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03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공동체( 창세기 7:10-16절, 방주교회2)

Posted by on Feb 03 2014 at 02:10 pm

김진환 목사 주일설교

 January 26/2014

Florida 주에 있는 Freedom Ship International 이란 회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인 현대판 노아의 방주, Freedom Ship을 건설하고 있다고 합니다. 약 5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크고 넓은 공간으로 그 안에 학교, 병원, 공원, 쇼핑센터, 카지노는 물론 자체적으로 공항까지 갖추고 있는 수상도시를 건설한다 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McDonald와  Burger King 은 물론 머지않아 한국식당과 교회도 생기게 되겠지요. 그리고 사람이 아프고 죽으면 장례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병원도 그리고 장례식장도 생기겠지요.

 

오를 산이 있는지 자전거 도로도 있는지는 몰라도, 이 배의 길이는 약 1.4km, 폭은 228m 정도며 25층의 빌딩 같은 구조로 이뤄져 있다 고 합니다. 그런데 일년 사시사철 태풍이나 지진 홍수등의 염려가 전혀 없이, 항상 최적의 기후대를 택하여 세계 일주를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짓는다고 하고 미국에서는 가장 큰 배를 짓는다고 하며 서로 경쟁하듯 하는데, 이것 또한 바벨탑을 쌓듯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세계는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놋땅으로 간 가인

지난주에 보신 것처럼 가인은 자기 아우 아벨을 사람들이 없는 들로 불러내 쳐 죽였습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아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계획적인 살인자로서 마땅히 죽임을 당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구워 땀을 흘리며 살아라, 유리하는 자가 되라 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살인죄를 용서하시고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전하라는 전도및 선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이마에 표를 주신 것은,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는 표였습니다. 그 표를 다른데가 아닌 이마에 심어주신 것은 이 사실을 숨기지 말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가인처럼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마에 표를 받으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한 불이익이나 희생의 흔적, 혹은 세상의 방법으로 계산되지 않는 축복의 흔적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인은 이마에 그 표를 가지고 하나님 앞을 떠나 놋땅으로 갔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간 부모님과 함께 거하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부모님과 정든 고향을 떠나 자기 홀로 서야 했습니다. 놋이란 방랑, 유리하다 라는 의미가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처자식들을 데리고 부모 형제를 떠나 방랑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정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 너무 힘듭니다. 당장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거리 구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누가 쳐들어 올지, 처자식들을 해하여도 재산을 빼앗아가도 막을 힘도 방법도 없었기에 그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한 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외부로 부터의 침략이 두려웠기 때문에 집 둘레를 뺑둘러 든든한 담을 쌓는, 즉 성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을 쌓은 그 곳이 방랑생활을 하던 가인의 동네, 방랑자의 동네 라고해서 “놋” 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가인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습니다. 하지만 집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 너무 힘들어 곧 그만둡니다. 이처럼 누구나 처음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길수 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듯이,끝까지 변하지 않고 충성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은 우리들도 예수님께 영원토록 변함없이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인처럼 중간에 변질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께 영원토록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인의 후예 부모형제를 떠난 가인은 놋 땅에서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하겠다” 라는 의미로 에녹이라 합니다. 그에게 이미 자녀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는 그 성을 쌓으면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때 낳은 아들을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짓던 그 성 이름을 자기 아들 이름대로 “에녹”이라 지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처없이 헤메던 가인은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정말 피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였을 것입니다.

