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07

권념하시는 하나님(창세기 8:1-5절)

Posted by on Feb 07 2014 at 12:27 am

김진환 목사 주일 설교  

February 2/2014

몇년 전에 올림픽에서 아이스케이팅으로 은메달을 땃던 사람이 한국의 자기 부모님을 찾아 나섰던 일을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미국에 입양되었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철이 들면서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일은 자기를 낳은 부모님을 찾는 일이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만나서 자기 부모님들에게 꼭 이 질문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나를 버렸습니까?

나는 정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실수로 태어난 존재입니까?

 

그리고 자기 부모님으로부터 “아니야, 너는 우리의 정말 사랑스런 아들이었어, 사랑스런 딸이었어” 이 말 한마디 듣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간절히 기도해도 쉽게 응답이 없으면 이 입양되었던 사람들처럼,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좌절되고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의 방주안에 있었던 노아도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노아에게 방주를 어떻게 짓고 그 속에 짐승을 어떻게 넣으라고 세세하게 지시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일단 방주속에 들어가자 그때부터는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답답했던 노아, 불안했던 노아의 방주안에서의 삶을 같이 살펴 보시면서 같이 은혜받고 도전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타락한 세상 노아 당시의 세상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너무도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가인의 후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후손들과 뒤엉켜 살면서 같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모습 아닙니까?

 

 

오늘날 이혼률이 교회 내에나 교회 밖에서나 거의 동일합니다. 범죄율이나 자살률도 엇비슷하다 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입에서 “무늬만 크리스천” 이다 혹은 “호박에 줄긋다고 해서 수박이 되느냐” 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교회만 다닌다고 크리스천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믿어야 크리스천인데, 호박에 줄긋듯이 “나 어느교회에 다닙니다” 라는 무늬만의 크리스천들이 교회 내에도 너무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하게 타락한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때 그렇게 타락한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의 노아는 세상풍조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정말 보기드문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여서 그렇지 노아의 모든 행동은 물론 속 마음까지도 다 관찰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은 물론 우리들의 심장과 폐부, 즉 우리들의 속 마음까지도 다 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다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가 은밀히 행하는 모든 일 까지도 다 보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타락하여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노아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하였지만, 자기 주변사람들은 물론 자기 부모 형제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노아의 전도들 받아 드리기는 커녕 이 좋은 세상에 흉칙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협박하고 방해하였습니다.

 

 

방주를 완성하고 난 후, 홍수가 시작되던 바로 그날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로 말미암아 노아의 아내, 노아의 세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믿음좋은 남편을 만나서 구원을 얻은 것이고, 그의 아들들은 믿음좋은 아버지를 만나서 구원을 얻은 것이고, 그의 며느리들은 믿음좋은 시아버지를 만나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노아 한사람의 믿음의 행위로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처럼 신실한 행위가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노아 때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심히도 가까워진 이 때에 여러분들의 가족및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할 것이라 전하십시오. 그 날이 구체적으로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경고하셨듯이 그 날이 홀연히 임하게 될 것임을 전하십시오. 그리하여 환난때 자기 온 가족을 구원한 이 시대의 노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방주안의 삶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방주 안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온갖 짐승들이 울고 불고, 먹을 것을 찾아 이리 헤메고 저리 헤메며 사자나 호랑이같은 맹수들은 서로 잡아 먹으려고 싸우고 다투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목적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 도착할 것인지, 아니면 평생 물위에 둥둥 떠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 쏠리고 저리 불면 저리로 쏠리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배 안에 있던 짐승들은 나 죽는다고 비명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저희 시골 동네에 처음으로 시내버스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그간 한시간도 더 걸리는 곳까지 걸어서 5일장을 보러 오던 사람들이 모두 시내버스를 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날이면 학생들외에 장에 가는 사람들로 인하여 버스는 그야말로 미어 터졌습니다. 더구나 장에 가는 사람들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침에 장에 갈 때에는 강아지 팔러 가는 사람, 병아리 팔러가는 사람, 빗자루 팔러 가는 사람등이 그것들을 싣고 장에 가기 때문에 무척 복잡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 장에서 돌아 올 때에는 돼지새끼 사오는 사람, 생선 사오는사람, 낫이나 호미 사오는사람 등 북새통입니다. 차장들은 생선 광주리를 가진 사람이 타려고 하면 머리에 이었던 생선 광주리를 땅에 내려 놓으며 못타게 하고, 그 분들은 날은 어둡고 이 차 못타면 집에 못가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사정을 하며 한바탕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리고 너무 밀리니까 문을 못 닫고 매달리게 되면, 운전사가 이쪽으로 운전하다가 갑자기 커브를 반대쪽으로 틀면 사람들이 짐짝처럼 모두 안쪽으로 쏠립니다. 그러면 시골 아주머니들의 특유한 비명소리 “아이고! 아무개 아버지, 나죽어!” 하면서 그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남편을 부르더라고요. 그 때만 해도 우리 남편들이 기를 좀 피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 사이 앞문 과 뒷문의 차장들은 여유있게 문을 닫으면서, “오라이” 합니다.

