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3

이웃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라(방주교회 시리스3): 창세기 9:20-27절)

Posted by on Feb 13 2014 at 11:07 pm

                                                                            Feburary 9/2014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라는데요, 하루는 젊고 핸썸한 사람이 열차를 탔다고 합니다. 열차는 출발하였고, 이 젊은이는 자기 좌석을 찾아서 갔더니 양 옆에 연세가 꽤 되신 할머니들 사이에 앉게 되었더랍니다. 그래서 양 옆을 쳐다보고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잡지를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왼편에 있던 할머니가“이봐 젊은이, 어쩌면 이렇게 핸썸할까? 내가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는 숨을 쉴수가 없거든. 내가 지금 숨막혀 죽겠어. 내가 이 창문을 열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못 열겠어. 이 창문좀 열어주겠나?” 그래서 창문을 열려고 하자 다른 쪽에 앉았던 할머니가 얼른“이봐, 그 문 열면 나는 죽어. 의사가 그런데 나는 찬 공기를 마시면 급성 폐렴에 걸려 죽는데. 그러니까 그 문 열면 안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 어찌 할바를 몰라 안절부절하며 양쪽 할머니를 번갈아 쳐다 봅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아이 이 할망구들 때문에 시끌어서 살수가 없네. 이봐 젊은이, 뭘 그리 망설이나. 우선 창문을 활짝 열어 놔. 그래서 그 폐렴걸려 죽는다는 할머니가 죽거들랑 문을 쾅 닫아 버려. 그러면 숨막혀 죽겠다던 그 할망구도 죽겠지.

 

오늘은 노아 가족에 일어난 사건인데, 이 성질급한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극단적인 처방을 내려서는 아니 되겠지요. 만약에 자신이 그 할머니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데 누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분의 마음은 어떻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만 살려고 하는 생존경쟁의 승자독식에서 이제는 우리도 좀 성장해야겠지요. 이제는 나보다 더 힘든 이웃을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워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숨막혀 죽을 지경에 이른 할머니를 위하여 문을 조금 열어드리고, 폐렴에 걸릴까 염려하는 할머니에게는 마스크를 구입해 드리면 조금씩은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견딜만한 세상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선 오른쪽에 계신분들이 왼쪽편 분들에게 “내가 창문을 조금 열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인사 나누시지요. 그럼 이제는 왼쪽 계신분들이 오른쪽 계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제가 이 마스크를 드리지요” 라고 인사를 나누십시다.

 

 지난 주에는 권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권념해 주시면 그 일이 풀리게 됩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도 못쉴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 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권념해 주시면 성령의 바람이 불게되고, Παρακλετοσ,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잠겼던 물이 빠져나가듯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였던 문제들, 절망과 좌절속으로 밀어 넣었던 문제들이 풀려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권념해 주시면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듯이 건강 문제, 가족문제, 자녀문제, 경제적인 문제등이 하나 둘 풀려나갑니다.

방주속에 있던 노아와 짐승들을 권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고난속에 부르짖는 여러분들을 권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십시오. 환난중에라도 부르짖으십시오. 고난 중에라도 부르짖으십시오. 죄악 중에라도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잊을수도 거절할수도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념하셔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환난에서 벗어난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고난 중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내 주신다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며 신실하게 살아 갑니다. 그리고 내 세울 것이 없으니까 하는수 없이 겸손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면“교만”이라는 마귀가 우리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힘들고 어려운 연단을 다 이겨내고 마침내는 승리의 깃발을 날리다가 그만 진흙탕속으로 곤두박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윗도 사선을 넘는 전투를 수없이 치르면서 명재경각에 있는 자기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외칩니다. 시편에 보면 속히 구해 달라고 여러차례 간절히 애원한 것을 볼수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는 큰 제국을 이루게 되자 그 때부터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밧세바와의 간음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또한 전쟁 중에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겸손하였던 그가 일단 전쟁이 그치자, “와! 내가 훈련시킨 나의 훌륭한 병사들이여. 요압아 내 병사들의 총 숫자를 계수해 보아라”며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와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돌립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온역이 퍼지게되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겨 내고 난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도록 더욱 겸손해지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속에 있는 선과 악