 

인구의 도시집중과 범죄 증가

 그 결과 가인의 후손들은 급격히 증가합니다.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범죄행위도 늘어 갑니다. 아담의 7대손, 즉 가인의 6대째 후손 라멕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일부 다처제가 허용되었음을 의미하며, 창세기 2:24절의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라멕은 어느날 자기 아내들을 불러 놓고 “라멕의 아내 아다와 씰라는 들어라.  내가 오늘 사람을 죽였노라. 한 놈은 감히 내게 덤벼들어 치기에 내가 정당방위로 쳐 죽였고, 또 한놈은 어린 녀석이 감히 나를 쳐서 상처를 내기에 내가 그 놈도 죽였노라. 우리 6대조 할아버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칠배로 갚아 주신다고 했는데, 나 라멕이 사람을 죽였다고 보복하려는 놈에게는 하나님이 칠십 칠배나 더할 것이다” 라며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 합니다. 사람들이 가인 때보다 훨씬 더 악해졌다 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라멕은 두 아내들로부터 야발, 유발, 두발가인, 나아마를 낳았는데, 이들은 각각 목축과 예술과 무기와 농기구를 만든 조상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목축은 양 몇마리를 키우는 정도가 아니라 짐승을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으로 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정착하여 목축을 하였다는 것은 음식문화가 육식을 많이하는 쪽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육식을 주로하는 사람들은 초식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폭력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인의 후손들이 포악해져 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처럼 대규모적인 생산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며,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삶은 나아졌지만 하나님이 안계신 마음은 공허하고 무의미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공허함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자연히 술 문화가 발달하고 음악이나 그림을 그리는등 예술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산호세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무기와 농기구와 같은 연장은 이미 그 땅에 전쟁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량생산이 가능해 졌으며, 이는 곧 인구 밀집을 가져오게 됩니다. 인구밀집은 또한 도시가 발달하게하며, 주거지와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 이웃과의 영토 분쟁은 피할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위하여 무기를 생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인의 후손들은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셋의 탄생과 그의 후예

한편 이브는, 온 정성을 다하여 키웠던 맏아들 가인이 실망을 시키더니, 거기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아벨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놋땅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이로써 두 아들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린 이브는 그때서야 자신이 얼마나 끔직한 죄를 저질렀는지, Partiality, 편애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 깊히 깨우칩니다. 그리고 날마다 후회하며 탄식하며 슬피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위로하시면서 또 하나의 아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브는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또 하나 주셨구나 라며 그를 “셋”이라 이름짓습니다. 물론 “셋”이란 “반환”, “대신” 등의 뜻도 있지만 “특별히 구별해서 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믿음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노스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전까지는 공식적이고 규칙적인 예배가 없었는데 이제 비로소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에노스란 “약한자” 혹은 “사람” 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아담의 아들 셋은 일찍부터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셋의 후예에 대한 기록은,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백성들의 흔적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가인과 셋 후손의 차이

가인의 후예들은 일찍부터 한곳에 정착하여 경제, 문화, 예술등을 발전 시켰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힘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해 갔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직업 활동과 문화생활 그리고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에 혼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건설해 가는 매우 희망적이고 발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누가 누구를 “나았다”라는 기록은 있는데 몇살에 “죽었다” 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 이들 후손들에게는 죽었다 라는 기록이 없을까? 분명 악한 일을 저지른 자의 후손들인데, 그리고 그 후손들도 그렇게 끔찍한 죄악들을 범했는데, 이들은 죽지않고 영원히 살았다는 말인가?

한편 셋의 후손들은 어떤 직업이나 문화나 인간 문명의 발달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의 삶이란 그저 자녀들을 낳고 죽는, 종족 번식만 한 무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로 고민하였는데, 기도 하는중 이런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하려면 우선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부활 소망이 없이 그저 정욕대로 살다가 인생의 종말을 맞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한세상,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이 세상, 열심히 모아서 실컷 써보고 즐겨보고 가자 라는 심정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행으로 음악으로 예술로 허무함과 우울함을 달랬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과 예술, 특히 음악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가인의 대표적인 후손으로 6대손 라멕의 가족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라멕은 아내를 둘씩이나 거느리며 인생을 즐겼고, 자기 앞에 거스리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무력으로 제거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웃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개념이 없었기 떄문에 용서와 화해도 없었습니다. 빼앗고 뺏기는 삶,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빼앗는 삶, 오직 정복하느냐 아니면 정복을 당하느냐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가 없이 정복자와 피 정복자의 투쟁만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셋 족속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죽어도 죽지않는다. 다시 살게 된다 라는 마음으로 죽음앞에 순종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원히 살기 위하여 거쳐야 할 하나의 필수적인 단계, 지나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에 불과하다 라며 부활 소망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셋의 후손은 창세기 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셋의 6대손 에녹을 소개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승천한 자의 첫 모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인의 후예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쳐 죽이는, 부활소망을 끊는 역사였고, 셋의 후예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는 부활소망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 세상이 끝이지만, 우리 믿는자 들은 죽어도 삽니다. 죽었다가도 부활하여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딸들

