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01
단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스가랴 1:7-21절)
Feb 27/2016
엊그제는 동부에 있는 외국 목사님이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기도원을 하나 소개시켜 달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래도 한국사람들이 기도를 제일 많이 하지않느냐, 한국 교회가 가장 영성이 가장 깊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캘리포니아는 너무 멀기 때문에 혹시 뉴욕쪽이든 어디든 하나 소개시켜 달라 하여서 Google에 들어가서 한국 기도원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실망스럽더라고요.
대부분의 기도원이 내가 생각하던 기도원이 아니었습니다. 한 때에는 아주 유명했던 수양관, 수 많은 교회들이 와서 수련회, 금식기도, 영성집회를 하던 그 곳이, 이제는 화려한 리조토로 거듭났지만, 영적으로는 황폐한 예루살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도원들이 이제는, 와서 먹고 쉬고 놀고가는 휴양소, 소위 말하는 한국의 주말 펜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한 기도원은 여자분이 받는데, 기도원 원장 목사님이시냐고 물었더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하면서, 방 2칸에 화장실 딸린 기도원 방이 하룻밤에 250불씩이고, 밥은 사먹고 잠만 자려면 아주 쪼그만 방이 있는데, 목사님이시니까 하루 $60만 내십시요” 하더라고요. “매일 예배는 있습니까?” 하였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하면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는데, 이 분이 기도원을 인수하여 리모델 하여 이렇게 숙박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경치좋고 공기 좋아서 뉴욕에서도 오고 필라델피아에서 사람들이 자주 온다고 꼭 놀러오라는 것입니다.
한 때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웠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사는 물론 아주사 부흥운동처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1907년 평양 대부흥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대한민국이, 불과 2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순으로 첫번째에서 17번째가 우리 대한민국 땅에 있었는데, 이제 그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계적인 교회 성장학자 Peter Wagner 목사가 명성교회 새벽예배에 설교에 초총을 받아서 갔는데, 새벽 3시 예배에 누가올까 하였더니 예배당이 미어터졌다며, 우리나라를 새벽의 나라 조선이라 소개한 것이 불과 2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교회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는 첫 계명부터 무시하는 WCC에 가입할수 있습니까?
오늘 한국교회들이나 선교단체에서 아프리카등 미개한 나라에 선교사를 수천명씩 파견한다고 자부하는데, 보고하는 것처럼 정말 아름다운 선교들을 하고 계십니까? 정말 원주민들이 복음에 굶주려 그렇게 그 먼길을 걸어서 몰려옵니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왕복 차비에 일당에 구호품 받으려고 오는 것은 아닐까요?
십여년 전에 중국 선교에 가자고 하여 따라갔더니, 게중에는 11시간 기차를 타고 왔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감동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왕복 차비에 호텔에 재워주면서 호텔 음식 먹여주고 마지막 날은 관광까지 시켜 주는데 그보다 더 좋은 관광 여행이 어디 있습니까? 전기도 안들어 오는 깡촌에서 서울 나들이를 온 셈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도전받은 것은, 게중에는 우리들보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보다 영성이 더욱 깊은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지,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찬양하며 열심히 예수믿는 그 사람들로부터 은혜와 도전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때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리 불리우던 우리 대한민국이 어찌 이렇게 쉽게 식어져 버렸는지…….
1885년 인천 항구를 통하여 조선 땅에 처음오셨던 미국 북장로교 출신의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냄비팸비라고 하였던데, Nambi Pambi 이게 무슨소리인가 하였더니 냄비처럼 부르르 끓다가 만다는 뜻이었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냄비근성이 있다고 서양에 소개하신 분이 바로 이분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냄비가 되었든 돌 솥이 되었든 식었으면 다시 달구면 되겠지요.