이제, 물이 점차 감하여지자 노아는 물이 얼마나 감하였는지 알아보고자 방주 안에 있던 가마귀를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하지만 가마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물위에 둥둥 떠다니던 시체들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방주 안보다는 훨씬 좋으니까, 방주 안에서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노아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가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그러자 비둘기는 이리저리 날면서 앉을 자리를 찾았지만, 물위에는 시체만 떠다니고 땅은 아직 마르지 않아 먹이는 물론 앉아서 쉴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수 없이 방주 안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간 가마귀와 비둘기가 방주안에 동거를 해 왔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선과 악, 구원을 받은자와 받지 못한자,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가 공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이 둘을 방주 밖으로, 세상으로 날려 보냈듯이 세상에도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비둘기는 돌아 왔는데 가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말세에는 예수님 밖의 사람들은 점차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결국 예수님 안의 사람들과 예수님 밖의 사람들, 이렇게 양극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자 노아는“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했는데, 자기 손을 방주 밖으로 내밀어 비둘기가 자기 손에 앉게한 후 방주 안 자기 품으로 끌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냥 비둘기가 돌아왔다고 하면 될텐데, 왜 노아가 손을 내밀어 앉게 한후 자기 품으로 끌어 드렸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자들을 얼마나 깊이 아끼고 보호해 주시는가를 암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절에“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안주할 곳이 없이 떠다니는 나그네 인생, 지치고 힘들어 목마르고 애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내밀어 당신 품으로 끌어드려 안아 주십니다.

힘드시는 일이 있으십니까? 어짜피 내 손에 쥐고있으면서 한숨 푹푹 내쉰다고 해결되지 않을 일들, 하나님께 다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하나님의 품안에서 평안을 찾으면서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약속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우리의 육신까지도 쉬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거친 세상에서 승리할수 있도록 믿음도 주시고 능력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신앙생활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노아가 드린 제사를 기뻐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고 그에게 복을 주셨듯이 노아에게도 많은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주신 축복에 한가지 덧붙여 육식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육식이 통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홍수 훨씬 이전에 목축을 하던 가인의 후손들도 이미 육식을 해 왔습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주시면서도 노아의 가족을 에덴 동산으로 드려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 마음속에, 특히 그의 아내를 비롯한 나머지 일곱식구들은 홍수의 심판은 면하였지만 에덴동산에 들어갈 자격, 노아만큼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새로운 삶

그리하여 노아는 우선 자신이 살 장막을 지었습니다. 지난 120년동안 방주를 짓느라 그는 이미 능숙한 목수가 되었겠지만, 가인처럼 한곳에 정착할 목적으로 튼튼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직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방주로 다시 들어가라하면 들어가고, 여기 살라면 살고, 어디로 가라면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임시 거처로 장막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고 자기 식구밖에 없습니다. 부모 형제및 친했던 친구들은 물론 자기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였던 사람들, 자기의 위협이 되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죽고 없습니다. 거인들도 용사들도 홍수에 모두 떠내려 가 버렸고, 자기 식구들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는 갑자기 온 세상의 왕이 된 것입니다,물론 백성들은 아내를 포함하여 일곱명 뿐니었지만서도요.  이제는 그가 어떤 짓을 한다 할지라도 말리거나 잔소리 할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간 방주안에서 각오하고 긴장하며 살아왔던 그의 삶은 점차 느슨해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전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타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변에 정복할 나라가 더이상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해지고 타락하여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간 전쟁만 하느라 모든 신경이 오직 전장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그치자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고 내분이 생겨 결국은 처잠하게 무너지고 말지 않습니까?

