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09

김진환 목사 한국방문

Posted by on Sep 09 2011

김진환 목사님이 9일부터 26일까지 한국을 방문합니다.

일정은 11일: 남전주 성결교회 주일 1-2부 설교

              18일: 익산 남중교회 주일 설교

               25일: 동원 열린교회 설교

입니다. 은혜스러운 방문이 될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Sep 09

Let My Sprit Go!

Posted by on Sep 09 2011

                                                                Let my spirit go

천문학자자 되고자 하는 건실하고 똑똑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청년이 길을 가는데 쓰레기를 담은것 같은 조그만 종이백이 길가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줏어서 쓰레기 통에 담으려고 그 백을 집는 순간 갑자기 그 백이 폭발을 합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손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갔습니다.

청년은 절규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좋은 일을 하는데 왜 이런 피해를 당해야 합니까? 앞으로 손가락 없이 어떻게 평생을 산단 말입니까? 천문학자의 꿈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죽고 싶었습니다.

범인은 뜻밖에 UC Berkeley의 천재 수학교수였던, MIT 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Ted Kaczynski 였습니다. 물론 그는 체포되어 형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끊어 없어진 손가락이 다시 돋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된일은 어찌할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범인에게 심한 형벌을 가한다 할지라도 그의 잘라 없어진 손은 회복될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살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혹은 타인의 고의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아주 불공평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면서 부터 불공평하게 태어나서 한평생 장애자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어떻게 그러한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인생을 승리로 이끌었는지, 혹은 그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인물 모세입니다.
1. Pitiful Fate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그저 이집트 송주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매우 총명하였으며 당시 문명이 가장 발달하였던 이집트의 모든 학문을 배워 지식과 힘이 겸비된 훌륭한 장수이자 이집트의 유망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당시 히브리 종들을 대거 투입하여 이집트의 스핑크스나 피라밋을 만들고 대 수로를 개설하는등 많은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를 추진하였습니다. 공사를 단 시일내에 잘 마치기 위하여 노예들을 혹사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훌륭하고 웅장한 공사를 하면서 여기에 투입된 많은 히브리 노예들이 사고로 인하여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이집트 왕의 아들이 아니라 히브리 종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태까지 자기가 부리고 학대했던 히브리 종의 아들이라니, 이것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히브리 종의 아들이라면 자기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는 없습니까?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집트의 궁궐로 들어와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까?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히브리 노예였다면, 자기 아버지 어머니도 공사 현장에서 자기 채찍에 맞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공사중에 사고로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2. Come Out From Comfort Zone
아무도 안전지대(Comfort Zone)에서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지대에서 나오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Comfort Zone 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발전도 없이 퇴보하거나 자멸하고 맙니다. 때로는 강제로 Comfort Zone 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모세는 너무 심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여 안전지대인 궁궐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 부모님이 거기서 심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예 작업장으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애굽의 노예 관리인이 히브리 노예를 학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노예 관리인은 옛날 자기 밑의 관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그렇게 학대하는 것을 지금까지 묵인하여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모세는 그 장면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노예 관리인을 그 자리에서 쳐 죽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작업장에 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히브리 노예들끼리 싸웁니다. 노예 주제에 서로 도와가며 살아도 부족할 것인데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씨움을 중재하며 훈계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않고 “네가 어제는 애굽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느냐” 고 대듭니다. 졸지에 살인자로 몰린 모세는 그 길로 미디안 광야쪽을 향하여 도망칩니다.

Comfort Zone 애서 나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냥 궁궐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애굽의 왕이되었을 지는 모르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Comfort Zone 에서 나와야 합니다. 심히도 불안하며 치러야 할 댓가가 두렵지만 그래도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발전성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결국 타인에 의하여 밀어냄을 당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 상처를 치유받으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물론 지기 백성들로 부터 거절당한 모세, 그의 거절감에 대한 상처는 대단했습니다. 미디안으로 도망치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치던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만난 모세는 그집 데릴사위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보라와 결혼하여 자녀들 낳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애굽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에 올라가 애굽을 쳐다 봅니다. 몸은 미디안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애굽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40여년을 보내던 어느날 불타는 떨기나무를 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누볏던 그 신을 벗고 이제는 내가 지시하는 사역의 신발로 바꿔 신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애굽으로 가라” 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침묵하셨던 하나님께 모세는 섭섭했을 것이고 화도 많이 낫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직 애굽의 왕자였을 때, 애굽 왕자로서 권세 그리고 젊었을 때의 그 끓는 열정으로 사역하였다면 훨씬 쉬웠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권세도 돈도 없이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동역자도 하나없이 처가에 얹혀사는 신세입니다. 그리고 나이도 벌써 80이나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만한 기력도 없습니다. 다 늙은 노인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애굽의 식민지에서 구할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모세의 첫번째 반응은, “난 못합니다” 라며 거절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거절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살인범으로 몰아세운 자기 백성과 애굽 왕실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생명을 찾던 자들이 모두 죽었다” 라고 하십니다. 결국 모세와 하나님과의 사랑싸움은 거기서 끝이나게 되고, 마침내 모세는 애굽을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