 

 

그리고 시골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웅덩이라도 지날때면 차가 위아래로 덜컹 뜁니다. 그러면 바닥에 있던 돼지새끼도 놀라 소리지르고, 생선 광주리에서 생선 국물이 쏟아져 여름에는 하얀 스타킹을 신은 여학생들 종아리며 하얀 부라우스 교복에 생선국물이 튀면 “엄마야!” 하면서 비명을 지르지요. 밀폐된 공간에 생선 냄새, 돼지냄새, 사람 땀냄새 등 갖갖이 냄새들로 꽉차서 숨도 못쉴 지경이지만, 에어콘이 없기에 창문은 물론 차 지붕에 난 문까지 다 열어놓아도 땀은 등을 타고 흘러내려 궁뎅이를 거쳐 종아리까지 축축해집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 안은 이보다도 훨씬 더 심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밖에는 밤낮으로 비가 내리기 때문에 해가 언제 뜨는지 언제 지는지 그리고 달력도 없던 그 시절에 오늘이 몇일인지 날짜 감각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저 하루속히 이 지옥같은 곳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노아는 자기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친한 친구들도 모두 물속에 빠져 죽었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슬펐을 것입니다. 불쌍하신 우리 아버님 어버님, 방주에 타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그래 알았어, 우리는 살만큼 살았으니까 너나 네 새끼들 데리고 방주 많이 타고 오래 살고 그래” 라며 끝내 거절하시더니, 이럴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방주 안으로 모셔 오는 것인데…… 홍수에 떠밀려 돌아 가실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이고 우리 아들 말을 들을걸 라고 후회들은 하시지 않았는지…… 이런 저런 생각에 노아는 참으로 슬프고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온통 아수라장이 된 방주안은 정말 한시도 견디기 힘들어서 노아는 하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정말 미치겠습니다. 숨도 못쉬겠습니다. 나를 좀 구해 주십시오. 이렇게 고통을 주시려고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Please, 제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숨이 막혀 못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노아는 기도하였고 또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한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내린 40일, 비가 땅에 창일한 150일을 합하여 최소한 190일 동안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190일 이상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노아에게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노아의 머릿속을 마구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기간이 가장 큰 축복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을 때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날부터 땅에 내려오는 그 긴 기간동안 홍수의 위험에서 지켜주셨고 방주 안는 있는 사나운 짐승들로부터도 지켜주셨습니다. 질병의 위험에서도 지켜주셨고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을 염려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 믿는자들에게도 이러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갈급한 심령으로 기도원에 들어가 여러날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하여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응답을 받았네 능력을 받았네 하면서 흥분하고 뛰는데, 나에게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시고 버리신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과 불안속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체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러한 기간동안의 불안함과 좌절감, 결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비가오고 구름이 낀 날에도 태양은 우리를 향하여 비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잠시후면 비와 구름이 물러가고 밝은 태양빛이 비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노아의 방주처럼 고통중에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식 열 명이 모두 죽고, 한 순간에 그 많았던 재산도 다 날아갔습니다. 거기에다가 피부병이 온 몸에 퍼져 옷을 벗고 기왓장으로 가려운 곳을 득득 긁고 있었습니다. 그 처잠한 꼴을 보고있던 그의 아내, 그 가려운데 긁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아이고 내가 못살아, 빨리 하나님 저주하고 죽어나 버려!” 고 저주를 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욥기 14:13절에 “주는 나를 기억하옵소서”라며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욥이 그렇게 처절한 상태에서 간절히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욥기 23:8-9절에 욥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수 없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분명히 일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상황을 다 보시고 자신을 돕고 계실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는 알겠는데, 그래서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앞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뒤를 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른 편 왼편 앞뒤 좌우 다 살펴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고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 보고 싶은데, 자기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하십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이미 그 전 날밤 감란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아버지여, 이 잔을 피할수만 있으면 피하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이 극에 달하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애원하셨습니다. 아버지, 내가 너무 힘이듭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왜,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극심한 고통속에 밀어 넣으십니까? 나를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아들이 이렇게 처절하게 울부르짖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얼굴을 돌리시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과 외로움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고 하나님과 내가 단절되었다고 생각될 때 우리에게는 심한 고독과 불안이 찾아옵니다. 음악이나 술로 혹은 오락등으로 외로움과 불안을 메우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고독해 지고 더 불안해 집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하나님이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어렵고 답답할때 하나님께서는 의외로 여러분과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든 자녀에게 더 신경이 쓰이듯, 문제 있고 상처받은 영혼,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더욱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더라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통이 극에 달할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게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은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심 8장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God remembered Noah and the animals in the Arc. 마침내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안에 있던 짐승들까지도 모두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190여일동안 침묵하시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노아를 잊어버리고 계시다가 “아차, 노아가 지금 방주안에 있지. 그 애 고생좀 했겠는데” 라며 그날 갑자기 생각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Remember, 기억하다 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자카르” 는 제 때에, 가장 적합한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의 판단으로 가장 적합한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창세기 30:1절 이하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자기 언니는 아들을 술술 낳는데 자기는 하나도 낳지 못하자 자기 남편 야곱에게 앙탈을 부립니다. 자기를 위로해 줄줄알고 그랬는데 “네가 아들 못난 것이 어떻게 내 잘못이냐?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안주시는것이지” 라며 도리어 화를 냅니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남편으로부터 그렇게 서러운 말을 듣자 너무도 서글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울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30:32절에 “God Remembered Rachel,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요셉, 후에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용서했을 뿐만이 아니라,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요셉입니다.

