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06
벧엘교회1: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창세기24:50-60절)
February 23/2014
에덴교회, 방주교회를 거쳐 이번주 부터는 벧엘 교회입니다. 벧엘교회는 이삭의 아들 야곱에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벧엘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던 동기, Motivation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먹고 도망치다가 노중에서 만난 하나님 앞에서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빌며 그곳에 교회를 짓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와 형을 속여먹는 이 끔찍한, 그로 말미암아 가정이 풍기박살이 나는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야곱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세웠던 이 약속 때문에 험한 삶을 살아가며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리브가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리브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남편 이삭을 만나는 이상적인 결혼이라 치켜 세우는 분들도 있습니다. 혹은 이삭과 리브가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라고 부러워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맺어준 짝이다”라며 서로 참고 산 것이지 그리 행복한 부부가 아니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상대쪽에서 주장하니까 거기에 따른 것이지, 아직 하나님을 모르던 그녀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먼길을 따라왔겠습니까? 그녀는 그녀의 오라비 라반처럼 야심이 있었고, 처음에는 물질과 권세욕에 빠져 결혼을 했다가 곧 실망하고 맙니다. 유순하고 양보하기를 좋아하며 가급적 주변 사람들과 퍙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남편이 그녀의 눈에는 무능력함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누이라고 속이는 겁장이 앞에 그녀는 아연 실색을 하였을 것이고, 아마도 그때부터 그녀는 남편을 무시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자기가 배아파 낳았으면서도 맏아들을 싫어하고 둘째를 사랑하는 편애로 말미암아 평안했던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둘째아들과 생 이별을 하고 얼마 살지도 못한채 한많은 삶을 마친 비련의 여 주인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녀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자신을 불태워 하나님께 바칠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이삭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한다면,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는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가는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물 끈” 혹은 “단단히 묶는다”, 한번 물면 끝을 보고야 만다 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리브가의 삶을 보면서 은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과 에서 리브가는 원래 아이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무녀독남, 독자였던 이삭은 아들을 무척 기다렸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남자들 같았으면 씨받이 한다고 여자를 또 얻었을 텐데, 이삭은 아내의 태를 열어달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삭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태를 열어 아이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믿는 남편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브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이삭처럼 아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태중의 아이가 자라면서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배가아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였더니 창세기 25: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하셨습니다. 뱃속의 아이들이 쌍둥이 인데, 태중에서부터 이들은 서로 다른 민족이라서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 한놈이 먼저 나오는데, 전신에 붉은 털이 나있습니다. 어머, 뭐 애가 이래 하면서 붉다해서 그 이름을 에서라 하였는데, 그를 뒤이어 다른 한놈은 먼저 나오는 놈의 발을 붙잡고 나옵니다. 그래서 발을 붙잡고 나왔다고 하여서, 둘째놈은 야곱이라 하였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은데 둘째 아들 야곱은 몸에 털이 없습니다.
에서가 전신에 털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국을 유업으로 이어받을 상속자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몸에 털이 없는 야곱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이브처럼, 부끄러운 죄악에 빠진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한편 에서는 장자답게 씩씩하고 건장하게 자랐고, 사냥을 잘 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어떻게 하면 내가 형 자리를 빼앗고 내가 족장이 될까 그 궁리만 하면서 처량하게 나날을 보냅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큰자가 작은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며, 큰자 에서는 미워하고 작은 자 야곱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편 에서는 장자로서 자신이 족장으로 태어난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족장이라는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몰랐을 것이며, 또한 아무도 빼앗을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일찍부터 장자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자기 운명과 같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엇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법으로는 노력이나 무력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시탐탐 빼앗을 기회만 엿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삭은 젊은 나이에 눈이 어두어 집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모랫바람이 심하여 유목민들 중에는 눈이 일찍부터 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유목민이었던 야곱도 나중에 눈이 멀지 않습니까? 여하튼 이삭은 일찍부터 눈이 안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찍 은퇴를 하려고 맏아들 에서에게“내 아들 에서야! 너에게 족장직을 물려 줄테니 속히 좋은 짐승을 잡아 요리 잘 해서 내 앞에 바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리브가는 급히 야곱을 불러, 오늘 네 아버지가 네 형에게 족장권을 물려 주실 것이다. 네 형이 지금 사냥을 나갔으니, 너는 지금 당장 염소를 잡아 가죽을 벗겨서 내게로 가져오라. 네 아버지가 어떤 요리를 제일 좋아하는지 내가 잘 알지 않느냐?