자기의 실패의 자리 고난의 자리로 돌아온 모세, 거절감에 대한 상처가 되살아 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과 같이 왔습니다. 실패의 그 자리에 주님과 함께 왔던 모세,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Assurance 로 말미암아 치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는 이제 과거의 모세가 아닙니다. 또 거절당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 다가서지 못하는 모세가 아니라 거절 당할지 알면서도 애굽왕 바로에게 “Let my people go” 라고 요구하는 모세로 변화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그 안에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서든 성공을 통해서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쁨 중에든 고통중에서든 하나님을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4.Go With Jesus and Proclaim – Let My Spirit Go
모세가 바로왕에게 :내 백성을 보내소서” 라고 하였을때 애굽왕 바로는 당연히 거절합니다. 물론 애굽왕이 거절하였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에 꼭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애굽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노예생활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그 생활에 젖어들어가 살다보니 거기에 너무 익숙해진 것입니다. 이제는 애굽을 떠나면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애굽 왕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꼐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그들 앞에서 이적을 베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애굽의 술객들도 할수있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침내는 그 이적을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애굽왕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애굽왕을 통하여 출애굽을 주도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애굽의 Bondage 는 무엇입니까? 제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는데 “애굽의 Bondage 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내혀가 그렇게 돌아가면서 “애굽의 Bondage 에서 나를 구하소서” 라는 기도가 계속해서 니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도 몰라서 “하나님 애굽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소서 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라며 기도하는데 갑저기 전등석화와 같은 깨우침이 왔습니다. 애굽의 쇠사슬은 현재 나를 얽매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 나는 분명 분노의 노예입니다. 내가 마약이나 알콜 뿐만이 아니라 어느 것이든지 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다면 나는 분명 그것의 노예상태인 것입니다. 혹시 질투나 욕심에 빠져있으면 나는 이미 그것들의 노예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Bondage 예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Let my spirit go!” 를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ug 30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9-11)

Posted by on Aug 30 2011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도행전 1:9-11절

                                                                                                                                                                                                                         June 26/2011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 가시는, 즉 승천하시는 모습입니다.
천사의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는 말로 시작하여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로 끝나지만 이 짤막한 대목이 바로 오늘 우리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주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사망, 죽음은 이 세상 모든 것의 끝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사람도, 그리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은 나면 이윽고 죽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들이 참 오래 들 살았습니다. 900살 이상 살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살아도 마침내는 다들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면 육신이 썩고, 그러면 다시 살아날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크고 힘든 일일지라도, 그리고 아무 중요한 일일 지라도 그 사람이 죽으면 끝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쉬운 죽음일지라도 장사 지내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2장 29-32절에서 베드로는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고 간증합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믿음의 본이 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열왕기 상하에 보면 유다의 왕들을 다윗 왕에게 비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기준이 됩니다. 그롷게 믿음이 좋으시고 훌륭한 분일지라도 다윗은 이미 죽었고 그의 무덤은 오늘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육체는 사망이라는 권세 하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디모데 후서 1장10절에 “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 하였듯이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다른 아무도 할수 없는 일, 오직 예수님 만이 사망권세를 파괴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과 나의 삶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삶을 점차 변화시켰습니다. 두려움에 숨어서 떨고 있던 그들은 대담하게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걱정하며 허탄한 심령으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놀랄만한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으로 부터 받기만 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고 소망가운데 살았습니다. 오늘의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 반듯이 내일의 기쁨으로 되돌아 오리라는 확신에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변화시키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움추리고 두려워하던 소극적인 신앙에서 담대하고 용기있는 적극적인 신앙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만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예수님을 위하여는 목숨까지는 내 놓을수 있는 신앙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고난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 뒤에 오는 축복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40주야를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다시 살아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그것은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을 꼭 잠그고 깊은 방안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 방안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사라지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옛날처럼 항상 그들 옆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 계시는 예수님이 실체인지 아니면 영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 처음에는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갈릴리로 갔지만, 거기서 다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옛날 삶, 즉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것입니다.