알라스카 연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운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때 알라스카의 자연산 연어를 어떻게 싱싱한채로 본토로 가져오느냐가 중대 관심사였습니다. 비행기로 공수를 해오자니 경비도 만만치 않고 또한 싱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트럭으로 운반해 오는데, 수십시간에 걸쳐 본토에 도착하면 연어들이 지치고 멀미를 하여 싱상한 맛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어의 천적이 메기라는 것을 알고서, 연어를 담은 물탱크에 메기 몇마리를 집어 넣었더니 연어들이 메기를 피하여 마구 도망치더랍니다. 죽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하여 도망다닌 연어들, 수십시간의 긴 여행에도 불구하고 모두 건강하고 싱싱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힘든 고난에는 쓰러지기 싑지만 적당한 시험거리, 적당한 어려움은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타락하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기독교 국가가 너무 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속의 고난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라나타”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는데,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주여, 나 좀 즐기다가 가도록 천천히좀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뜻하지 않은 실수

노아는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하셨고 지상에서도 가장 착한사람 이 아니었습니까? 다시 말한다면 그는 하늘과 땅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은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듯이, 그는 예배 중심의 사람인지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기를 정해놓고 그 날은 자기 아들들과 그들의 식구들을 모두 자기 장막으로 불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잔치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상품의 짐승을 잡고 야생의 포도보다는 자신이 정성껏 가꾸어 만든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다음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도 그는 여느때처럼 흠없고 좋은 양과 소를 잡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자녀들을 불렀을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온지도 이미 오래된지라 노아도 이미 나이많아졌고, 양과 소를 잡아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노아 부부도 엄청나게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끝나고 온 가족이 앉아서 포도주와 함께 만찬을 즐겼고, 예쁘게 자라는 손자 손녀들을 보면서 노아는 기분이 좀 Up되어 평소보다 술을 더 했을 것입니다. 잔치가 끝나고 자녀들도 대충 떠났습니다. 그래서 피곤한데다 식곤증이 오니까 노아는 자기 장막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든 것입니다.

본문 21절에,“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하였는데, 당대의 최고 의인, Perfect Man, 완전한 자라는 말이 무색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완전한 자라고 칭찬을 하셨지만, 그것은 그의 행실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성이 완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완전한자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처럼, 이세상 그 어느 곳에도 그리고 우리 인류 역사 가운데에도 예수님 외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의인이라고 한 것은, Rightesous Person, 완전한 자가 아니라 Justified Person,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자, 인정을 받는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실이 아직 의롭지 못하여도 예수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리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처럼 아니 노아에게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들이요, 죄인들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언제든지 혈기를 부릴수도 있고, 실족할수도 있는 불안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지 말고 덮어주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와 들춰내는 자

잠을 자다보니까 덥기도 하고 해서 노아는 덮었던 옷을 차 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문화생활을 오늘날 우리처럼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옷이 없었습니다. 그저 짐승 가죽을 벗겨 걸치고 다니면 그것이 옷이 되고, 밤에는 그것을 깔고 자든지 덮고 자든지 했던 것입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흐른 예수님 시절에도 대분분의 사람들은 속옷도 없었고, 통옷 한개 뿐이었습니다. 아주 부자들은 비단 자색옷도 입고 천으로 된 옷도 입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으로 된 옷이 없이 짐승 가죽을 벗겨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찢고 꿰메어 겉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불이 어디 있습니까? 낮에는 그 겉옷을 두르고 다니고 밤에는 그것을 벗어서 덮든지 깔든지 하고 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22:26-27절에“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여하튼 노아는 장막 안이 덮고, 또한 술을 마셨기 때문에 더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옷을 걷어차고 잠을 자는데, 다 간줄 알았는데, 자기아들 함이 아직도 안가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여하튼 간에 그가 자기 아버지의 이 흉물스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나와서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가 방금 본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술주정을 하고 주책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맏아들 셈은 자기 동생 야벳에게 겉옷을 준비하여 자기 아버지의 흉한 모습을 안보려고 뒷걸음질 쳐서 벗은 몸을 덮어 줍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흉보고 형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고, 참으로 형만한 동생 없다는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의 허물을 들춰내기 좋아하는 것도 버릇입니다. 그리고 잠언 10:12절에“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하였듯이 그 사람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웃의 허물을 들추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사랑이 없고 쓴디쓴 상처만 남아 있기 때문에 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도 쓰고 아프게 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화가나고 혈기가 오르면 축구공이 아니라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도 모르는 럭비볼 같은 존재들 아닙니까? 그러므로 서로 이해하고 덮어주기를 힘쓰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과 서로 나누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저주

