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7
에덴 교회(창세기3_20-24절)
에덴 교회
(창세기 3:20-24절)
January 5/2014
Happy New Year! 새해 첫 주일입니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 가 새해인사의 대세인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예수님 안에서 안녕들 하십니까? 여러분들의 각 가정마다에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늘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큰 교회는 문제가 없습니까? 요즘 보면 큰 교회는 그 규모답게 문제도 크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교회가 건강을 회복하고 생명력을 발휘할수 있는 교회로 변모되어 갈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도하던중,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 암시되고 제시된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찾을수 밖에 없다라는 마음이 깊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George Muller 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여러날을 시도해 보았는데 역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구약을 통하여 암시되고 제시된 10개 교회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깨우치고 도전받고 또한 고칠것은 고쳐가면서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란 어떤 곳인가? 어떤 분들은 예수믿고 교회 다니면 그야말로 만사가 모두 형통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건강이 회복되고 불편했던 부부관계가 회복되며 기울었던 사업이 저절로 일어서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교인들은 모두 착하고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실수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라며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시니까 항상 건강하고 평화스러우며 항상 사랑이 넘쳐야 한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그러려니 하면서도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은 그 시작부터가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고 위협과 핍박이 따르며 고난이 따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과 시련속에서 예수님의 간섭으로 마침내는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나의 지극히 부족하고 연약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이러한 본질적인 것과 또한 교회의 기능이나 사명을 제대로 모르니까 교회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지혜와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어야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나시는, 내가 무릎을 꿇어야 예수님께서 일어서셔서 역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내 스스로가 죽지 못하니까, 주님 나좀 죽여 주십시요, 나의 자아좀 죽여 주시옵소서, 나도 주님처럼 나를 죽이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나좀 도와 주시옵소서 라는 마음으로 오는 곳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신 바울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실행하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교인수가 좀더 늘고 건물을 좀더 잘 짓게되면 성공한 것으로 여깁니다. 회사를 확장하고 많은 이윤을 남겨야지 유능한 사장이라 칭함을 받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세상의 눈을 의식하고 이러한 눈높이를 따라가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소아마비나 비만에 시달리고 병들어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 암시되고 제시된 교회들은 어떤가 살펴보면서 은혜받고 도전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있지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는데 이론에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 여러분 한분한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세를 회복하는 말씀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 최초의 교회, 에덴교회 새해 New Year’s Resolution 으로 성경을 완독하시겠다는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참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척 피니까 어떻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로 성경은 시작되지요?
하나님께서는 빛을 선두로 창조를 시작하셔서, 마지막 여섯번째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 둘째날, 이렇게 여섯번째 날이 이를때까지 6일에 걸쳐 창조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하루가 오늘날의 하루와 똑같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날짜개념은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아직 창조하시기 전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하루와 동일하다고 믿어라는 것은 무리가 좀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아무도 알수 없는 일이며, 논쟁을 할만큼 중대한 문제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영혼이 없는 피조물들을 차례대로 창조하신후 맨 나중에 영혼이 있는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원래 히브리 말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말로써 “붉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어떤 분은 “아담이 황인종이다, 분명히 우리 한국사람이었다” 라고 흥분해 하시더라고요.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한다고 해서 애국하는 것 아니니까 여기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녀의 구분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맨 처음사람 아담은 아직 남녀의 개념이 없는 그저 “사람”이라는 중성명사입니다. 그 후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이 않아, 즉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않아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후 그 갈빗대를 빼어 이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이브를 보고 너무 좋아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라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아담이 이브를 여자라고 부르면서 비로소 남녀의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남자가 먼저 창조된 것을 강조하시면서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할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원적으로만 따진다면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하튼 원래 아담은 분명히 영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빼어서 이브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브에다가는 생기를 불어 넣었다 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중세 신학자들 까지도 “과연 여자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가 중요한 논쟁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저는 여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영혼이 들어갔는지, 남자를 통하여 들어갔는지 하나님께서 남자 몰래 넣어 주셨는지는 몰라도, 여자들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믿으니까 여자분들 안심하십시오.
에덴교회의 시작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셔서 그들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각종의 맛있는 실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여러 나무들에 달린 맛있는 열매들을 따 먹되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마라. 네가 그 열매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경고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 있는 많은 종류의 열매를 따 먹으며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들, 죄의 개념조차도 몰랐던 그들, 맑은 물보다도 더 맑고 청결하였던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지내면서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아담과 이브, 즉 하나님을 믿는자들이 한데 모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행하는 것,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교회가 아닙니까?
