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6
너희는 이것을 잘 듣고 성심껏 행하라(요엘 1:1-4절)
January 25/2015
하나님께서 2015년에는 우리 예수소망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실려는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위하여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어떻게 해야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겠습니까? 교회 성장을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일임에도 하지 않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혹은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인데도 계속해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9:37-38절 말씀,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붙잡고 “주여 우리 교회도 많은 추수를 할수 있도록 추수꾼들을 보내 주옵소서”
그러자 마음속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므로 전 교인이 기도에 힘써, 뜨거운 선령님을 체험하도록 하게하라” 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주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가 생각났고, 그 분들은 모두 불같은 성령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요엘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라고 베드로 사도께서는 선포하셨음이 생각나서, “우리 교회에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 말세에 회개가 사라지고 있는데, 진정으로 회개운동이 우리 교회에서부터 일어나게 하옵소서. 날로 세속화되고 부패해져가며 짙은 안개속에 묻혀가는 교회들에게 소망의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요엘서를 시작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수 믿는자면 누구나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불같은 성령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오순절날 불같은 성령이 임하셨던 마가의 다락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같은 성령을 체험하고, 예루살렘 시내로 뛰쳐나가 전도하였던 제자들처럼 산호세 시내로 나가 전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불같은 성령을 받고 길거리에 나가서 미친사람들처럼 전도하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800여년 전에 요엘 선자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의 역사가 우선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고, 그후로 지금까지 전 세계 각국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순절 마가 다락방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 한분 한분이 불같은 성령을 체험하여, 산호세 시내에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시고 기도하면 병도 낫고 때로는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 거리에서 일어났던 기적처럼 멕시칸을 붙잡고 한국말로 전도해도 멕시칸이 알아듣고, Chinese에게 한국말로 전도해도 중국사람이 다 알아듣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선 오늘본문 1절에,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엘은 우선 자신의 신분을 브두엘의 아들이라고 밝힙니다.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이라면 브두엘이 누군지 너나 나 할것없이 모두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요엘은 자신이 브두엘의 아들이라 하면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요, 그의 신분은 확실한 사람이요, 그러므로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도 진실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는 요엘 선지자의 멧세지대로 역사가 진행되었음을 세계사를 통하여 보고있습니다. 그리고 요엘 선지자께서 경고하시던 당시 유다나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매우 비숫하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선, 요엘은 그 이름부터가 특이한데, 히브리어로 요엘이란 “요, 여호와 가 엘, 하나님이시다, 즉 여호와가 하나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인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름을 요엘,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 이라고 하였을까요?
요엘의 아버지는 부드엘 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브두엘은 “하나님께서 설득하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요엘의 아버지 부드엘이 요엘을 낳을 즈음에 유다는 당시 바알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었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며느리로 시집온 북왕국 공주가 바알 우상을 극진히 숭배하였기 때문에, 유다의 왕실에서부터 바알 우상숭배가 성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왕국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반도 상황에 견준다면, 남한과 북한이 불천지 원수처럼 싸우다가, 이제 우리 그만 싸우자, 동족끼리 싸워서 되겠느냐? 하면서 김정은이 딸을 대한민국 대통령의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딸이 남한으로 시집을 오면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져와서 청와대에서부터 김일성을 숭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한의 교회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김일성이도 섬기게 되었더라 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요엘의 아버지는 “여호와 만이 하나님이시다. 김일성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을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보여준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아들을 부를 때마다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엘아” 라고 그 아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여호와 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아닙니까? 요엘의 아버지는 이렇게 할 목적으로 자기 아들의 이름을 “여호와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지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엘서는 두가지 매우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 역할입니다. 흔히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구약시대에도 역사하셨습니다. 다만 오늘날처럼 만민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시지는 않으시고, 구약시대에도 성령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으로 역사하셔서 병도 고치시고 죽은자도 살리셨습니다.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 집에가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 떡, 이제 이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먹고 더이상 먹을 것이 없으니까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먹으려 하는데, 엘리야가 “그것 내 한데 먼저 가져와”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밀가루는 퍼내도 퍼내도 그대로 있고 기름은 따라 써도 써도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아닙니까? 엘리사가 수넴여자의 죽은 외아들을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여 살린 것, 누가 살리셨습니까?