창세기 6:1-4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니라. 4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며 사람들의 딸들은 누구일까 라는 데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냐. 또한 하나님은 아들이 예수님 한분인 줄로 알고있는데, 여기 아들들은 누구냐?” 라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섬기던 셋의 후손들이요 사람들의 딸들은 악을 행하던 가인의 후예라고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결국은 서로 뒤엉켜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셋의 후손들도 결국 하나님을 떠나 자기 눈에 좋은대로 여자들을 데리고 살게 됩니다. 이것은 약육강식과 일부 다처제를 비롯한 성적인 문란한 삶을 암시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않는 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전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죄악된 삶으로 빠져갔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힘센 거인 족속인 네피림이 소개됩니다. 이 네피림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후손인지, 가인의 후손인지 셋의 후손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전쟁용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도 힘센 용사들이 태어났다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힘과 무력으로 지배되는 혼란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시대의 이러한 현상을 소개하심으로써 오늘날 성적 타락, 약육강식, 무력과 금권 통치등 우리에게 말세가 임하고 있음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자 하나님께서는 6절에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중에 오직 사람에게만 영혼을 불어 넣어 주었더니, 오직 이 사람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일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러한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짐승이나 풀이나 꽃을 창조하신 것을 아름답다 하셨는데, 오직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서는 한탄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람들을 짐승들과 함께 모두 쓸어 버리고 새 창조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악한 세상에도 노아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악을 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것입니다. 속히 돌아오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증거하시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를 앞둔 베드로 사도께서는, 당시 로마의 극심한 핍박을 받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베드로 후서 2:5절에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 셨으며” 베드로 사도는, “노아 역시도 여러분들이 현재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듯이 엄청난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the Preacher of Righteousness, 의로움의 설교자, 전도자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는 구하셨지 않습니까?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고 격려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노아 역시도 복음을 전하다가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고 전도를 하면, “이 멀쩡한 날에 무슨 놈의 심판이냐, 이 놈이 평화로운 세상을 혼란시킨다” 며 죽이려고도  하였을 것입니다. 혹은, 너 한번만 그 따위 소리를 하면 너와 네 가족은 끝장이야 알았어? 라며 윽박질렀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사람들은 노아의 전도를 막고 그를 핍박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아 방주교회의 탄생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의인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시며,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원래 옛날 방식으로 목선을 지을 때에는 물위에 띄워놓고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바닥이 세는지, 한쪽으로 기울었는지, 짐을 실었을때 물에 얼마나 잠기는지를 보면서 만들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지금 물위에 띄워놓고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지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십중팔구는 잘못 만들어질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치수대로 목선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창조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사람들은 노의의 방주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잘 지어졌다며 이를 증명하려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짤막한 