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4

야곱의 서원기도(창세기 28:10-22절)

Posted by on Mar 24 2014 at 11:21 pm

                                                                                                                                                               March 24/2014

얼마 전애는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어느 대학교 벽보에 붙어있던 이 한마디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Touch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다양하게 반응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안녕들 하십니까? 혹 여러분들 중에 안녕하지 못하시고, 위기에 처해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면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슬퍼지는데, 지금 당신만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 것 아닙니다. 아마도 열에 2명 정도는 위기속에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을 것입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고 사귀던 애인이 변심했다고 세성을 등지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와싱턴 주에는 갑자기 토사가 밀려와서 동네가 수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또한 말레이지아 항공기에 탔던 승객들의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많은 비행기 중에 왜 하필 우리 아버지가, 내 아내가 탄 비행기가 실종되어야 합니까? 우리 아들이 내 남편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비극을 맞아야 하는가, Oh God, please tell me why this things be happened? 하며 오열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처럼 사람은 누구나 위기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건강 위기, 부부간의 위기, 신앙의 위기등 여러가지 위기들이 때로는 하나씩 때로는 두세개씩 겹쳐서 닥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왔다고 해서 다 화를 입고 피해를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기로 인해 도리어 더 큰 축복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위기가 닥칠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른 태도를 가지면 위기가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태도를 가지게 되면 위기가 파멸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평소에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살던 사람도 위기를 당하게 되면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고, 그로말미암아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위기로 말미암아 그나마 붙어있던 신앙의 끈마져 놓아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온 가족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리를 질끈 동여매고 돌파구를 찾아내며 마침내는 예수님안에서 승리하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또한 위기를 통하여 가족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고 흩어졌던 가족들이 화해하고 다시 뭉치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동기부여를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생각하지도 못한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정말 혼자서 해결할수 없는 엄청난 위기를 그가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 같이 보면서 은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은 팓죽 한그릇으로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형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팥죽을 얻어 먹었는데, 동생은 형이 자기에게 장자권을 팔아넘긴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 리브가의 코치로 마침내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 형이 받을 장자의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에서로서는 물론 어머니 리브가가 몹씨 미웟겠지만, 어쩌튼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하튼 분노한 에서가 야곱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는데, 이것을 리브가는 들었습니다. 다급했던 리브가는 급히 야곱을 불러,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년동안 외삼촌네 집으로 가 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 이삭을 설득하여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고, 여기 가나안 여자하고 하지말고 거기서 그 동네 여자하고 결혼하도록 종용합니다. 이에 이삭은 아내의 말대로 하고, 축복기도까지 하여 보냅니다.

 

이 상황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을 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아! 나를 사랑한다던 아버지 마져도 동생 편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일 날을 준비하며 날마다 그 날을 벼르고 삽니다.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고 부랴부랴 자기 큰아버지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하지만 그를 떠난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에서가 그렇게 비뚤어진 것은 에서가 자기동생 야곱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이라 고 주장 합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로 이삭은 에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이 편애, 아담의 아내 이브도 그렇게 하여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비극을 초래하였는데 리브가도 그렇게하여 끔찍하고 무서운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부모와 헤어져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가는데 여관은 커녕 아무도 살지않는middle of no where, 노중에서 날이 저물고 말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정말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안에서 어머니 치맛자락 잡고 다니며 살아왔던 야곱이 산길에서 홀로 밤을 맞았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사방은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사자와 곰이 많앗다는데, 여기 저기서 사자, 곰, 여우, 늑대등 사나운 짐승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분노한 형이 따라와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야곱은 정말 초조하고 불안하여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한 짓이 옳은 짓이었는가? 나 하나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이 풍기박살이 났는데, 그렇게까지 하여서 형의 장자권을 빼앗을 필요가 있었었는가?

 

외삼촌 댁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까? 외삼촌은 살아 계실까? 혹시 다른 곳으로 이사가지는 않았는지? 외삼촌은 좋은 사람일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실까?