잠에서 깨어난 노아는 자기 아들 함이 자신을 비웃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단한 노를 발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누가 말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노아는 자기 아들 함이 자기를 어떻게 비방했는지 알았습니다.

함은 아비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들춰내어 흉을 보다 저주를 받습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비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어서 축복을 받습니다. 단순한 일 같지만, 이 일 하나로 두 사람의 운명은 형제관계에서 주종관게로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십니까? 주변사람들, 부모님들을 비롯한 연세드신 어른들의 허물을 덮어 주십시오. 노인은 나의 미래의 모습인줄 깨달아야 합니다. 치매걸려 엉뚱한 짓을 한다고“그러니까 늙으면 빨리 죽어야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럴수 있겠구나 라고 이해를 하고 불쌍히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부끄럽게 함으로 결코 내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동반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허물을 덮어 줍시다. 귀에 좀 거스리고 눈에 어색하고 보기에 추해도 덮어 주십시다. 그리하여 셈과 야벳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배신하지 말라

우리는 누구나 은혜를 입고 삽니다. 태어나서 부터 부모님의 은혜를 입고 자라게 되고, 또한 이웃과 주변사람들의 은혜를 입고 성장하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갚아가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은혜를 잊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콩고에서 침팬치들과 50여년을 더불어 살아온 Jane Goodall 동물학자는 부상당하거나 아픈 침팬지들을 구조해서 돌보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원래의 위치로 돌려보내는 일을 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아픈 다리를 치료받은 침팬지, 병을 고침받은 침팬지들은 숲속으로 다시 돌아갈때 고마와서 그런지 이 분에게 깊은 포옹을 한다고 합니다. 짐승도 자기를 돌보아 주신 분을 고마워할줄 아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 잊으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노아의 아들 함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유일하게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놈의 술 때문에 실수를 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흉을 보아도 말려야 할 아들이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조롱합니까?

더구나 아버지가 매일 술 먹고 폭력을 휘두른 것도 술주정 한것도 아닙니다. 벌거벗고 성추행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연약한 인간의 한 순간의 실수였습니다. 그리고 함만 눈을 감고있었으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까발리고 재미있어 했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함이 홍수에서 죽지않고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은 자신의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 노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통하여 세상에 나왔고, 다른 사람들은 고통속에 다 죽어가는데 자기는 아버지를 통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생명의 은인이신 아버지께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함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는 아저지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께 감사할줄 몰랐던 것은 아비지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백증이냐 비판이냐

그렇다고 함이 나쁘고 노아가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 자녀들 앞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십니까? 방주에 들어가 전처럼, 그리고 방주에서의 삶, 그 초심을 지켰더라면 이러한 추태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노아였습니다. 자녀들 앞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는 그 자체, 제사장이 술에 취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이 실수 보다도 함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에 대한 잘못을 책망하셨습니다. 만일 함의 자기 아비의 추태를 조롱한 것이 옳았다면 하나님은 노아의 저주를 듣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아버지 노아를 조롱한 함을 처벌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권위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때문입니다. 함의 실수는 술취해서 잠자는 노인 비웃은 것이 아닙니다. 당대의 의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름부으신 하나님의 종을 서슴없이 비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종으로 삼은 노아를 비판한 것은, 기름부어주신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윤진숙 해양부 장관이 경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관의 잘못에 대한 최종책임은 누구에게로 돌아 갑니까? 그 분을 장관으로 임명한 대통령에게로 돌아갑니다. 왜 애초에 그런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했는냐는 것입니다.