그리고 그 염소가죽은 네 민둥한 팔에 칭칭감아 네 형처럼 털이 많은 자처럼 하여라. 그리고 네 형의 외투를 훔쳐입고 내가 요리한 음식을 가지고 네 아버지에게로 가서 형의 축복권을 가로채라. 오늘 아니면 다시는 이러한 기회가 오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 얼마나 한심한 짓입니까? 족장을 물려주는 이임식은, 마치 왕의 추대식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를 갖추어 성대하게 치뤄지는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앞을 못보니까 남편 대신에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불러 의복을 입고 예를 갖추도록 준비를 시키고, 종들을 시켜 음식을 장만하고 당시 주변의 추장들을 청하였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야지 주변의 추장들도 새로운 족장을 인정할 것이 이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자기 맏아들을 불러 사냥하여 음식을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이미 리브가는 남편을 무시하였고, 어쩌면 남편이 빨리 죽든지 빨리 족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야곱을 그 자리에 앉하려고 벼르면서 나름대로 계획을 다 세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녀는 야곱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세밀한 것까지 지시를 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이미 계획을 다 세워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렇게 막힘이 없이 세세한 것까지 척척 지시를 할수 있었겠습니까?
여하튼, 야곱은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축복은 커녕 저주나 받지 않을까 혹시는 맞아 죽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해 냈습니다. 염소 두마리를 잡아 가죽을 벗겨 자기 두 팔에 두르고, 형의 외투를 훔쳐서 입고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요리를 가지고 아버지 하며 아버지 앞으로 갔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참 희한했습니다. 목소리는 분명히 야곱인데, 의심이 가는지라 “너는 누구냐”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창세기 27:19절에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21절에“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하면서 야곱을 만져 봅니다. 그러면서 22-23절에“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 즉 족장권을 가로채게 됩니다.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유업으로 받는 족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이미 그런 순서를 정하여 주셨으니까 노력 할 필요도 없고 뻬앗길 염려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가로챘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행위는 장자였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유업을 빼앗긴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또한 오늘날 예수님을 만난 흔적도 없는 분들이“나는 모태신앙입니다. 유아세례도 받았고, 청년부때부터 선교도 다녀왔고 집사 장로된지가 이미 수십년입니다” 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건 침례를 받았건 선교를 여러번 다녀왔던,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목사라고 특권이 있는것 아닙니다. 장로, 집사라고 예외가 있을수 없습니다. 내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있어야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야곱의 이러한 행위는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이 태어난 오늘날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과 깉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 병정들이 그 옷을 다 벗겼습니다. 벗겨신 그 옷을 우리 몸에 걸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에서처럼 두 팔에 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 두 팔에 둘둘 감았습니다. 그리고 형의 외투, 유대인들이 거절한 구원의 외투를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물을 들고, “내가 상속자이니 이 예물을 받으시고 나를 상속자 축복을 해 주십시오”라며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였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때 우리의 더럽고 수치스럽고 후회스러운 모든 죄가 다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은 커녕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견딜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곁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벗겨진 그 겉옷과 속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감춰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어디 보자, 이 놈이 죄가 많이 있을텐데 내 아들 옷으로 감춰져서 아무것도 안보이네, 무죄”하면서 우리를 통과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천국에 들어가 유업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무슨 목사, 집사, 장로등 무슨 계급이나 직책이 필요합니까? 