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8

가서 씻으라(요한복음 9장 1~7절)

Posted by on Mar 18 2014 at 09:48 am

March 9/2014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문둥병자나 앉증뱅이와 소경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저주의 쇠사슬을 끊어주시기만 바랐지 치료는 포기하고,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비참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는 전염성이 컸기 때문에 곧바로 격리 수용소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굴이나 골짜기에 격리 수용되면서 가족이나 친척들이 굴 입구에 음식을 놓아두고 가거나 두레박을 통하여 내려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저주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가질수 없는 운명을 탄식하며 절망속에 삶을 마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을 낳으면“그 집은 저주받은 집이구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이 볼세라 집 안에 숨겨놓고 키웠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키울만한 경제적인 여건이 안되면 나가서 구걸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걸을 할 때에는 그 지역 관가의 허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소경이라고 아무나 나가서 구걸할수 있는 것이아니라 관가에 등록된 소경만 구걸을 할수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서에는 그 당시 소경거지들이 입는 옷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구걸 허가증과 같은 것으로, 관가에서 주는 그 옷을 입어야지 공식적으로 구걸을 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멀리서도 그 옷만 보면 저는 소경거지로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46절 이하에 보면 여리고 성의 소경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 달려오면서 겉옷을 벗어 던져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소경거지라는 관가에서 구걸하도록 허가해준 옷을 벗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나사렛 예수님을 만났으니 내가 반듯이 고침을 받을 것이며, 그러면 나는 더이상 소경거지가 아니기 때문에 더이상 이 옷이 필요없다”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는 결단코 그 옷을 벗어 던질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대로 그는 고침을 받았고, 그렇기 떄문에 그는 더이상 거지노릇을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렬에 가담하여 그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밖에 돌아다니는 소경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경이나 앉증뱅이등 장애인 구걸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 특히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목이나 성전 문 앞에 많이 있었습니다. 속된 말로 그곳이 돈벌이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성전 앞을 지나다가 소경들을 보면 재수 없다고 다른 길로 피하여 버리든지, 동전이나 하나 훅 던져 주던지, 아니면 저주받은 놈 보아서 재수 없다고 그 얼굴에 침을 택 뱉고 갔습니다.

 