오늘 본문의 스가랴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오늘 우리나라처럼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때에는 전 세계의 신앙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세계 각지에서 조공을 바치러 줄을 서서 왔고, 화려한 성전에 감탄했던 신앙의 본산지가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자 하나님의 영광과 보호하심이 그들을 떠났고, 마침내는 야만인 바벨론에게 무참히 짓밣히고 성전이 불탔고 초토화 되어버렸습니다. 그 성전이 불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사람들의 칼날에 죽었는지, 들짐승들이 골목마다 수북수복 쌓여있는 시체들을 뜯어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뼈들이 비바람에 흙먼지에 씻기며 굴러다닌지 어언 50여년이 흘렀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그곳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선 곳곳에 굴러다니는 해골들을 치우고, 폐허된 도시를 다시 건설하고자 성전터를 다시 쌓고, 그 위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성전을 짓다가, 성전지을 재료도 떨어지고 자기들 먹을 식량도 떨어지자 곧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는데 전념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해 버립니까? 이들도 냄비근성 때문입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건설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 전세대 사람들, 자기 부모님 세대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 70년 후에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겠다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그 약속을 굳게 믿고 간절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들 부모님들 중에는 비록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오 하나님! 우리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하고 위선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라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대사람들이 다 죽은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 자손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계 최 강국이요 세계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에 살면서 등다숩고 배부르니까, 그리고 예배드릴 성전도 없으니까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페르시아라는 이 이방땅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러한 사명을 깨우치지도 못하였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이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깨우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을 통하여 성전 지을 재료도 공급해 주셨고, 성전 기물도 다 돌려 받았지만 좀 힘드니까 당장 그만둬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짓다 놓아둔채 15년이 지나갔지만, 그간 판판하게 잘 다져놓았던 성전터가 페이고 쌓아놓은 주춧돌도 빠져나갔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빨리 완공하여야 하는데 라는 마음의 부담을 가진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내가 희생하며 힘들게 얻은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에게 끌려다니는 신앙은 쉽게 타협하고 포기하거나 변질될 수 있습니다. 모태신앙 자랑할 것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 쉽게 무너질수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아들보다, 안믿는가정에서 태어나 혼나고 맞으면서도 주일헉교 열심히 다닌 사람이 믿음이 더 좋더라고요. 이러한 분들은 위기가 닥쳐도 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일을 하시더라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타락하고 무지한 것 같지만 우리보다 낫은 것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겁없이 선포하는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 오는데도, 아니 막강한 병사들을 모아서 성을 에워쌓고 있는데도 성안에서는 친 이집트 파와 친 바벨론파가 피를 튀기며 논쟁만 하고 있었습니다. 친 이집트파가 득세하면서, 이집트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이것을 안믿는 놈들은 바벨론과 내통한 놈들이다 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면 종북으로 몰리기 쉬운 오늘날 우리상황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비리와 부정을 보고서 아무도 쉽사리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스라엘에는 이사야같은, 한번만 그런 소리 하면 목을 치겠다는 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왕에게 경고하다 처형당한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왕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도, “지금은 바벨론에 투항하십시요, 그러면 저가 왕의 목숨도 살려줄 것이요 성전도 불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하나님깨서 우리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라고 간청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우물속에 쳐 넣어진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묶여서 포로로 끌려가는데, 그렇게 정처없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아, 선지자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70년 후에는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로로 잡혀가든지 감옥을 가든지 아니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러 간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망이 없이 가는 것과, 더 낫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가는 것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주님을 위하여 희생을 합니까? 왜 무엇 때문에 순교를 합니까? 더 좋은 나라를 바라보며 순교하는 것 아닙니까? 고통중에 죽어가면서도 “우리 잠시후에 천국에서 만나요” 미소지으며 주님 앞에 가는 그 모습,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없이 어떻게 가능할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설의 손 뿐만이 아니라 기도의 손도 놓고 있을 때에 스가랴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때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임하게 됩니다.