참 한심한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어쩌면 저렇게 미련할 수가 있을까? 예수님과 그렇게 대화도 나누어 보고 밥도 같이 먹고 전도와 선교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 나누고서도, 그리고 혼자서 만이 아니라 여럿이 같이 모였을 때 그렇게 하고서도 어쩌면 저렇게 믿음이 없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혹시 이런 경험은 없습니까? 그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도 해보고 밥도 같이 먹어 보았어도, 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부부간에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오면서도 서로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기도 싫어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대화가 안되기 때문에 대화도 못하게 됩니다.

오늘 제자들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실체로 받아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완전한 실체로 받아드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만져 보고 식사까지도 같이 해보고서도 완전히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오셔서 예수님을 보기만 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만 듣고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시고 예수님을 온전히 구세주로 믿으실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로서 분부하신 것, 즉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 전도나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은 내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사명을 잃은 교회는 오래가지 못하고 지리멸절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꼭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저희가 즉,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어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렇게 확실히 믿지 못하던 제자들, 갈리리 디베랴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그들, 이제는 달라 졌습니다. 이제는 막연한 영이 아니라 실제 살아계신 예수님이심을 의심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듣습니다. 처음에는 언제쯤 다시 오십니까? 그 날에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까? 라고 묻던 제자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꼭 지키겠노라고 굳게 다짐합니다. 이제는 댓가를 바라고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의 말씀 그 자체를 붙잡고 사역을 합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다 같이 바라 봅니다. 마치 애드벌룬이 서서히 공중으로 올라가듯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들은 두 눈들로 똑바로 바라봅니다. 공중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작아지면서 구름 속으로 사라지시는 주님을 그들은 안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바랍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환상이나 착각이 아닙니다. 번개처럼 갑자기 눈 앞에서 휙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다 같이 보는 가운데 천천히, 예언하신 그대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구름이 그들을 가리웠습니다. 예수님의 움직임과 더불어 구름도 같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구름이라든지, 자연물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구름이란 수증기가 공중에서 언 얼음알갱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주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자연 현상까지도 주님의 명령에 모두 순종합니다. 말씀으로 바람도 순종하고 파도도 잠잠하게  하시는 주님 엎에 구름도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에 가리워져가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입니다. 구름 그 저편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우리는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온전히 이해할수 없다고 하여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바뀌는 것 아닙니다. 증명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것을 증명하여 확인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믿음이 있느냐? 믿어라 고 종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증거를 찾으려고만 하지 마시고, 성경말씀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날 제자들이 본 그 모습 그대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그 모습 그대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시지 않으십니다. 백인이 아닌 유대인의, 아니 동양사람의 얼굴로 오실지도 모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흰옷을 입고 심판 주로 오시는데 그 빛이 너무 찬란하여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십니다. 그 중에서도 언제 오실 것이냐에 대한 관심이 제일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언제 오실 것이냐 라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많이 출현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Herold Camping 이 주님께서 지난 5월 21일 날 오신다고 예언하였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지금은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5월 21일부터 영적인 심판이 시작되었고 오는 10월 21일부터 세상의 심판이 시작된다고 또 다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예언을 무작정 이단이라고 무시하고 비판하는 태도 보다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그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세상의 심판 날만을 위하여 준비하시지 마시고 우리 자신들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할 준비도 아울러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종말도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계획은 1000년을 살 것처럼 미래를 위하여 세우되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각기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저 이론일 뿐 성경적이다 맞다 틀리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우선 독일 신학자 Robert Bultuman 은 재림 사상을 갖는 그 자체가 귀하다고 하였을 뿐 그 시기에 대하여서는 언급을 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기 전에 주님께서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근거로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여 복음이 온 세상 구석구석까지 전파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시기가 앞당겨 질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주장합니다. 이 분의 이러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우리 세대에 주님의 왕림하심을…… 땅끝까지 전파하자” 라는 구호와 함께 선교의 열정이 되살아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C. H. Dodd 라는 학자는 예수님은 이미 재림 하셨다.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할 당시 성령님이 불같이 내려오시던 그 오순절에 이미 오신 것이다. 지금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Oscar Cullman 이라는 학자는 주님은 이미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시지만, 주님의 실체는 지금도 또한 오시고 계신다 라고 주장합니다.