이처럼 소경으로 태어나거나 문둥병이 걸린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격리된,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로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 문둥병이나 소경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만이 그 저주를 풀어줄수 있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이 고칠수 있는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보다도 소경과 문둥병자들을 더욱 많이 고치신 것은 아마도 당신이 곧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여러 부류의 장애인들 중에서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아니 구걸하던 그 성전 앞에도 여러명의 소경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오직 이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소경거지는 다른 소경거지들과 무엇이 달랐는지, 어떻게 해서 고침을 받았는지 보시면서 은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못고칠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 받으시려면 하려면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1절에,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논쟁이 붙었고, 유대인들이 돌로치려고 하자 성전을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때 이 소경은 성전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신 것은 그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원어로 보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장애인들을 만날 계획이 없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을 피하여 급히 나가시다가 그 입구에 있던 소경을 보신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 시각에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에수님은 그를 보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침을 받으려면 예수님께서 자주 드나드시는 곳,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1: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the church, which is His body,”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 믿는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시니, 예수님은 교회에 항상 계실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계셔서 우리가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의 찬양도 받으시며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고, 김목사가 내 말을 잘 증거하는가 보자 하시면서 지금 이 말씀도 들으십니다. 그래서 저도 예배 때마다 강단에 올라올 때는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시려면 예수님의 눈에 띄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에 확 뜨이기 위햐서는 예수님께서 늘 계시는 교회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나와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새벽예배등 각종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눈에 확 띄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못고칠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 받으시려면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질병이 없어지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신다는 믿음, 문제를 해결시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그곳에는 여러명의 소경거지들이 구걸하고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 보시지도 않다가 왜 이 사람 앞에 서셨습니까? 원어로 보니까 원래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만나실 계획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고 돌로치려하였기 때문에 급히 성전을 빠져나가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 저사람 믿음이 대단하네”하시면서 그 소경거지 앞에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신의 질병을 고침받을 만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식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는 소경을 고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인지라 찾아가 만날수 없고 그저 그렇게 기더리고만 있었는데, 바로 오늘 그 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오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4:9절에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지금의 터어키 북쪽의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두 다리를 못쓰는 안증뱅이도 참석을 하였습니다. 두 다리를 못쓰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오지 못하고 누가 업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앉증뱅이가 바울사도의 설교를 열심히 잘 듣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사도께서 설교중에 이 앉증뱅이에게 시선이 자주 갑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대단합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그 못고치는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을 그 앉증뱅이에게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교하다말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 도시에 안증뱅이기 이 한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장애인들 중에 오직 이 한사람 만이 바울사도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43절 이하에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댄자가 누구냐?” 다시 말한다면 “누가 내 몸을 만졌느냐” 고 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예수님 한번 만져보고자 밀치고 난리인데, 예수님 만진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아니라, 내게서 능력이 나간줄 내가 앎이라”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만져본 사람들도 많앗겠지만 호기심에, 본의 아니게, 혹은 억지로 떠밀려서 예수님과 부딪히게 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군중속에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내 병이 낫으리라는 간절한 믿음이 있었던 사람은 이 여인 한 사람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노라”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확신을 가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선 내 질병을, 내 문제를 예수님께 온전히 맏길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질병이나 문제를 예수님께서 온전히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라는 찬송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사들이 못고치는 질병을 고침받고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도 모두 해결받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못고칠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상의 편견이나 나의 생각과 논리를 철저히 버리고 예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 소경거지는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가시다가 자기 앞에 멈추시더니, 제자들은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묻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가 눈은 안보이지만 지금 그들의 대화는 물론 그들의 발 디디는 소리까지도 다 듣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때 예수님의 답변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기의 소경된 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는 정말 초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여기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내가 소경된 것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 알고 있었는데, 우리 조상이나 내가 엄청난 죄를 졌기 때문에 그 죄가를 치루는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려고 일부러 나를 소경되게 하셨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저주받은 인생이라”자탄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하시니, 이 정말 기가막힙니다.

 

정말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치지만 누구 하나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 하나없는 고독한 인생, 길가에 버려진 인생으로 살아가는 그 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나는 속히 죽는것이 소원인데, 나같은 놈에게 무슨 소망이 있다고, 세상에 멀쩡하고 잘난사람 많은데 왜 나같은 소경거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신단 말인가?

 

그는 잠시나마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저주받은 몸이라는 사람들이 말의 맞을까? 난 저주의 몸이라는 우리 어머니 말씀이 맞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맞을까?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이 확 바뀝니다. 그간 들어서 알아왔던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 분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 죽고싶지만 마지못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는 이제 예수님의 그 말씀으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약한자, 소외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십니다. 다섯번씩이나 이혼을 당하고 온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동거를 해오던 그 수가성의 여인을 자기 온 동네를 구원하는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험악한 군대귀신이 들려 무덤사이에서 고통중에 소리지르던 미치광이를 고치셔서 자기 고향을 구원하는 전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전서 1: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좀 부족하거나 연약하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나의 현재 삶이 궁핍하고 미천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원망도 하지 마십시오. 나의 연약함을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까 기대하시면서 그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오늘 소경처럼 눈이 번쩍 뜨게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 반듯이 일어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못고칠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수님 말씀에 의심없이 철저히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하시더니 갑자기 “캐액, 퇘”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있던 소경은 침뱉는 소리가 나니까“어이쿠 내게 침을 뱉는구나”라고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을 것입니다. “캐액, 퇘”하는데 자기에게 침이 튀지 않았습니다. 대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잠시후, 무엇인가 차가운 흙같은 것이 자기 눈에 척 발라 집니다. 어이쿠, 땅에 뱉은 침으로 이긴 흙을 내 얼굴에 바르는구나 이 소경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목사가 안수기도 해준다고 하더니, 땅바닥에 침을 탁 뱉아 그것을 얼굴에 발라주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도대체 뭣하시는 것입니까? 라며 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가관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십니다. 아니 낫게 해 주시려면 곱게 낫게 해 주실 것이지 왜 더러운 침을 뱉아 흙을 이겨서 얼굴에 발라 주십니까? 그리고 이제는 가서 씻으라? 그럴려면 애시당초 안발랐으면 될 것 아닙니까? 이 때쯤해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성 안에있던 조그만 인공호수로써, 지금 이 소경이 있는 곳과 매우 가깝습니다. 이 연못은 히스기야 왕이 기원전 약 700여년 전에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성 밖에 있던 물을, 암벽을 뚫어서 성 안으로 끌어오면서 판 것입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 성을 3년간이나 봉쇄하였어도 성안의 사람들은 목말라 죽지않고 앗수르 병사들이 퇴각할 때까지 이 물로 버텼습니다. 그런데 오랜세월이 흐르면서 그 연못 명칭이 실로암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연못에 침으로 이겨바른 얼굴을 씻고 오라니, 여러분들 같았으면 이때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제자들은 이 희한한 광경에 폭소가 터져나오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심각하신 지라 웃지도 못하고 억지로 참느라 엄청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무슨 희한한 일도 다 있네 하면서 떠들며 구경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실로암 연못에 갔습니다.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정말 바보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물에 씻자 온전히 나았다고 성격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 수치심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하였더니 자기의 원하던 바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땅에 침을 뱉으셨고, 왜 그 흙을 이겨서 얼굴에 바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소경을 눈뜨게 하는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셨는데, 그 침은 그 소경의 얼굴에 묻지않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너를 향한 사람들의 편견, 저주받았다는 편견, 네 얼굴에 묻지않고 땅 바닥에 떨어졌지 않느냐? 너는 더이상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다. 너는 저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몸이다.