스가랴는 원래 제사장 베레갸의 아들입니다. 스가랴가 아직 어렸을 때에 자기 아버지 베레갸는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 등에 업혀 왔는지 걸어 왔는지 그것은 알수 없지만, 스가랴는 어려서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저희가 동부에서 여기 켈리포니아로 올때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 때문에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특히 우리 아들 같은 경우는 난지 두달부터 한 두살 많았던 아이들 열댓명과 10여년을 같이 커온 교인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서로 엄청나게 친하였었는데, 그 친구들을 다 떼어놓고 오면서 아픔이 많았었지요.
스가랴 역시도 페르시야에 자기 친한 친구들 다 떼어놓고 오면서 아픔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지, 자기가 좋아서 온 것이 아니었거든요. 아마도 왜 예루살렘으로 역 이민와야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놀 친구도 장소도 마땅하지 않아 불만도 많았을 텐데, 설상 가상으로 예루살렘으로 이민온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 베레갸는 죽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스가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기 집안을 대표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집안을 대표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어린 나이였지만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이미 하나님의 뜻과 자기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친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스가랴는 금수저를 물고 나온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 아니 그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는 일찍부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자기보다 나이먹은 제사장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학개와 그에게만 환상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먹고살기에 바쁜 때에, 그는 그만큼 신실하게 기도하였었다 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어쩌면 기도하지 않던 스가랴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독제로 인하여 공포로 떨 때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마다 교회마루바닥 두드리며 “서울로 유학간 우리아들 안 잡혀가게 해 주옵소서, 우리남편 밥줄 안끊어지게 해 주옵소서” 라며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그 발걸음들이 까페로 해외 관광으로 이동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 종소리로 4시 반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소음공해라고 종탑 끌어내린지 오래입니다.
북한이 원자탄을 넘어 수소탄을 만들었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이제는 전 세계 어느곳이든 타격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대륙간 탄도탄 실험이었다며 갑론을박만 하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는 목사님은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군이 압록강 주변에 집결하여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는 신문을 보여주자, “이제 김정은이 종말이 얼마 안남았네” 하며 통쾌하게 웃으시는 목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중국이 왜 압록강 주변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것입니까? 김정은 잡으려고 그런 것입니까? 김정은 잡으려면 가만이 가서 잡지 왜 누구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를 보라고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하자 “그런데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라며 불쾌하게 생각하지 국가에 위기가 닥쳤으니 기도하자고 않하십니다. 특히 지금은 사순절 고난주간인데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목숨걸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목숨걸고 기도합니까? 하루에 겨우 5시간 작정기도하면서 비실비실 하고 있는 것이지, 저도 목숨 내놓고 죽자사자 매달리지 못합니다. 하기야 어떤 목사님을 보니까, 사모님이 암 말기인데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겠지요” 라고 하실뿐 목숨걸고 기도하지 못하더라고요.
이처럼 요즘 목숨걸고 기도하기 참 힘드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목숨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싫더라도 힘들더라도 졸립고 피곤하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변에서 눈총을 주어도 해야 합니다.
사가랴가 신실하게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이어서 음성이 들립니다. 8절에,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11절에,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합니다. 예루살렘 온 지경을 다 돌아 보았는데, all the earth is peaceful and quiet,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더이다 라고 합니다.
이 환상들은 스가랴의 극가와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평온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평안하게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Quiet, 조용하다 라고 하였는데, 오랜만에 제 시골 고향에 갔더니 온 동네가 정말 쥐죽은 듯 조용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우리 동네에도 쥐가 하도 많아서 낮에는 헛간에서 짹짹소리 밤에는 집누리 속에서 짹짹소리가 낫는데, 사람들이 떠나니까 쥐들도 먹을것 없어 떠난것 같아요.