믈론 우리 현실에서는 그러한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원어적으로 본다면 헬라어의 파루시아가 바로 Oscar Cullman 이 주장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살아계신 예수님은 예수의 영으로 우리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계시고, 또한 육신을 가지신 실체의 예수님은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실때 곧 오시마하고 가신 주님, 이제 곧 오실 것입니다.
승천하실때 그 모습대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더이상 십자가에 달려있는 분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 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으로 오셔서 우리 마음속에 계시고. 이제 곧 실체와 함께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곧 이 땅에 다시오실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 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원토록 아무런 소망이 없는 지옥의 형벌속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상급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16-19절에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하였듯이 각자의 행한대로 각기 다른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 주님으로부터 열고을 다섯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고 주님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Aug 27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창세기27:1-10)

Posted by on Aug 27 2011

창세기 27:1-10절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
                                                                                                                                                                                                                         June 19/ 2011

미국의 아버지날은 본래 6월 19일인데 실제로는 6월의 세번째 일요일에 지킵니다. 그런데 오늘이 6월 19일 인만큼 처음 재정했을 때와 동일한 날짜입니다. 첫 아버지날은 미국 워싱턴주 스포케인에 살던 Sonora Smart Dodd 여사에 의하여 제청되었습니다.

어머니날이 처음 시작된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 어머니날이 공식적으로 지켜진지 2년 후인 1910년 5월, 교회에서 어머니날 설교를 듣던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자신을 비롯한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곧 아버지날도 제정할 것을 제안했고, 이 안은 곧 그 도시의 목회자와 스포케인 YMCA 회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날짜는 Dodd 여사의 아버지 생일인 6월 5일로 정하기로 했으나, 그때로부터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로 2주일 뒤로 미루어 19일이 되었습니다.

곧 전국적으로 아버지날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으나 어머니날처럼 빨리 의회에서 이 날 제정에 대한 안이 통과되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남성으로만 되어 있던 당시 의회에서 의원들이 아버지날 제정이 자화자찬하려는 의도로 오해될까봐 꺼려했던 탓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전승 탈무드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스릴수 없어 이 땅에 아버지를 두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신한다 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모로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첫째, 본능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비하여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관계속에서 개발됩니다.
자녀는 어머니의 몸의 일부이기 떄문에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9개월을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Bondage 는 본능적입니다. 서로 탯줄로 이어졌는데 이 탯줄을 통하여 서로의 감정도 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만할때 탯줄을 짤라내지만 그래도 그 탯줄 양끝에 남아있는 세포를 통하여 어느 일정기간동안 어느정도는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보이지 않아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아이가 극한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느낄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체험을 통하여 이해되고 발전되어 갑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이런 생물학적인 Bondage 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처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삭은 자기 두 아들들과 특히 작은 아들과는 대화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맏아들 에서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그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는 것 외에 그 아들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장자권을 물려주겠다는 그것으로 아들에게 자기의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사냥을 같이 나갔으면 좋았으리만, 장자권을 물려 줄 터이니 아들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된 것입니다.

야곱 역시도 자기 형과 거래를 합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저권을 사겠다는 장삿꾼 속셈을 언제부터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이삭의 가족은 본의아니게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오늘날에도 이런 가정들이 있습니다. 부부싸움도 물론 성격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 때문에 싸웁니다. 성격차이도 알고보면 돈을 어떻게 벌고 사용하느냐에 대한 이견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관계로 다져져야 할 가족끼리의 관계가 물론 사랑도 있지만 그 사랑 마져도 거래관계로 전락해 버린다면 얼마나 슬픈 관계입니까?

사랑하는 아버지들이여!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십시다. 조건없는 희생의 사랑, “너를 위해서는 내 목숨도 포기할수 있다” 라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다.