 

 

야곱은 돌맹이 하나 줏어다가 베고서 길바닥에 누워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집니다. 밤 하늘을 보니 별빛은 쏟아지는데, 처량한 자기 모습에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면서 죄책감에 고민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특이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하였듯이 참으로 신기하고 희한한 모습을 봅니다.

 

 

Midrash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해석에는 이 사다리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기까지 겪어야 할 고난으로 보고있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멈추었던 곳은실제로는 밷엘이 아니라 모리아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렸고, 다윗은 그 떵을 성전부지로 사용하도록 사들였고, 솔로몬은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으며, 그 사다리는 결국 예루살렘 성전과 천국, 즉 하나님과 유대인 간의 다리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하니까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고 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다리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이 사다리를 천국으로 올라가는 Bridge 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예수님이라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죄많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교량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수 있는 곳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는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지만 하늘에서 내려진 이 사닥다리, 예수 그리스도를 타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6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듯이 우리는 오직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같이 미천한 존재를 천국에 들여보내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Lent라하여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기념하는 사순절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기 전 40일동안을 자신들도 그 고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한다는 의미로 모든 쾌락적이 것을 삼가고, 먼 여행을 삼가고 금식하며 경건하게 지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성 금요일까지 무엇인가 주님을 위하여 한가지씩이라도 희생하며 경건하게 지내십시다. 제가 동부에 있을 때에 한 아이는 콜라중독이 되었었는데, 이기간 동안 자기가 콜라를 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40년 이상을 피워온 담배를 이 기간동안 끊겠다고 “목사님, 사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여러분들께서, “하나님! 이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을 늘 기억하며 내가 술, 담배, 도박이나 혹은 나분 말을 허지않겠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내 놓으셨는데, 그것을 생각하며 이까짓 것 하지 못하겠습니까? 꼭 지키겠습니다 ” 라고 약속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꼭 지키시기바랍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하셨는데, 이 사순절 예수고난기간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시어 예수님의 큰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 홀로 남았다고 생각 했는데 내 곁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에 야곱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아이쿠,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계셨구나” 라며 깜작 놀라 일어난 야곱은 자신이 베고 누웠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안전과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당장 눈 앞이 캄캄했던 야곱은 먼 훗날 자기 후손들의 축복까지는 관심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 급했던 야곱은 창세기 28:20~22에 야곱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라고 갈급하고 절실한 서원기도를 합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언제 강도가 나타날지 형이 나타날지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당장 끼니가 없는 갈급함,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야곱은 매우 현실적이고 솔직한 기도를 합니다:

 

우선, 내가 가는 이 길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켜 주옵소서. 그리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며,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가는 이 길이 잘못되면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섬길수 없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실제적인 요구들입니까? 오직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아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실제적이고 천진한 기도를 할수 잇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보면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찬송가 후렴처럼 틀에 밖힌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친 아버지처럼 “아빠”라 부르며 기도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는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 앞에 내가 무슨 체면을 차릴 것이 있습니까? 부끄러울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이단이라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으신 분들은 하나님 어머니라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우리의 관념이 굳어져서 그렇지 아담과 이브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도 되시고 우리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든 어머니든 부르기 쉬운대로, 친근감이 더 가는 대로 부르십시오. 그 분을 온전히 믿으시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지금 형이나 강도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당장 먹을 양식고 마실 물이 궁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난 가운데 만난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무도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먹을 것이 넘쳐납니다. 옛날에는 구경도 하지못한 고기들이 시장에 즐비하고 왠 먹는것 축제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리고 먹는것으로 장난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생일 케잌을 던지고 얼굴에 바르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마음이들어 편하지 않더라고요.

또한 옷들이 얼마나 많은지, 작거나 헤어져 못입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 지났다고 버립니다. 전에는 형이나 언니 옷을 물려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런사람 찾기 힘드는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 옷입는 것 보면 다들 영화배우 뺨치는것 같아요.