이 두 선지자가 이루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죽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선지자들이 하신 기적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이 땅에 오시지는 않으셨지만, 천상에서 보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이루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성령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아들이 계신지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요엘은 그후 800여년 후에 일어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일어난 불같은 성령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불같은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성령님에 취하여 예루살렘 시내로 뛰쳐나가 두려움이나 머뭇거림이 없이 열정적으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저들이 대낮부터 술이나 퍼먹고 술주정한다” 라고 비방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 사도는 성령에 감동되어,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누가 대낮부터 한가하게 술먹고 술주정을 하겠느냐? 너희들이 성경을 잘 알지 않는냐? 요엘서를 보아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라는 에언의 말씀이 이루어 진 것이다. 라고 외칩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에도 일어 났었고, 말세에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세게, 사람들이 부인하거나 조롱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일어날 것이라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감림역사” 이후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자에게는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요엘서는 구약시대의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신약시대 그리고 오늘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요엘서에 처음으로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 이라는 개념이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날, 곧 심판의 날” 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은 기쁘고 즐거운 날이 아니라 환난의 날이다 라고 경고하십니다.
사실은 이때부터 세상의 종말이 오고있다 라는 종말론 사상이 본격화 됩니다. 이 때부터 선지자들은, 이 세상의 종말은 정말 오는 것인가? 온다면 언제 쯤 올것인가를 놓고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호세아는 북왕국의 심판을 예언하였는데 그의 예언대로 북왕국 사마리아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이 유다의 심판과 종말을 예언하였는데, 그들의 예언대로 유다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가슴을 찢고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 심판의 날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여도 남는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엘 2:32 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 요엘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어오지 않을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적인 환난을 당하게 되고,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이시라, 하나님께서 피할자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당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은자들을 통하여 나라를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엘서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신지라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는 내 죄로 망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하여서리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2절에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선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제부터 하는 경고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냥 듣지말고 모든 일을 중단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모든 신경을 다 집중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아마도 서너살 때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기 딴에는 무엇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랬어? 응 아빠가 다 듣고있어, 말해봐” 라면서 제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텔레비젼을 보고 있으니까 저한테 달려오더니 제 얼굴을 자기 앞으로 확돌려 놓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더라고요. 서너살 먹은아이도 자기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 그렇게 화를 내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위 깊게 열심히 잘 들어야 합니다. 갓난아이들을 보십시요. 사람은 태어나자 마자 우선 듣고 보게 됩니다. 보고 듣는 훈련을 한 다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에도 내 귀에 들리지 않는 단어는 정확히 발음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선 잘 들어야지 말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으라는 것은, 인간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아무 대꾸도 하지않고 그저 듣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말씀에 순종하라 고 하십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우리 인간은 듣기 보다는 말 하기를, 아니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저 한테 해당되는 말인데요, 그러므로 두 귀가 한 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하튼,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께 몹시 거슬렸던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들어라, 이제는 입을 막고 내 말을 들어라, 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내 말을 들어라 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을 할 때에는 자신이 생각한 것 그대로 하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들을 때에는 여러 다른 소리들, 소위 말하는 잡음과 함께 들리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귀에 들리는 잡음도 있지만, 선입견, 너무 바쁜마음, 의심, 다른생각, 미워하는 생각, 음란한 생각등 나의 내면의 잡음도 함께 들립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귀에 직접 들리는 소음보다 나의 내면의 잡음이 더욱 심각합니다.
기도 할 때에도 크게 소리쳐 기도하는 것이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보다 훨신 쉽습니다. 제가 가끔씩 소리쳐 기도하는 것은, 물론 성령님이 그러한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할때가 많지만, 어떤 때에는 집중이 안되기 때문에 집중하려고 그렇게도 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왜 하나님께 그렇게 쏘아부치기만 하지 듣지 않느냐고. 당신 아들이 와서 자기 할 말만 큰 소리로 쏘아부치고, 그래서 당신도 아들에게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당신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휙 가버리면 당신 기분은 좋으냐고 하더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듣는 것이 그만큼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들어라” 는 강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늙은 자부터 시작하여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책망입니다. 그러면서 너희 나이먹은 자들아, 너희들은 인생 경험이 있지 않느냐? 한번 잘 생각해 보아라,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들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느냐? 네 할아버지나 아버지로 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원 세상에, 어떻게 팟종이, 메뚜기, 늣, 황중 이렇게 차례대로 네번씩이나 걸쳐 농사지은 것을 싹쓸어 먹어버렸는냐? 어떻게 들에 나갈 필요도 없이 정말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남김지 않고 싹쓸어 먹을수가 있느냐? 다른 해에도 병충해가 있었지만, 금년처럼 추수할 것이 전혀없이 이렇게 싹쓸어 먹어버린 적이 있었느냐?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이것이 정말 우연인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아라 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팟종이가 먹을 때에 아이고 하나님 죄송합니다 라고 회개하였어야 했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인데, 공부를 많이하고 지식이 많은 자가 현명한 자가 아니라, 어떤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쳤을때에 얼른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조그만 일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하심을 깨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그런 일 수도없이 당한다고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팟종이가 먹었을때 회개하는 것을 놓쳤다면 메뚜기가 먹을 때에 회개하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가 다 먹어 치울 때에도, “이 고약한 놈의 메뚜기가 어디서 왔지? 후이 후이” 하면서 메뚜기만 쫓고있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늣을 보냅니다. 요놈의 늣은 메뚜기가 먹고 남긴것을 다 쓸어 먹어버립니다. 그때라도 회개를 하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황충이 이제는 그 줄기까지 다 먹어 치워버렸습니다. 이제는 후회해도 필요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인생 겨울에 굶어야 합니다.