아버지의 사랑은 더불어 살면서 관계를 통하여 개발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면 아버지의 사랑도 끊어집니다.
나이든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삭은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은 배웠지만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백세된 아버지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만한 기회가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나이차이가 많아서 그랬었는지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기는 하였어도 아들로서 아버지와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결박하고 죽여 재물로 바치려했던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 충격은 평생 잊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권리가 있는 것인지,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다는 것은 어떤 사랑인지……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너무 바쁘다보니 아들과 시간을 같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서는 힘들 것입니다. 한때 큰 회사의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임종시에 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낼수 있었을 텐데 인생을 참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저도 아버지와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은데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이 아들은 고등학교때 풋볼 쿼터백이었다고 합니다. 평소 게임에는 아버지가 바빠서 오지 못했지만 마지막 졸업 게임에는 아버지께서 참석해 달라고 미리부터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제일 잘 보이는 제일 좋은 좌석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아들은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아버지의 예약된 좌석에만 눈이 갑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고 양 팀이 입장을 하는데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크게 울리자 아버지께서 자기 스탭들과 막 들어오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응원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저절로 났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뛰면서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쌓은 기록을 이미 갱신하고도 남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아버지께 손을 흔들려고 보니 아버지는 언제 퇴장하셨는지 죄석은 비어있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은 집을 나갔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무척 사랑하였지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회사일을 우선순위로 살앗던 아버지, 회사의 번영이 모든것을 다 해결해 줄지 알고 회사를 위하여 헌신하였건만 그 결과는 실로 비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둘째, 하나님의 사랑처럼 아버지의 권위도 주변사람들이 인정할 때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남편 이삭을 무시합니다. 이삭에게 어떠한 약점이 있었는지 아니면 리브가의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녀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채 남편의 사랑하는 맏아들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을 속일 계획을 세웁니다.
가족끼리 이러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니 정말 기가막힐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이런 모든 음모를 다 알고서도 말한마디 못합니다. 어떤 분은 이삭이 놀란 것은 하나님께서 큰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신 약속을 망각했었다가 생각해 내고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비약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 말씀은 리브가가 들은 것이지 이삭이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그 말을 했을 지라도 이삭이 믿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삭이 놀란것은 자신이 속임을 당했다는,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인 리브가가 아버지 이삭의 권위를 무시하자 자녀들도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아버지 역할을 전혀 할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권세도 주변에서 인정해 주어야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세가 무너지자, 자녀들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쟁을 아무도 말릴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처럼 돌일킬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셋째, 이바지의 권위를 무시한 자녀는 더 큰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부모님으로 부터 편애를 배웠던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요셉에게는 비단옷을 입히고 양치는 형제들이 양을 잘 치고있나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형제들의 감독이 되게 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무시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을 속였듯이 유다는 야곱을 속입니다.
그것도 똑같이 염소새끼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맏아들 루우벤으로 부터 아버지로서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첩과 동침을 하는 치욕, 야곱은 죽는 그 순간까지 루우벤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보다는 다른사람(뱀)의 말을 중시여기던 하와나 아내의 과오를 덮어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변명하고 덮어씌운 아담으로 부터 아버지의 권위는 약탈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멀어 자녀의 잘못된 행위에 아무런 훈계도 하지 못한채 아내의 눈치를 보며 축복을 해야했던 이삭, 혹시 오늘 우리 가정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아버지들이여 영적으로 깨어 영적인 가장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Aug 13

성령이 임하시면(행1:6-8)

Posted by on Aug 13 2011

사도행전 1:6-8절
성령이 임하시면
                                                                                                                                                                                                                         June 05/2011

1: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하셨듯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바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기에 자기들이 원하는 질문을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 때에 주님께서 로마를 정복하고 나라를 회복하시렵니까? 그러면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하십니다.

오늘 이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3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물론 나의 종말의 때도 준비해야 합니다.
이제 부할 승천하신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곧 오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히 그 날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회복시킬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 땅을 통치할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두가지로 답변을 하십니다.
첫째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에 대하여서는 아버지의 권한이니, 즉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주관대로 하시니 우리에게는 알 권리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더욱 확실히 알수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안다 라고 할 때에는 Ginosko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신다 라고 할 때에는 Oida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라는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것이 복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알고 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생번에 오시지 않을 것 같으면 주님 오시는 일에는 관심도 갖지 않고 그저 자기 삶에 바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알게 되면 삶을 미리부터 포기해 버리고, 아무런 계획이나 노력도 없이 그저 마구잡이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언지 오실려는지 그리고 자신의 종말이 언제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종말이 언제쯤 되겠다는 것은 대충은 알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쇠약해지고 몹쓸 병이 들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종말을 위해서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종말을 맞이하는 가에 보면 일반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일이나 연구에 몰두합니다. Southern Semoinary 의 Wayne Oats 교수님은 92세가 될때까지도 계속 학교에 나오셨으며, 임종 한달 전 까지 연구실에 나오셔서 책을 집필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CCC 창시자 Bill Bright 목사님은 암 선고를 받고나서 죽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을 즉각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몸이 더 빨리 쇠약해져서 할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항암치료도 받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겨우 마치고 나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소위 말하면 Bukit List 를 작성합니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 그 일들을 부지런히 실향하게 됩니다.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에 여행도 가고, 자기가 잘못한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합니다. 사보고 싶었던 것을 사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꼭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더이상 미루지 않고 당장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차분히 죽음을 맞게 됩니다.