그리고 옛날 같으면 두말없이 충분히 걸어갈수 있는 거리도 차가 없으면 못가는 것으로 압니다. 하기야 먼길 다니면 신발값이 기름값보다 더 드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이런 풍요롭고 평안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갈급한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필요한것 다 있고 배부른데 누가 새벽부터 가슴치고 부르짖겠습니까?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누가 요즘세상에 서쪽하늘에 걸려있는 그믐달 바라보며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발 이 종을 살려 주옵소서” 애타게 울부짖을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풍요로운 것이 오히려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 보십시오. 인생의 목표도 없고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돈 필요하면 나가서 일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끓어 엎드려 애타게 기도하는 것 보다 몸으로 때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들을 채워주시도록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궁핍하고 어려울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부요하고 풍요로우면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풍부함은 축복이 될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이 될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고 보호헤 줄 사람도 없는 그때, 하나님의 Visitation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소득의 십의 일을 드리겠노라고, 그러니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달라고 서원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여기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기둥으로 세웠던 돌은 어떤 돌입니까? 인생의 밑바닥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며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고있을때 함께 했던 자신의 아픈 흔적입니다. 그런데 이 아픈 흔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삼겠다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토록 잊지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웠을 때의 기억은 덮고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한국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한국에서 낮은 자리에서 고생하셨다는 분들은 거의 없더라고요. 대부분 보면 정말 대단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왜 이민을 오셔서 이렇게 고생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갈 정도 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아픈 뿌리는 뽑아내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궁핍하고 힘들 때에는 비굴하리만큼 하나님을 찾다가도 좀 풀리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의 아픈 흔적, 자신의 부끄럽고 비참했던 때의 흔적위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겠다고 서원 하였습니다.

우리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돈 모아서 차 바꾸고 집사고 사업확장하는 것이 기본 순서아닙니까? 어렵게 살 때에는 주일 예배는 물론 밤낮으로 부르짖다가도 조금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기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골프치고 여행다니느라 더 바쁜 것 아닙니까? 하지만 야곱은 부할때에 가장 낮은 때에 만난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심겠다고 하나님께 맹세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드리겠나이다” 라고 서약하는데 이것은, 첫째로,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실력이 있으니까, 남들 잠자고 쉴때 더욱 많이 노력하여서,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지혜롭게 하여서 부를 모았습니다 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둘째로,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십일조만을 드리는 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닙니다. 나의 물질은 물론 나의 시간과 재능과 힘과 명예도 하나님 것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드려야 합니다. 선거때가 되면 새벽예배에 안빠지고 다니던 사람이 당선되고 나면 바쁘다는 핑계로 비서시켜서 헌금만 내고 주일예배도 참석하지 않는 의원님들도 많다고 하는데, 당선 되었으면 하나님 덕택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로, “반드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 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조건에 따라 혹은 환경 따라 하기도 합니다. 교회 헌금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십일조를 않겠다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헌금은 지정헌금으로 하여 드리면 됩니다. 십일조는 자신의 명예나 목적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의 생활비로 쓰였습니다.

 

 

혹은 생활비도 모자라는데 무슨 십일조냐? 고, 형편이 조금만 나아지면 드리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라 많이 거둔자는 많이 적게 거둔자는 적은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9:6-7절에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7.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듯이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 투자하는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이 투자하는 자는 많이 거두게 하실 것이요 적게 투자하는 자는 적게 거둘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한 기업가는, 그 분이 신앙이 얼마나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  헌금을 참 많이 합니다. 헌금 많이낼려면 그만한 신앙이 있어야 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서도, 헌금 액수와 신앙이 그대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하튼 그래서 기자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이 자기 아버지의 철학이자 유언인데, 사업을 하려면 하나님과 동업하여 하나님을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부자가 되고 싶으니까, “하나님 내게 돈좀주십시오. 나도 부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내가 더욱 많은 십일조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돈 잘벌게 해달라는 기도인데, 참 지혜있는 기도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 헌금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와 헌금을 드릴때마다 “하나님, 내 자신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드립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드리십시오.

 

 

잠시 눈을 감고 같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야곱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내 아내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내가 지금 형편이 어렵다고 함부로 서원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겸손하게 하옵소서. 가난할 때나 부자일때나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날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전 벧엘이 되게 하시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망각하는 죄를 짓지않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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