에 아부하고 약한자를 짓누르는 악순환이 계속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러한 노예근성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둘째, 준법정신이 약한 너희 조상들의 노예근성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창기 때에는 준법정신이 무척 강했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직전부터 가나안에 들어와 애호수아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제사장들부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며 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호수아도 죽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헤이해져, 나중에는 하나님의 성전일을 도맡아 하는 레위인들부터가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누구보다도 더욱 경건하게 살아야 레위인이 첩을 얻고, 여자에 미쳐 제사드려야 할 성전을 비우고 떠났다가 변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도 자기 잘못은 깨닫지도 못하였으며, 분노를 참지못하여 죽은 첩 시체를 12동강 내어 각 지파에게 보내지 않습니까? 일반 사람도 아닌 레위인이 말입니다.
이러한 조상들의 법을 어기는 타락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왔을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관공서에 가서 줄서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기다라려니까 짜증이 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차분히 잘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 가서 시내를 다닐때 주로 시내버스를 이용하였는데, 4거리 큰길 신호등 앞에서 빨간불인대도 양쪽에 차가 없으면 속도를 조금 줄이다가 그냥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정말 놀랐는데, 나중에는 숙달되니까 괜찮더라고요.

그런데 이것모두 노예근성입니다. 식민지에서는 헌법이 지배자들을 위하여 정해졌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기는 것이 애국입니다. 지배자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최고의 애국입니다. 그래서 아직 독립국을 이루지 못한 팔레스타인들은 자살폭탄을 터뜨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제 독립국가를 이루었으면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자기나라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보십시요. 자긷,ㄹ이 법을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먼저 어깁니다. 회의중에 자기들끼리 분노를 참지못하고 쌍욕을 하고 추태를 부리니까, 오죽하면 지금 대통령께서 소위 말하면 “선진화법”을 추진하여 통과시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법을 없애자고 하십니다.

누가 잘한다 잘못한다 라는 차원이 아니라, 선진국에서 볼때 우리나라는 선진국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 식민지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나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을 탈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공동체 의식이 약한 너희 조상의 노예근성을 버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라 하시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음에는 열심히 성전을 지어갔습니다. 그런데 2년째 접어들면서부터 포기해 버립니다.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공동체의식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선 내 배부터 채워야지 왜 성전에 돈을 쏟아붓고 지게지고 흙벽돌 날아야 돼? 나 바빠,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밀도 심어야 하고 팥도 심어야돼!” 하며 성전건축을 중단한 것입니다.

 

 

물론, “나만 잘살면 되었지 무슨놈의 나라가 필요하고 민족이 필요해, 조국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국방비를 훔친 해군 참모총장이 있는가하면, 가짜 짝퉁물건을 넘겨주면서 최첨단무기라며 엄청난 돈을 챙긴 군수업체 중간 상인들,
병사들이야 죽든 말든 나라야 망하든 말든, 그 돈으로 호화저택 사서 편안히 잠을 자면서도 양심에 조금도 걸리는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예주제에 무슨 국가의 필요성을 느낍니까? 다른 사람들 등을 쳐서라도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이지” 이러한 노예근성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는 너희 조상을 따르지 말라하십니다.
성경에는 죄를 범하는 죄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책망을 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자기 부하의 아내와 동침하고, 심지어는 자기 군대장관 요압을 시켜 살해하고 그녀를 아내로 빼앗아 옵니다. 그런데 그가 나단 선지자가 그 죄를 지적하자 진심으로 회개를 합니다.

시편 32편이나 58편을 보면, 밤마다 죄책감에 시달려 마치 큰 돌에 짓눌려 몸에서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고백을 합니다. 또한 얼마나 괴롭고 아팠는지 회개의 눈물로 침상이 젖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교만죄인데, 어떻게 보면 다윗에 비하여 그리 큰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그 죄를 지적하였을때 그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승전비를 세우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하십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죄보다 회개하지 않는 죄를 더욱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로 돌아 오신다 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 올때, 옛날 죄지은 그 모습 그대로 돌아 올수 있습니까?
지은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지요.