 

또한 진흙을 얼굴에 이겨바른 것은, 이미 너의 얼굴에 닥지닥지 붙어있는 너의 굳어진 선입견, 나는 저주받은 존재라고 받아드리고 살아왔던 너의 굳어진 생각들이다. 가서 이러한 너의 잘못된 생각, 굳어진 편견들을 가서 씻어내라 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소경의 완전히 닫혀버린 눈을 열어주실 뿐만이 아니라, 그의 굳게 닫힌 마음과 생각도 활짝 열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시력만 회복하였다 하여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몇살인지는 모르지만, 날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장성하였다고 하니 최소한 20여년간 자신은 저주받은 존재라는 굳어진 선입견,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를 그렇게 불러왔던 부모님들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 때문에 그대로는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두 눈 뿐먼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치유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소경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않고 말도 안되는 일일지라도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면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침을 뱉아 흙을 이겨 얼굴에 바르실지라도 그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실로암에 가서 씻으시기 바랍니다.

 

나아만처럼 계산하시지 마시기 바립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계산을 합니다. 시리아의 군대장관이 왔으면 나와서 정중하게 맞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그리고 와서 내 몸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와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그 흙탕물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 외교상 결례는 그만두고서라도 이거 말도 안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똑똑한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믿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직접 받아드리지 못하고 계산해 봅니다. 그리고 자기 논리에 맞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믿고 따르는데, 자기 논리와 상식에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5:5절에“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던 베드로처럼 이해가 가지않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라는 기적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에도 반듯이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침을 땅바닥에 뱉아, 흙을이겨 소경의 얼굴에 발랐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능력도 권세도 근거도 없는 사람들의 이 저주덩어리, 너를 옥쇄조이고 있었던 이 죄책감, 절망감, 원망덩어리를 보느냐. 이것 가서 씻어 버려라 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실로암 연못에 보냈다고 하였는데, 그 연못물이 능력이 있었던 것 아닙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그 연못에 얼굴을 씻는 행렬이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의 행위, 얼굴을 씻으러 간 믿음의 행위가 그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얼굴의 흙을 자기 손으로 닦아버리고 씻으러 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눈은 지금까지도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보십시다. 못 고칠 질병이 있습니까?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십시다:

 

 

주님, 나에게도 소경거지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소경거지처럼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가서 씻을수 있는 믿음의 행위를 갖게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말씀대로 행할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소경이 눈을 떳듯이, 지금까지 어두움 속에서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수 있는 삶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