민수가 12:1-2절에“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이많은 모세가 유대여자가 아닌 이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드린 것은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많았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 저것 나 아니었으면 그때 나일강에서 빠져 죽었을 텐데, 오늘날 나의 은혜는 모르고 감히…… 또한 아론 역시도, 저 녀석, 말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그래도 형님으로서 지금까지 다 커버해주고 도와 주었더니 이제는 나를 우습게 여기고…… 하면서 모세의 누나와 형이 모세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무어라고 비난합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너만 선지자고 너만 목사냐? 우리도 같은 사역자들 아니냐? 그런데 네가 우리를 이렇게 우습게 여기느냐?

물론 모세가 그러한 비판을 받을만한 빌미를 제공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비판하고 책망하는 미리암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모세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종을 함부로 비판했다는,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7일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며, 모세는 자기 누나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4:9절에“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찌니라”고 다시한번 상기 시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며 병사 3000명을 풀어 수배를 한 사울왕을 두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당장 목을 치자고, 두번 칠 필요도 없이 한방에 날려 버리겠다고 하였지만 다윗은 말렸습니다. 그리고 무려 13년동안이나 사울왕에게 쫓김을 당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지도자들을 함부로 비판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죄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종이기에 더욱 냉정하게 다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처벌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자칫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자를 비판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나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길이 막힐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북가주에서 목회하시는 한인 목사님이 부끄러운 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문 지상에 곧바로 실리고, 지방 뉴스에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그 목사님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을 비판하고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 분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그분 가족과 그분이 섬기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자들이 행하여야 할 마땅한 태도임을 오늘 노아의 사건은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 파헤치려고 하지 마시고 셈과 야베스처럼 얼굴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질서라는 이름하에 옳고 그름을 따지고 거기에 대한 상벌을 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에는 이웃의 허물을 보고 뒷걸음질 쳐서 덮어줄줄 아는 분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얼굴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옷을 벗어서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함의 항변

물론 함이 거짓으로 부풀려 말하거나 크게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본 대로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노아는 다시는 그런 추태를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술도 당장 끊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함이 그렇게 고발하지 않았으면 언젠가는 더 큰 수치를 당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게 된 것에는 억울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난 후의 행동에 신중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눈을 질끈 감고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드렸다면 축복은 오히려 그의 몫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아버지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떄문에 그렇게 끔찍한 저주를 내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를 참지 않는 의로움이라는 명목하에 상대방의 명예나 사생활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들춰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범죄 행위가 아니라면 이웃의 허물이나 수치는 덮어 드립시다. 베드로전서 4:8절에“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 말씀 붙잡고 이웃의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 허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덮어 드리십시다. 내가 이웃에게 사랑을 보이면, 내 이웃들도 나의 수치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 줄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너무 힘드는 일입니다. 남의 부끄러운 일이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덮어주는 데에는 엄청난 인격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셈과 야벳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함의 태도를 방관하지 않고 단호하게 맞섰습니다. 당장 아버지의 수치를 덮을 이불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눈앞의 허물이 보이는데도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뒷걸음질 쳐서 덮어 드렸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시간 우리 조용히눈을 감고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보십시다.

<기도> 하나님! 그간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명목하에 이웃의 허물을 들춰내었던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왜곡된 진리를 바로 고치고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이웃의 자존심까지도 짓밟았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명목하에 이웃을 판단하고 비판하였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것이 사랑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정의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인줄 알았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함이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없었던 이 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에게 사랑을 더욱 많이 불어 넣어 주시옵소서. 내 마음속에 이웃의 허다한 허물들을 덮고도 충분한 여분이 있을만큼 더욱 크고 넓은 이불을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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