이처럼 인류 최초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 부부를 데리고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구태여 이름을 부치자면 에덴 동산에 세워졌으니까 에덴동산교회, 혹은 에덴교회가 되겠지요. 물론 오늘날 한국에도 그리고 미국에도 에덴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새 에덴교회도 있습니다만 성경에서의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여 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인류 최초의 교회, 에덴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교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으로 풍족하게 지냈습니다.
더 큰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다가 받는 갈등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이브는 자기 남편 아담에게 실망을 하였나 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부족하였고 무엇때문에 실망하였는지는 몰라도 남편의 무능력에, 특별히 영적인 무능력에 고민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영적으로 좀더 깊은 체험을 하고 능력을 받아 가족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오늘날 많은 아내들의 바램이자 기도제목이 아니겠습니까?
여하튼 뱀은 어떻게 이브의 그러한 마음을 읽었는지 이브에게로 슬근슬근 접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고 넌지시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있던 뱀은 이미 “No”라는 답을 기대하고 이렇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뱀은 이렇게 이브로 하여금 대꾸를 하지 않을수 없도록 치밀하게 준비하여 유혹한 것입니다.
뱀이 그렇게 묻자 뱀이 예성했던 대로 이브는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다른 것은 먹어도 괜찮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그 과일을 먹으면 죽는다고 했데!” “아니야!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도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질 줄 하나님께서 아시고 못먹게 금하신 것이야. 그러니까 한번 먹어봐” 라며 뱀은 유혹합니다.
뭐라고! 내 눈이 하나님처럼 밝아져? 이브는 정말로 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영적으로 갈급하고 영적으로 능력도 받고 싶었는데, 이것 정말 횡재아닙니까?
그래서 3: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였습니다. 과일이 정말 예쁘기도 하고 맛있게도 생겼고, 또한 그것을 먹으면 영적 능력도 받을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른따서 먹어봅니다. 그리고 “여보, 이것좀 먹어봐. 이 것 먹으면 똑똑해진데, 이것 먹고 능력좀 받아봐, 그래서 좀 더 능력있는 남자가 되어봐요” 하면서 자기 남편에게도 갖다 줍니다.
물론 바울사도께서는 죄가 이브를 통하여 들어왔으니 여자는 남자 앞에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이브가 참 착한 아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된다는 그 말 한마디에 영적으로 갈급했던 그녀는 그것이 죄가 되는 줄도 모르고, 오직 그것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게됩니다. 그런데 그것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를 하셨는데, 정말로 남편이 먹고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우나 싫으나 하나밖에 없는 남편인데. 그래서 정말 죽는가 안죽는가 우선 자기가 먼저 시식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먹어도 안죽거든요? 그래서 안심하고 자기 남편에게도 준 것입니다. 얼마나 희생적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내입니까?
요즘 여자들 같았으면 자기가 남편보다 더 똑똑하고 더 지혜롭게 되고자, 남편 몰래 혼자 다 따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자잘못과 비리를 다 밝히면서 남편의 하는 일 사사건건 시비걸고 잔소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창조하신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일 여자를 먼저 창조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여기는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이 부분은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라며 주문이 많았을 것 같고, 그러면 남자를 괴물로 만들수 있었지도 않겠느냐. 그래서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것이다” 라고 하시던데 그것은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은 사람들의 우스개 소립니다. 사실은 아담도 물론 갈빗대 뺄때 아프니까도 그렇지만, 여기는 좀 더 작게 저기는 좀더 크게 하면서 훈수를 하게 될까봐 하나님께서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것입니다.
여하튼, 이 사건을 남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브는 남편 내조를 끔찍하게 잘 하는 참 좋은 여자요 참 훌륭한 아내라 생각됩니다. 정말 세상 여자들이 이브만 같아도 이혼 할 남자 없을것 같은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핑계와 분쟁 이브와 아담은 정말 큰 기대감에 선악을 알게하는 과일을 따 먹었는데, 이거 어쩐 일입니까? 그 열매를 먹고나니 약효가 금방 나게 됩니다. 지혜가 생겨서 엄청나게 현명한 사람들이 되는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당장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 수치심을 느끼며 얼른 무화과나무의 잎을 따서 엮어 자기들 몸의 부끄러운 부위를 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책감에 시달려 숨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자라면서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먼저 배우는 것 같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개를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히려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로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이꼴이 되었지 않습니까? 내가 저 여자와 같이 살기 전에는 하나님 열심히 잘 섬기며 순종하였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저 여자를 아내로 주어서 내가 오늘날 믿음도 다 까먹고 이 지경이 되었지 않습니까? 이게 다 저 여자와 함께 살게한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이브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세상에 내가 저런 남자를 믿고 살았다니……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아양떨며 결혼하자고 애원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뭐? 나 만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도 무능하기에 출세좀 시켜 보려고 내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좋은 것 먹여 놓았더니, 감사하고 고마워하기는 커녕 뭐 나 때문에 인생 망쳤어?