호세아 선지자는 바람피워 남의 남자의 애를 낳고, 나중에는 집을 나가 창녀가 된 아내를, 포주에게 몸값을 다 물어주고서 빼내어 옵니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합니까?
나도 너만 사랑할테니, 너도 이제부터는 네 애인들 다 잊어버리고 나만 사랑하라.
정말 얼마나 애처로운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광야로 가자고 합니다.

오랜만에 아내를 만났으면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맛잇는 것도 주고 편히 쉬게하여야 할텐데, 아무 먹을 것도 마실것도 없는 광야로 가자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하였던 곳, 옛날 처음 만났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주님 처음 만난 날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 거기로 가서 거기서부터 새 출발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창녀가 된 고멜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영적 바람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광야로 가자. 바벨론 시절 이전, 가나안 시절 이전, 끔찍하게 범죄하고 노예근성에 빠지기 전 그 모습으로 나와 만나자 주님은 지금 초청하십니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횔을 하면서, “야 그래도 이집트에서 살때가 봄날이었지. 그때 주인님 고기를 삶을때 놀래 건져먹던 그 맛, 아 먹고싶어. 그래, 그때 그 고기, 마늘과 부추함께 먹으면 기가 막햤는데, 그리고 힘이 펄펄 났었는데…… 다시 이집트로 돌아 갔으면 좋겠다. 몸은 지금 애굽을 나와 광야에 있지만, 마음은 애굽에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에게, “Let my People Go, 내 백성을 가게하라” 고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Let your Heart Go, 네 마음이 가게하라” 하신 것입니다.  비록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페르시아에 있었던 그들, 거기에는 살만한 집이 있었고 먹을 만한 음식이 있었고 수리만한 물가도 있었는데, 이 황량한 예루살렘, 내가 무엇하러 왔던고…… 페르시아에 마음을 빼앗긴채 성전 건축을 중단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에게로 돌아 가리라” 애처롭게 간청하십니다.

 

 

혹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몸은 주님 전에 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시지는 않습니까? 이시간 우리 마음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행실이, 우리의 가치관이, 우리의 물질관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십시다. 아니 그에 앞서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를 섬기시는 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행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십시다.

Feb 22

선교에 대한 나의 생각

Posted by on Feb 22 2016

선교에 대한 나의 생각

얼마전 오랫동안 선교를 후원해온 선교가 와해되면서 선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 간  선교지를 몇군데 다녀오면서 문제점들을 보았었지만, 선교의 소명을 받고서도 외면해왔던 제 자신이 부끄롭고 죄송스러워, 오히려 선교사님들을 존경하여 왔던지라 이 글을 올려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컸지만 다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로 듣고 반감을 사실 분들이 있을것 같아 꼭 다물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기도하는 중에 “네가 아직도 사람을 두려워 하는구나” 라는 부담을 주셔서 올립니다.

 

제 전공이 선교신학이어서 그런지 일선에서 선교를 하시는 분들이나 선교단체를 이끄시는 분들을 만나다 보면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그 분들의 리더십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리더들입니다.  강아지가 따르면 강아지의 리더, 자녀들이 따르면 자녀들의 리더, 학생들이 따르면 학생들의 리더, 민중이 따르면 민중의 리더입니다. 물론 강아지를 위한 리더십, 자녀들을 위한 리더십, 학생들을 위한 리더십 민중들을 위한 리더십은 각기 달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로부터 도움을 받고있다는, 무엇인가 유익이 되고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품성이 예수님처럼 존경스럽고 배울만하다면 사람들이 그 품성을 배우고 싶어 따릅니다. 내가 부자면 나의 돈을 보고 따릅니다. 나의 비전이 그들의 공감을 사고 나의 비전을 이루는 것이 그들에게도 자신들의 비전이나 삶의 목표를 이루는 부분이 되었다고 느낄때 다릅니다.  이 때에는 나의 비전에 그들도 동참하고자 합니다. 그들을 동참시키지 않으면 그들은 실망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러므로 “나 외에는 다른 리더는 없다” 라는 식의 구조를 가진 단체는 그 리더와 함께 몰락함을 심심치않게 봅니다. 더구나 교회는 차치하고 선교도 세습한다는 풍문이 돌자 술렁거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라는 하나님의 보내심, 소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뚜렷한 소명이 없이 나의 생각이나 다른사람의 권유로 시작하는 선교는 풍랑만난 배처럼 방향을 수시로 바꾸면서 갈팡질팡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할수 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재임때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북한 선교가 오늘날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선교의 기본 정신은 성육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위치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아야 할 분께서 섬기셨습니다. 멸시와 고난을 참아 내셨습니다. 물론 주님처럼 현지인들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이 더불어 음식을 먹으며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현지인들은 깜둥이 무식쟁이들이 아니라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인데, 제가 현지에서 본 어떤 선교사님은 대한민국의 옷을 벗지 못하고, 아니 벗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셨습니다.