지식과 과학으로 증명하려다가는 오히려 실수만 보이고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믿을지어다” 라고 하셨듯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드셨는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방주에 대하여 정확한 치수를 주셨지만, 이 사건의 요지를 볼때 치수가 얼마나 정확한지, 방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치를 이렇게 자세히 기록한 것은 “노아의 방주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다,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 것은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그 당시 노아가 사용한 나무가 얼마나 견고하고 단단한 나무였는지는 알수 없지만, 이렇게 길고 넓은 목선은 철근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부러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철근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이 수치대로는 배를 지을수 없었다 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많은 짐승이 다 탔을 때의 무게와 홍수가 났을때 비바람 몰아치는 그 거센 파도를 생각하면 설령 이 목선이 완성되었다 할지라도 곧 파선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다 들어갈수 있으며, 추운 극 지방에 사는 짐승과 더운 열대지방에 사는 짐승이 어떻게 같이 살수 있었겠습니까? 소나 양들은 계속해서 풀을 뜯어 먹어야 하고 새들은 계속해서 벌레를 잡아 먹어야 하고, 뱀들은 여기저기 기어다니면서 개구리 쥐등을 잡아먹고, 호랑이나 사자는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더구나 물이 온 지구에 범람하였으면 바닷물과 민물이 완전히 섞이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바닷 물고기들은 물이 짜지않아 다 죽었을 것이며, 민물고기들은 짜서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조각이 터키 어디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라랏 산이 어딘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일을 오늘날 우리 상식으로 계산하고 증명하려는 것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 내려서 평가하려는 아주 끔찍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증명하고 확인하려는 불순종의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는 누구냐?” 로 시작하여 욥기 38-39장에 걸쳐 장황하게 욥의 무지함을 드러내며 심하게 책망하신 것을 우리는 보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좀 이해가 안간다 라는 대목이 나오면, 인터넷 뒤적거리거나 과학적 지식 대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데, 그까짓 것이 무슨 문제겠느냐, 당연히 그 분께서 하셨다 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는 생명체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배를 만들고 가족과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 마리씩, 부정한 짐승 암수 두 마리씩,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들은 암수 일곱 마리씩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갈 사람들은 물론 짐승들을 찾아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귀를 알아듣던 사람들은 모두 거절하고 알아듣지 못하던 짐승들은 순종하였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도 세계 여려개의 말 뿐만이 아니라 Computer Language도 여러개 아는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사실대로 믿기 매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짐승들 중에도 안들어 가려고 도망치는 놈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넓은 세상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자유롭게 살지 왜 갑갑하고 컴컴한 방주 안으로 들어 갑니까? 짐승들 중에도 눈치 빠르고 약삭빠른 놈들, 세상이 좋은줄 아는 놈들은 안 들어 갔을 것입니다. 아니 들어가서 한번 휙 돌아보고 “휴! 답답해” 하면서 빠져 나왔을 것입니다. 오직 우직한 놈들만 “알았습니다, 들어가기 싫지만 명령에 따라야지요” 하고 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약삭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우직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는 옳지않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내가 순종합니다 라며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불평이 나오고 짜증이 나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꾹 참고 나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 내가 당해야 할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은 나를 위하여서, 아니 나 때문에 그러한 누명을 쓰셨는데도 억울하다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나의 이 조그만 억울함, 오해로 빚어진 조그만 불이익 쯤은 견딜만 하지 않습니까? 아니 견디기 힘들어도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직한 신앙으로 방주속에 들어간 짐승들처럼 말입니다.