이러한 자기 남편 아담을 향한 이브의 실망과 분노는 창세기 4장에 나타납니다.
이처럼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던 에덴교회에 영적인 문제로 분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서로 헐뜯고 끌어 내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잘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이 그만 도를 넘고 시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좀더 은혜스럽고 사랑이 넘치고 건강해 질까? 라며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서도 서로 의견이 대립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분쟁을 그치고 곧바로 회개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담과 이브처럼 서로 핑계대고 다툽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전, 예배당 안에서도 서로 손가락질 하며 고성이 오가기도 합니다.
자기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러 교회에 오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 주장을 펴기위하여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는 억울함을 참고 넘어가기 힘들어 “주님! 주님은 아시지요?” 흐느끼며 주님의 위로를 구하는 곳이 교회인데, 상대를 짓눌러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목소리 높은 사람이 이기는 곳이 아닙니다. 논리 정연하게 자기 주장을 잘 펴는 자가 똑똑한 자가 아닙니다. 집사고 장로라고, 직책이 높다고 큰자가 아닙니다. 구두 굽을 높히며 꼿꼿하게 서있는 사람이 큰 자가 아닙니다. 앉아서 명령하는 자가 큰 자가 아닙니다. 더 낮아지려고 무릎을 꿇는 자가 큰 자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받는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부부에게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랬더라면 우리 인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에덴동산에서 에덴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과 즐겁게 살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는 열심히 일하여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라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스스로 땅을 파고 경작하여 생계를 이끌어 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더욱 크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부족함이 없이 사랑이 넘치던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면서 두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첫째는 재정문제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었는데, 이제는 열심히 일해서 교회 재정을 채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늘 부족하여 조마조마하며 힘들게 살게됩니다.
그리고 전도의 길이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출산의 고통이 더욱 커졌듯이, 한사람 전도하기가 그렇게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도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키웁니다. 하지만 시험에 들거나 분쟁을 일으키게되면 열심히 봉사했던것, 전도했던 것 다 까먹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원리원칙을 세워놓고 그릇된 일들은 파헤쳐서 만 천하에 드러나게도 해야되는 일도 있지만, 덮을 것은 덮고 포용할 것은 포용하여 분쟁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분쟁이 없을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분쟁이 없을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참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상처를 싸매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옷 본문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들의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시고 가죽 옷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옷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성령을 덧 입는 것을 상징합니다.
물론 가죽옷은 무화과나무 잎보다는 강합니다, 하지만 영구적은 아닙니다. 아무리 튼튼한 가죽옷일지라도 언젠가는 찢기고 닳아집니다. 혹은 스스로 벗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벗어두면 다른 사람들이 훔쳐 갈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서는 날 때부터 온 몸에 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짐승가죽으로 된 외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성령의 두루마리를 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상속자임을 상징합니다.
그에 반하여 그의 동생 야곱은 털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죽 외투가 없습니다. 그래서 형의 가죽외투를 훔쳤습니다.
자기가 형 에서인 것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염소를 잡아 손에 두르고 형의 외투를 훔쳐서 입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갑니다. 아버지 이삭은 눈이 멀어서 앞이 잘 안보입니다. 아버지가, 내 맏아들 에서야 이리오라 고 하자 야곱은 애써서 에서 목소리를 내며 “네” 합니다. 이리와서 보자, 내 맏아들 같으면 팔뚝에도 털이 많은데 어디 만져보자. 야곱은 염소가죽으로 두른 자기 팔을 내 보입니다. 그러자 이삭은 야곱에게, “참 이상하다, 팔은 만져보니까 내 맏아들 에서 같은데 목소리는 속임수 많은 야곱 이놈 같도다” 그러면서 이삭은 야곱이 입은 외투에 냄새를 맡아 봅니다, 그리고는 그가 맏아들 에서인줄 알고 그에게 상속권 축복을 합니다.