선교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알몸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실때 속옷까지 다 벗겨진채 알몸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로마병사 롱기누스의 창에 찔려 몸속에 있던 피 한방울까지도 다 쏟아내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선교사님들이나 선교단체를 이끄시는 분들은 선교가 “내 것” 이었습니다. 내가  피땀흘려 모금하고 노력하여 이만큼 이룬 나의 사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의 벽을 넘어서기는 커녕 개인의 벽도 너무 두껍고 높아 감히 그 안을 쳐다볼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내용이나 헌금 사용처가 투명해야 합니다. 북한, 남미, 중국, 아프리카 등에 선교를 한다고 자극적인 사진과 동영상을 올려서 모금을 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피같은 주님께 드린 헌금에 대한 사용처가 투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비밀을 요하는 특수사역인 만큼 밝힐수 없다고 하는 분들 때문에 헌금해오신 분들이 Discouraged 되고 이런 이야기가 안믿는 자들에게 흘러들어가 다른 선교사님들까지도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상에 파송하여 오신 하나님의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교의 표본입니다. 현지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셨고, 현지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제자들보다도 더 깊은 기도를 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권세로 병든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그리하여 심령이 가난할수 밖에 없었던 자들을 위하여 사역하시다가 불의한 자들의 손에 희생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자기 소유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비참하지만 비굴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자랑은 커녕 자신을 위한 변명조차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돈을 뺏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못질을 한 사람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후원하시다가 실망하신 분들도, 지금까지 해오신 그 모든 것도 나의 영광이나 보람을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신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으로 만족하시고  망연자실 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 자리에서서 그 신발을 신게되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교지에 짧게는 한주일 길게는 한달씩 있으면서 피상적으로 본 경험이지만, 그리고 실망한 후원자들의 망연자실함을 보면서 극히 개인적인 소견을 올렸습니다.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자극이 되고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다면 주님께 감사드릴 일이겠지요.

 

Dec 30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연말에 임현수 목사님을 생각하며……

Posted by on Dec 30 2015

Pastor Im of Toronto Keun Vit Church has been detained in North Korea for several months, and was sentenced to life time in Labor Enlightened Camp. He visited North Korea numerous times to share the Gospel. He planted blueberry in North Korea to make a fund for the mission. Let’s pray for his freedom and his dream be true.

 

북한 선교를 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임현수 목사님 소식을 접하고 나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북한이 갑작스럽게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이른바 갑작스런 통일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고 김영삼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전 국민은 긴장하였습니다. 그 여파로 발빠른 목사님께서 분단 전까지 존재하였던 교회 명단을 내밀면서 북한 교회를 재건하자는 취지하에 북재위가 설립 되었고 많은 교회들이 북한에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데 헌금으로 동참하였습니다. 뒤늦게 한기총에서 동명으로 모금을 하면서 모양새가 흐려졌습니다.

 

1996년 시카고 한인 선교대회에 참여하여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는 없습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결집된 정치집단임과 동시에 종교 단체입니다. 흡수통일의 꿈을 깨십시오. 북재위는 근거없는 정치적 논리에 불과합니다. 왜 정부의 허락도 없이 북한에 잠입시켜 아까운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십니까? 당신의 명예욕과 기금마련을 위한 발상 아닙니까? 이런식으로 하면 앞으로 누가 북한 선교에 동참하겠습니끼? ” 라며 북한선교 Front Runner 들과 논쟁할 때 이 분은 백두산 기슭에 불루베리를 심으셨습니다.