야곱은 그가 외가집으로 도망치면서 노중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자기가 베고자던 돌맹이를 놓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 여기에 하나님의 집, 교회를 짓겠습니다” 라고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도 맹세를 안지키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삼촌 가족을 통하여 외가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그래도 베델로 가지않자, 이번에는 얍복강가에서 그의 엉덩이 뼈를 분지러서 회개를 시키십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벧엘이 아니라 세겜으로 가서, 거기다가 땅을 사고 우물을 피고 양 우리를 짓고 평생 살려고 거기에세 예베를 드리면서 “엘엘로히 이스라엘, 하나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 합니다. 그래도 벧엘로 가지 않자 이번에는 자기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합니다. 그래도 참고 살려고 하였더니, 자기 아들들이 세겜 추장식구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때서야 검이난 야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더니, 벧엘로 가라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겜 가람들이 보복해오기 전에, 급히 짐승 몇마리 몰고서 절뚝절뚝 벧엘로 야밤도주 하게 됩니다.
진즉에 벧엘로 왔으면, 다리병신도 안되었을 것이고, 그 재산으로 하나님의 집, 교회도 잘 짓고 존경받으며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병을 얻고, 재산을 다 잃고 나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오느냐 는 것입니다.
민수기 22: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격해 올때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디안 왕이, 이스라엘 병사들이 자기 영토를 향하여 진격해 올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겁에 질린채 망대에 올라가 이스라엘 병사들을 보게 됩니다. 와, 그런데 그렇게 많은 병사들은 처음보는 것입니다. 그는 기가 완전이 죽었습니다. 저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와 다 쳐죽일텐데…… 생각만 해도 두려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유명한 지략가이자 하나님을 믿는 발람이라는 사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가 생각할때 발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성에 못 쳐들어 올줄 믿고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미디안 왕 발락은 높은 직책과 많은 은금을 하사하겠노라며 발람에게 첫 사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보내지 않으신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미디안 왕은 전보다 더 높은 직책과 더 많은 은금을 제시하면서 이번에는 꼭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못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미디안 왕은 세번째 사신을 보냅니다. 이 때 발람의 마음은 설렙니다, “하나님, 가고 싶습니다. 그 많은 은금을 치지하고 싶습니다. 높은 직책이 탐이 납니다.” 라고 가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서 내가 네게 주는 말만 선포하라 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발람은 나귀를 타고서 미디안 왕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나귀가 좁은 길목에서 앞으로 가지않고 옆 담벼락으로 피하여 담 벼락에 자기 몸을 비빕니다. 그러자 발람의 발이 담벼락에 비벼져 피가 납니다. 화가난 발람이 나귀에서 내려, “이 놈의 나귀가 왜 앞으로 가지 않고 담벼락에 비며 내 발이 다 까지게 만들오?” 며 나귀를 때립니다.
그러자 민수기 22:28-31절에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라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나귀가 말을 하도록 하여 발람에게 경고를 줍니다. 그러면 발람은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욕심대로 갔다가 미디안이 망할때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됨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는데, 왕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한번 생각해 보아라. 이 사건을 통하여 너희들의 죄악을 까달아라. 그리고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너희들이 패역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을, 너희들의 실패의 역사를 너희 자손에게 알려라. 그리하여 다시는 이러한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너희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라고 가르치고 가르치고 가르쳐라.
이제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여러가지로 경고를 하셨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없는지.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자녀들에게 잘 전하고 가르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