우리는 바로 야곱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원래 몸에 털이 없는 존재, 상속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아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염소의 가죽을 벗겨 팔에 두르고 에서의 외투를 훔쳐입고 가서 상속자 축복을 받아 내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벗겨진 옷이 바로 우리의 외투가 된 것입니다. 병정들이 예수님의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완전히 다 벗겨버린 것은, 예수님의 그 옷이 바로 우리의 죄악으로 물든 맨살을 덮어줄 외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죽, 즉 예수님의 속옷과 겉옷을 두르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것을 돌감람나무가 믿둥이 잘리고 그 위에 참 감람나무가 접붙혀 진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감람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이해가 안가니까 감나무로 비유해 보면, 우리는 원래 홍시 감나무가 아니라 땡감나무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의 자아가 믿둥까지 싹뚝 잘리고, 그 위에 예수님이 접붙혀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뿌리는 땡감나무이지만 열매는 홍시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고 하였듯이, 예수를 믿어도 성격이나 삶에 변화가 없으면 아직도 땡감나무 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땡감나무인 나에게 홍시가 접붙여져 땡감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탐스런 홍시가 열리는 홍시 감나무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땡감나무인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위에 접붙혀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대로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부의 질서 그런데, 본문 20절을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하였습니다. 19절 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브와 아담을 징계하신 내용인데, 갑자기 문장흐름에 맞지않은 20절 말씀이 중간에 끼인 것처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20절은 부부간의 관계를 결정지어주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끼어드는 문장이 튀어나올 때는 앞으로 나올 중요한 사건에 대한 예고입니다.
아담이, 즉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 이것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짐승들의 이름을 누가 지었습니까? 아담이 지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지어 주신 것은, 너는 내것이다, 즉 네 목숨은 네것이 아니라 내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수 있는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큰 범죄행위 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짐승들은 아담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짐승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결과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하와라고 이름을 지어줌으로 인하여 남편과 아내의 위치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이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함을 하나님은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4장은 하와의 반란, 남편 아담의 침묵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아담과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께서 에덴 교회를 더이상 간섭하지 않으셨고, 그냥 침묵하셨다는 슬픈 이야기 입니다. 회개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가정이나 그러한 교회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질서에 진정으로 회개하며 순종하는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예수 소망교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22-24절은 하나님의 징계 같지만 실제로는 넘치는 은혜입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 내셨지만 그 동산을 폐쇄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간 에덴 동산에서 편히 살았는데, 이제 에덴 밖에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살면서 아이들도 낳고 키워 보아라. 그러면서 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회개하여 다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권면이자 은혜 였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 자기 집처럼 그냥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 문이 있어, 반듯이 지키는 자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키는 자가 신약에 와서 구체화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통행증이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야지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는 통행증이 발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락원, 낙원에서 추방된 에덴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몸된 청결한 교회로 거듭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미 실족하였지만 거기서 그대로 주저앉지 말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들어오라고 하나님은 권고하셨습니다. 자녀가 잘못을 하였으면 물론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이해 시켜서 자신의 잘못을 위루치고 용서를 구하게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브의 반란 하지만 창세기 4장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4장1절에,“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이브는 남편 아담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하는 말이 “I have gotten a man from the LORD” 이 아이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무력으로 입성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망대로 대장간, 정복하다 라는 의미의 “가인” 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내를 주었고, 남편은 그녀를 하와라 이름지음으로써 하와는 남편에게 순종을 하여야 하는데, 하와는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에덴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에단동산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의 용서로 들어가야 하는데,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정복하고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에덴교회를 비웃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 교회에는 이러한 잔재가 없습니까? 많이 배우고 돈많고 권세있다고 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면 세상의 기관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브는 가인을 어서 키워서 힘을 배양하여 그를 통하여 에덴동산에 입성하려고 가인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브는 가인에게 대단히 실망을 하였나 봅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으로 다시 들어가고자 하는 꿈도 접었던 것 갔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브는 또 하나의 아들을 낳습니다. 남편에게 실망하고 맏아들에게 실망하였는데 또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2절에“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브는 둘째 아들을 낳고, 이 쓸모없는 것, 정말 허무하구나, 아무 짜ㅓㄱ에도 쓸모없이 이 사내자식들 하며 탄식합니다. 그리고 그의 탄식이 바로 그의 이름, 아벨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오손도손 아름답고 즐겁고 사랑스러웠던 에덴 교회가 왜 이렇게 탄식하며 쇠잔해 졌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물론 근본원인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닥친 고난에 회개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난함으로 인하여 교우들간의 신뢰가 깨졌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기 방법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다가 결국은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무엘 상 15:22-23절에“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혹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곧 용서를 구하십시다. 그리고 진정한 화개로 실낙원같은 비극은 재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