 

내가 주장한대로 흡수통일론은 점차 힘을 잃어가는 동안 햇볕정책쪽으로 기울어 갔고, 이 분이 심으신 백두산 불루베리는 자라갔습니다. 흡수통일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던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시던 그 분들은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잘 설명하시어 많은 북한 선교헌금을 모으셨는데, 하나님의 그 물질이 북한 선교의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구제척으로 밝히시지 않으시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08년에는 백두산 불루베리가 경운기에 실려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미리보며 크게 기뻐하신 분이신데…… 그나 저나 90년대 말 북한재건위원회가 둘씩이나 양립하여 열심히 모금한 자금을 어디에 사용하셨는지, 아직도 저만 모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지난 실수들이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발목잡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1992년 신학교에 올때부터 북한이 열리기를 고대하였는데, 그래서 박사학위도 교회사로 하려다가 북한 선교로 선회하였는데 아직도 쉽게 열릴 기미가 안보이네요. 남과북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망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민족과 후손을 위하여 고민하고 아파해 하고 서로 양보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 같은 자극적인 발언들은 삼가고,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교류를 해왔더라면 지금쯤은 서울로 출근하여 “벌써 배가 허출하네, 오늘 점심은 어디서 할까? 대동강변 모란각도 괜찮은데……” 라는 사치스런 고민도 해 볼텐데…… 마라톤 대회도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아닌 회령에서 목포까지 아니 신의주 어적도에서 부산 거제도까지 그야말로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마라톤 대회가 될 텐데…… 그리고 이 못난 놈도 전도한답시고 평양거리를 분주하게 다닐텐데…… 누가 압니까? 평양 동교회 서교회 남교회 북교회 이렇게 4개의 클러스터 교회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선명하게 밖혀있는데…… 그리고 또 누가 압니까? 평양 시내에는 예수 전도단이 판영하며 전도하고 종로 내거리에는 주체사상 전도 쪽지를 돌리는 사람들이 생겨날지……

 

10년전 상하이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푸동항에서 날아서 심양에 내려 찜질방에서 묵으면서 지하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다음날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서 단둥에 도착하였습니다. 단둥의 찜질방에서 묵으면서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미군이 투하한 폭탄을 맞아 끊어진 압록강 다리를 밟아보았습니다.

 

간밤에 보았던 깜깜한 신의주 주민들을 생각하며 아픈 가슴을 안고 유람선에 몸을 실은체 강 가운데에서 신의주 시를 바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양이 차지않아 다음날 아침 일찍 세수도 하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채 고속정으로 북한 강변을 급히 달리면서 북한 땅을 좀더 자세히 보았습니다.

 

착잡한 기분에 멍하고 있던 나에게 “북한을 본 소감이 어떠냐” 는 선교사님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저 땅에서 설교하고 싶다” 라며 준비되지 않은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 하류 쪽으로 달려 돈이나 먹을 것을 얻을까 달려오던 북한군을 만나 악수하는데, 나이가 몇이냐 하였더니 19살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뭐냐고 하였더니 **라고 합니다. 세상 물정모르고 보초만 서고있던 ***, 너도 지금쯤은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 되었겠지. 내가 북한에 교회를 세웠더라면 너도 우리 교회 장로, 아니 최소 집사님은 되었을 텐데…… 모르지, 오히려 네가 나를 주체사상 믿으라고 설득할지……

 

임현수 목사님!
무척 힘들고 말로 형용할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겠지만 당분간만 참으실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before they call, I will answer; and while they are yet speaking, I will hear. (KJV. Isaiah 65:24) 세상이 뭐라해도 당신은 믿음의 용사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신은 최전방에 서신 하나님의 용사이십니다.

 

 

This, Too, Shall Pass Away by Lanta Wilson Smith

 

When some great sorrow, like a mighty river,
Flows through your life with peace-destroying power
And dearest things are swept from sight forever,
Say to your heart each trying hour:
“This, too, shall pass away.”

When ceaseless toil has hushed your song of gladness,
And you have grown almost too tired to pray,
Let this truth banish from your heat its sadness,
And ease the burdens of each tiring day:
“This, too, shall pass away.”

When fortune smiles, and, full of mirth and pleasure,
The days are flitting by without a care,
Lest you should rest with only earthly treasure,
Let these few words their fullest import bear:
“This, too, shall pass away.”

When earnest labor brings you fame and glory,
And all earth’s noblest ones upon you smile,
Remember that life’s longest, grandest story
Fills but a moment in earth’s little while:
“This, too, shall pass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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