마지막 기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짐승들은 모두 방주 안으로 들여 보냈지만, 노아와 그 가족들은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7:10절에 보면 짐승들은 이미 방주안에 다 들어갔고, 7일 후에야 홍수가 땅에 덮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임하던 바로 그 날에, That Day, 노아와 그 식구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7일동안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가? 마지막 휴가를 즐기고 있었을 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 칠일동안 집중적으로 전도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노아는 우선 자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다른 형제들을 찾아가 전도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번 열차가 막차입니다. 이제는 다른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일어나십시오. 잡수실 것 입으실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도 제가 다 마련해 놓았으니 몸만 가시면 됩니다. 지금 저와 같이 가시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시한번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노아의 전도를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노아가 마지막 전도를 간 그 사이 방주안에 있었던 짐승들도 한마리도 방주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 방주교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노아 방주 교회는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과는 분리된 교회였습니다. 볼품없고 불편하고 갑갑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생명을 살리는 교회였습니다. 불평이 있어도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참고 인내하였던 교회였습니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지 아무도 알수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의 불편함과 억울함과 고통을 참고 끝까지 인내한 교회입니다.

 

어떤 분들은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상징합니다, 세상은 홍수로 시끄럽고 다 죽어갔지만, 방주안은 예수님 품안에 있듯이 평온하였습니다” 라고 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좁은 방주 안은 컴컴하고 갑갑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새들은 이리 저리 날아다니고, 온갖 짐승들이 여기 저기서 소리 지르고, 잡아 먹으려고 하고 안 잡히려고 도망치고 난리 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이 지금 같이 섞여있지 않습니까?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조용히들 해, 시끌어서 못살겠다 라고 소리쳐도 어떤 짐승이 노아의 말을 들었겠습니까? 오히려 그의 소리도 소음의 일부가 되어 더욱 혼잡하게만 하였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윗층에 있던 창문 옆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빨리 홍수가 그치기만 기도라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아버지도 우리 어머니도 모두 이 홍수에 돌아 가셨겠네, 우리 형님네도 동생네도 다 죽었겠네 하며 슬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방주교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견딜수 없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지만 문이 닫혔는지라 뛰쳐 나갈수도 없고, 설령 뛰쳐나간다 할지라도 홍수에 비바람에 죽게 됩니다. 교회에 오면 평온할줄 알았는데 에수님의 몸이라 자처하는 교회도 이 문제 저문제에 얽히고 설키고 하여 복잡하고 시끄럽고 짜증납니다.

 

어느 미국 잡지에서 본 이야기 입니다. “얘야, 일어나라, 교회에 가야지” 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깨웁니다. 나 잠좀 더 자고 싶어요. 그래도 교회에 가야지. 나 안가요, 거 아무개 집사 아무게 장로 정말 꼴도 보기 싫어요. 얘야, 그래도 너는 가야지. 왜요, 나도 한번쯤 교회에 안가면 안되나요? 그럼, 다른 사람은 되어도 너는 안돼. 왜요, 내가 누군데요? 넌 우리 교회 담임목사가 아니냐!

때로는 목사들도 교회에 가기 싫다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기 싫다고 교회를 그만두면 어떻게 됩니까? 누구 보기싫고, 누구는 보기만 하면 짜증나고 등 불평하며 교회에 안나가고 싶어도 그렇게 되면, 내 영혼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짜증나고 정말 나오고 싶지 않아도 내 영혼이 살아야 하니까 우리 교회에 불어닥친 비바람괴 홍수가 속히 그치기를 기도하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웬만한 시험거리들은 이겨가며, 웬만한 일들은 덮어주고 덮어가며 점차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숙해 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께서도 고린도 전서 3:1-3절에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라며 분쟁에 휩싸였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훈계하십니다.

너희들은 분쟁을 그치고 이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자라가라, 어떻게 갓난 아이처럼 젖만 먹고 있을 것이냐, 이제는 좀 단단한 식물도 씹어서 소화를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조그만 시험거리라도 생기면 당장에 배탈이 나서 화장실 들랑달랑 하는 모습을 보이면 되겠느냐 라며 책망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병원처럼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에 웃음소리도 나지만 때로는 불협화음도 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 중에 조용한 곳은 죽은 사람들만 모인 공동묘지 뿐입니다. 교회도 병원처럼 아픈 사람들이 모인 곳이며, 교회 안에 생명을 죽이는 병원균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귀신에 들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 가마귀와 비둘기가 공존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 소망교회도 조용한 공동묘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병원과 같은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병원에 병균들이 득실거리듯이 사단의 유혹도 있을수 있습니다. 질병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식구들이 합심하여 기도할때 주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사단이 떠나고 질병이 고침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질병이나 마음의 상처가 있으신 분들, 아픈 곳에 혹은 가슴에 손을 얹으십시오. 우리 같이 기도합니다. 질병이 떠나고 뼈와 근육 조직이 고침을 받도록, 상처가 치유 받을수 있도록 합심하여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고쳐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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