옛날에는 동네 가운데에 아이들이 꽉 차서, 구슬치기, 재기차기, 잣치기, 팽이돌리기 등등하며, 몰려다니고 소리지르고 온통 아수라장이었었는데, 그 많았던 사람소리 발자국 소리는 다 어디가고 풀만 수북히 자라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물길어 가고, 빨래 뚜드리는 소리, 애들 목욕시키면서 혼내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소리가 희미하나마 들릴만도 한데……
지금 예루살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않고, 있어도 들에나가 일하느라 사람들이 없습니다. 성전이 속히 완공되고,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소와 양을 꿀고 줄줄이 섰어야 하는데, 짓다만 그대로 흉하게 서 있을 뿐 조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이 쳐들어 오지도 않습니다. 와서 쳐부수고, 죽이고, 빼앗아 갈것이 있어야 쳐들어 오는데, 와 보았자 빼앗아 갈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적막합니다.
그러면서 12절에,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하였는데, 이것은 스가랴가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스가랴는 극가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14-15절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합니다.
이것, 참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악한 길로 가자 바벨론을 통하여 쳤습니다. 즉 바밸론 왕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칠 권한을 줄 터이니 가서 좀 쳐서 정신좀 차리게 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아주 초토화를 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아들이 말을 안들으니까 이웃집 사람에게 우리 아들 부모님 말씀 잘 들으리고 혼좀 내 주십시요 라고 부탁하였더니, 알았다고 하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자기 아들 다리를 작신 분지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옆집사람에게 화가나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와서가 아니라 바벨론이 잔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다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환난받는 사람들, 고난받는 사람들, 어려움 겪는 사람들 구박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사람이 비록 잘못을 저지르고 죄의 댓가를 치루느라 고통중에 있을 지라도, 꼴 좋다 내가 그럴줄 알았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남을 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16절에,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셨습니다.
스가랴는 환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그발강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특히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던 에스겔에 나타났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황폐해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온 것입니다. 성전이 화려했을 때에는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왜 폐허가 되어 해골만 나뒹구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까? 한 사람, 스가랴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 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라라”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마음으로 돌아 오십니다.
스가려는 환상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건축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먹줄을 튕기고 대패질을 하고 돌을 다듬는 소리가 들립니다. 도로가 여기 저기 뚫리고 건물들이 올라가며 집들이 지어지는등 예루살렘 성이 엄청나게 크게 번성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앞에 보이는 현실은 텅빈 도시, 사람이 살지 못할정도로 페허가 된 Ghost Town, 괴물도시, 페허 뿐이지만, 스가랴는 환상속에서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 시내를 다니며, 이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교통이 얼마나 혼잡하고 소음이 심한지 정신이 없을 정도의 도시로 크게 회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히부리서 11:1절의 “보이지 않는 실상을 미리 볼수있는 믿음의 능력” 인 것입니다.
환상에서 깨어난 스가랴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환상을 고합니다. 사람들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이 다시 회복되고 빼앗겼던 명성을 다시찾게되는 소망을 다시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중단되었던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대로 도시가 형성되어 갑니다.
이제 우리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스가랴 당시의 예루살렘은 그냥 평지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 살지 않는 울퉁불퉁한 산지도 아닙니다. 여기저기 해골이 굴러다니고, 타다만 나무와 돌맹이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낮에도 섬찟하여 함부로 다닐수 없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밤이되면 여우와 늑대등 짐승들이 짖어대는 끔찍한 폐허입니다.
하지만 한사람의 간절한 기도, 한 사람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예루살렘은 재건돠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가랴 한사람의 기도로.
이처럼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한분한분이 소중합니다. 여러분 한분이 여러분 가정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때 여러분들의 가정이 다시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분한분이 베이지역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시면 이 베이지역이 횃불처럼 타오르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남북이 총칼을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서울사람 평양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예수님을 찬양할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였던 종들이 풀려나오듯이, 죄악의 쇠사슬에 묶인 우리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죄와 수치와 허물의 쇠사슬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흩어졌던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듯이 세상을 향하여 나갔던 발걸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골짜기 마다 예수의 노래가 메아리치며 가정마다에는 예수님 이야기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흩어졌던 민심이 하나로 모이고, 한반도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동방의 큰 횃불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