여하튼 이렇게 자신의 종말이 오고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정리할수 있지만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의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 주권에 속한 예수님의 때를 자기들마음대로 해석하여 “이 때다 저 때다”하며 많은 사람을 들을 미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미리 아시고 다음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4-5) 그리고 계속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26)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미리 예고하고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적같이 갑자기 오실 것이며, 노아의 홍수와 산모가 해산하는 것처럼 갑자기 닥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오심이 그만큼 가까워진 것에 대한 징조입니다. 아마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에 속아 세상이 주님 오실 날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 갈때 갑자기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세상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고 연세가 많거나 작거나 할것없이 자신들의 종말을 준비하며 더 늦기전에 열심히 전도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천들처럼 주님을 기다리되 깨어 근신하며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여여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대답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에 대한 시기에 대하여 전전긍긍하지 말고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많은 경우 주님을 사랑하며 성령충만함보다 사역을 앞세웁니다. 예수는 믿지만 아직 성령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역만 앞세울때 사역에 능률도 오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고갈되어 큰 시험에 빠지거나 다른사람들에게 상처를 줄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을 입을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입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흔히 방언이 터지고 행동이 좀 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도행전 8:15-17절에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9:5-6절에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하였듯이 예수를 믿는것과 성령을 받는것이 마치 두단계로 되는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그 순간부터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함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점차 내 마음을 지배하게되어 내 마음이 Full of Spirit 이 되어 온전히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입으면 방언이 터지기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이란 예수님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 즉 지금까지는 주로 머리로 믿었던 것을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때에는 할수 없었던 일, 하지 않았던 일들, 특히 주님께 그리고 섬기는 교회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등을 성령충만함을 입었을 때에는 할수있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두려워 할수없었던 일들도 성령충만함을 입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과 동시에 성령충만함을 입게되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오래동안 걸려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령충만함을 입을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였을때 열흘째 되던날 모두 성령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입으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며” 했는데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주님의 권능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귀신들이 스스로 물러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병든자위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때 병든자가 고침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는 믿는자들에게 주님께서 나와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고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굳게 서서 평소에는 엄두도 못내던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충만함을 입으면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인란 헬라어 단어는 순교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증인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증인이 아니라 순교를 각오한 증인이라는 정말 차원이 다른 의미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함을 입어 성령께사 시키시는대로 행할때 기꺼이 순교도 사능한 것입니다. 성령 충먼함이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위한 열정이 가득하게 되겠습니까?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떻게 모둔 것을 내려놓고 이프리카 오지에 들어가겠으며 남미 정글에서 평생을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복음을 증거할수 있겠습니까? 일시적인 감정으로 그렇게했다면 얼마 가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말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생명의 위협을 받게되면 곧 철수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이 없다면 어떻게 공개처형을 당하는 북한에서도 신앙생활을 할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떻게 두려움을 잊을수 있겠으며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떻게 죽음을 당할줄 알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의 11제자들 모두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증거해야 합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가감없이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수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댜신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 죄가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 약속하신대로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주님과함께 저 천국에서 영원히 같이 살게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저 천국에 계시는데 이제 곧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셔서 악인과 의인을 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목숨을 걸고 증거하는 것이 증인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고 권능을 받으면 스스로 이러한 증인의 삶을 살게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또한 그리스도의 증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신 것처럼 입술로가 아니라 그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달과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증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주님은 그 순서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나의 가족, 친척,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예루살렘, 나의 가족전도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모님이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 그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신 분이다” 그렇습니다. 자기와 늘 같이 먹고 마시고 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칫 가족들로부터 “너나 잘 하세요” 라며 외식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기 가장 쉬울 것입니다.

그 다음로는 자기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전도를 해야 하는데, 나와 이해관계가 있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참아야하고, 희생을 해야하고 양보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땅끝은 어디입니까? 어쩌면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선교하는 것에 비유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북한이 우리의 땅끝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예루살렘은 어떻습니까? 사마리와는 아떤 관계입니까? 여러분들의 땅끝은 어디입니까? 만일 북한이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북한의 문이 속히 열리도록 기도하십 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곧 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그리고 북한 문도 곧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아직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 성령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성령 충만함을 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열심히 기도해 보십시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여명의 성도들이 기도하던 모습을 생각하며 그 분들처럼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권능을 받고 주님의 참된 증인으로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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