 

 

컴컴한 방주에서 고통중에 울부짖던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못나 저주받은 여자라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중에 호소하던 라헬을 기억하셨고, 환난을 만나 고통중에 외치는 저와 여러분들을 기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외치십시오. 환난 중에라도 외치십시오. 고통중에라도 외치십시오. 외칠 힘이 없더라도 외치십시오. 당장 응답이 없더라도 외치십시오. 기도줄을 놓지 마시고 계속해서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방주속에서 고통중에 외친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 골방에서 서러움에 북받쳐 통곡하던 라헬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바람으로 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셔서 바람을 보내셨다 하였습니다. 바람이 불고 땅 속에 있는 물이 막히고 하늘의 창도 닫히자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산꼭대기도 나타나고 육지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간 환난이라는 물이 내 건강을, 내 물질을, 내 삶을, 내 가족을 깊이 잠기게 하여 꼼짝도 못하게 짓누르더니,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자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불자 환난의 물결이 점차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온통 물속에 깊이 잠겨서 숨도 못쉴것 같았던 일들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합니다. 하루 아침에 당장 다 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 둘 서서히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자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내가 아무리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을 쳐도 오히려  Sinking Sand 처럼 빠져만 들어 갔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자 Sinking Sand 에서 솟아 오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흥분하게 만드는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는데, 왜 바람이 붑니까? 바람하고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리고 그 바람은 어떤 바람이었기에 땅 속에 있는 물이 막히고 하늘의 창도 닫히고 물들이 점차 물러 갑니까?

 

 

창세기 1: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서 운행하시더라,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하였는데, Spirit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Luark(루아크) 가 오늘 본문에서는 “바람, Wind”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바람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시사 성령님을 보내시고” 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헬라어 Πνευμα(프네우마)는 성령님이라는 뜻도 그리고 바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바람이 꽤 불던데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면, 이런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도우시려고 내게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면 Παρακλετος(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땅 속에 있는 물이 막히듯 환난의 뿌리를 끊으시고 하늘의 물창을 닫으시듯 저주의 근원도 막으십니다. 그리고 물이 점점 줄어들어 산꼭대기도 나타나고 육지도 나타나게 되듯이, 고통과 슬픔에 짓눌려있던 우리의 삶이 점차 일어서서 활기를 되찾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에 끼어있던 먹 구름이 물러갑니다. 어려운 삶이 회복됩니다. 병든 몸이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면 실패한 인생이 승리의 삶으로 바꾸어 집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Remember Me, 나를 기억하시라 기도하십시오. 환난 중에라도 기도하십시오. 절망 상태일지라도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달라 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못하십니다. 이사야 이사야 49: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젖먹이는 자기 자식,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수 있겠습니까? 9달 동인이나 배아파 낳은 아들, 자기 몸의 일부와 같은 아들을 어떻게 잊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사랑하고, 내 생명보다도 더욱 사랑한다 할지라도 보호할 능력이 없어서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 중에 아들을 잃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질병으로 아들을 잃을수 있습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보호할 능력이 없어서 잃어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때 우리 큰 아들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메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그 누구보다도 죽어가는 이 아이를 내가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내가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하는데 난 아무것도 할수가 없더라고요. 그 아이를 위하여 아버지로서 할수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 이 아이를 고쳐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 밖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나의 무기력함, 나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체험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능력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떠나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어느 순간에도 그 어느 상황에서도 우리를 잃어 버리시지도 떠나 보내시지도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 곁에서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와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나의 아버지요, 내 이름을 늘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눈에 흐른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늘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One Response to “권념하시는 하나님(창세기 8:1-5절)”

  1. Gerry says:

    Paula disse:Essa estória é de uma mulher “bem sude8ica&#d221;. Imagine, então, as que não podem casar com o homem que gostam e não podem estudar. Mas o que mais me perturba ao ler esses relatos é a humilhação à qual os palestinos estão expostos pelo comportamento agressivo e arrogante dos israelenses. Parabéns pelo seu trabalho junto a esse povo tão sofrido.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