오직 예수님을 확실히 믿느냐 안믿느냐,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예복이 있느냐 없느냐 그 것 밖에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22:11-12절에 왕의 잔치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손님들이 왕의 잔치에 예복을 입고 참석을 하였는데,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않고 평상복을 입고 왔습니다. 그러자 왕이“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경고 하셨습니다. 임금님이 쫓아내시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그의 친구는 물론 부모형제도 막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그래서 천국에 대한 말씀도 많이 들어 익히 잘 아는데, 그래서 천국으로 직행하는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복,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흔적, 신앙생활 열심히 한 흔적이 안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에복을 입은 줄 알았는데, 그리하여 부끄러운 죄악이 가려진 줄 알았는데 아담과 이브의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과 마찬가지, 아직도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였더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구약성경을 다 암송한다 할지라도, 천국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의 흔적이 없으면 심판대에서 쫓겨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구원을 얻었으면 우리는 구원의 대열에 낄 기회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로마서 11:11-12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 예수님을 배척하여 구원받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 구원이 우리에게로 넘어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얻을수 있는 축복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통하여 유대인들과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관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야곱도 이삭도 아닌 리브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리브가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어가는 우리 믿는자들과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예표하기 때문에 리브가의 삶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리브가가 누군가를 좀더 자세히 알려면 창세기 24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나이많고 아내 사라도 죽고 그래서 죽기전에 며느리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들은 음란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외아들 이삭은, 나이먹어서 난지라 그저 오냐오냐만 하여 키웠더니 마음이 너무 유순하고 여립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자들을 며느리로 삼았다가는 당장 처가에 휘어잡히고 그들이 믿던 우상숭배에 빠져 버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오면서 일구워온 신앙의 유산은 물론 자기 후손들도 모두 가나안 사람들에게 흡수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브라함은 자기 종들의 우두머리인 엘리에셀에게 호위병으로 종 열을 나귀 열필에 태워서 자기 밧단아람으로 가서 자기 친척중에서 여자를 모셔오라고 합니다. 이삭이 당차고 똘똘하였더라면, 아버지가 나서기 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이미 구하였을 것입니다. 이삭은 그럴만한 위인도 못되었지만, 아버지 말에는 절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무법천지였던 당시에 젊은 처녀를 모셔오는데 나귀 열필과 종 열명은 있어야지 강도떼를 만나도 막아낼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나귀중 최고로 좋은 것들과 체격도 늠름하고 싸움도 제일 잘하는 종들 10명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들이 이삭의 아내를 모셔오기 위하여 수레와 호위병까지 딸린 큰 향렬을 보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모셔오기 위하여 우리가 타고갈 수레와 함께 중간에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가로채지 못하도록 최고의 호위병들이 딸린 천사를 보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밧단아람에 이르자 엘리에셀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그가 왜 일부러 물긷는 시간을 맞추어 우물가로 왔습니까? 당시나 지금이나 물은 생명입니다. 야곱도 하란으로 도망칠때 우물에서 라헬을 만나 결혼합니다. 모세도 미디안으로 도망칠때 우물에서 십보라를 만나 결혼합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도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나 생명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물은 성경에서 우리를 살리는 생명수, Living Water가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또한 당시 그곳 풍습이, 여자들은 해가 지려고 하면 저녁밥을 지으려고 물을 길러 우물로 나옵니다. 그리고 물항아리가 무거우니까 힘약한 노인들이 아니라 대게 젊은 세댁들이나 처녀들이 나옵니다. 엘리에살은 이미 이러한 이 나라 풍습을 알았고, 그 풍습대로 우물가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은 데려갈 신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신부가“난 당신을 못믿겠습니다”라며 안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낯선 사람이 와서“나는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우리 주인의 아들이 혼기가 되어서 신부감을 고르러 왔습니다. 나를 따라 가지 않겠습니까?”하면 따라나설 여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먼길까지 와서 이렇게 힘들게 구하여 모시고 갔는데, 만에 하나 이삭이 “나 이 여자 싫다, 세상에 여자가 없어서 이렇게 매력없는 여자를 데리고 왔나? 여기 주변에도 예쁜여자 흔해 빠졌는데 그 먼길까지 가서 그런 여자를 네리고 왔나? 당장 데려다 주고와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라는 젊은 처녀가 나타납니다. 종은 마음이 초급합니다, 행여 놓칠새라 달려갑니다. 창세기 24:17-20절에“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하였습니다. 이 행동이 단순한 것 같지만 당시 풍습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낯선 남자가 동네에 들어와서 처녀에게 물을 달라하는 것은 곱지 않은 장면입니다. 수가성 우물에서 예수님이 젊은 아가씨도 아닌 중년도 넘었을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당신은 우리와 상종도 하지않는 유대인 남자가 아닙니까? 괜히 수작 부리지 마쇼, 난 남자에 질린 사람입니다”하면서 거절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수작거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동네 청년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혹시는 그 동네에 리브가를 짝사랑하는 청년도 있었을줄도 모릅니다. 하긴, 날렵한 낙타 병사 10명이나 거느리고 왔기 때문에 이 장면을 보았더라도 아무도 감히 시비걸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처녀들은 수줍어서 못들은 척하고 그냥 도망치듯 자기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상식이지, 머리에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그것도 시집도 안간 처녀가 외간남자가 부르는데 가다가 말고 섭니까? 과년한 여자가 동네 사람도 아닌 타관 남자에게 자기 물항아리에 입에 대고 마시라고 그 항아리 주둥이를 입에 대줍니까? 이게 상식적으로 통힐 일입니까? 당시 그 지방의 풍습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 남자에게 꼬리를 쳤다고, 헤푼여자라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보았다시피 리브가는 그 남자에게 물을 떠서 마시도록 머리에 이었던 항아리를 내려 항아리의 주둥이를 그 사람의 입에 대줍니다. 그리고는 그가 타고온 일행의 짐승에까지 물을 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돌발 행위입니다.
당시 밧단아람 지역은 물이 귀하여 동네마다 한 가운데 큰 우물을 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두레박으로 긷는, 수직으로 파 내려간 우물이 아닙니다. 두레박이 없이도 물항아리에 길을수 있도록 넓게 비스듬히 경사지게 팠는데, 보통 15미터부터 심하면 50미터 정도까지도 파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물이 마치 동굴같지요. 그리고 동굴 입구는 넓고 사람 키보다 높게 파 들어갔을 것이고, 동굴 끝에는 물이 고여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물 항아리를 가지고 계단으로 내려가 항아리를 물에 기울어 길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에셀은 그 우물 입구에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껌껌하고 그 깊은 우물속에서 리브가가 물항아리에 물을 길어 낑낑대며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가씨를 붙잡고“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외면하거나“안됩니다”라고 거절하지 않고 “주여, 마시소서”그녀는 급히 등에 지고 있던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또 말했습니다. 그리고는“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또한 그가 타고온 짐승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는 당시 그 나라 풍습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브가는 지금 이 남자, 나이는 좀 들어 보이지만 종을 열씩이나 거느린 엄청난 부자에게 반한 것으로도 볼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카리스마가 넘치고 능력있고 핸섬한 주의 종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혼동해서는 아니됩니다. 가끔씩 거룩한 교회에서 주의 종과 여성도님들 간에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기도 하는데, 주의 종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아들과 종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착각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가, 즉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물을 다 마시자 얼른 물 항아리의 약대의 여물통에 쏟고서 다시 우물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리브가는 그 깊은 우물을 오르내리면서 열 마리의 약대가 충분히 마시도록 물을 길어올렸습니다. 아마도 줄잡아 20번에서 많게는 50번 정도는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젊은 여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급히 오다가 물을 쏟기도 했을 것이고, 미끄러저 넘어지지는 않았나 모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엘리에셀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종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젊은 여자가 그렇게 힘들게 물항아리를 이고서 비탈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도와 주지를 않고 무엇들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시간에 동네사람들이 한명도 없었겠습니까? 왜 아무도 도와주지않고 구경들만 하고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