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05

확신을 가지고 기도(열왕기 상 18:30-40절)

Posted by on Dec 05 2013 at 01:24 am

                      확신을 가지고 기도(열왕기 상 18:30-41절)
                                                                                                                                                    December 1/2013

오늘은 엘리야처럼 기도하라 그 네번째, 엘리야처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하실 때 얼마만큼 확신을 가지고 하십니까?
꼭 이루어 질 것으로 믿고 기도하십니까?

사도행전 12: 5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전도를 하다가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자 온 교회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갇혀있던 감옥에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당시 베드로처럼 특수 죄인들은 간수가 양쪽에 서서 죄수의 양 팔에 자기들의 한 팔씩 수갑으로 채운 채로 굴속같은 감옥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화장실에 갈 때에도 세사람이 같이 가서 양편의 간수들이 죄수의 허리띠를 풀어 주어야 볼일을 볼수 있었습니다.
밥 먹을 때에도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간수들이 떠 넣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때에도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워서 자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2:7-10절에“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수갑을 찬채 간수들과 함께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천사가 나타나 자기를 깨운 것입니다.
그러더니 간수들은 아직 깊은 잠을 자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자기를 채운 수갑이 스르르 풀립니다.
양 팔이 풀리자 조용히 일어나 천사의 인도를 따라 감옥 문 쪽으로 가니 소리도 없이 감옥 문이 스르르 열립니다.
감옥 문을 지키던 간수들도 모두 졸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삼엄한 경비 속의 감옥을 태연히 걸어나오게 됩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신기하여 꿈인 것으로 착각하였는데 감옥을 빠져나와 예루살렘 시내로 들어서니까 비로소 꿈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까지 앞서가던 천사는 이미 사라진 후였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하나님께 고맙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교인들에게 고마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교인들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대문을 두드리는데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나왔다가 베드로인줄 알고는 너무  기뻐서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서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합니다.
로데란 좀 모자라는, 어리숙한 그런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왔으면 얼른 문울 열어줄 것이지, 그 이름대로 좀 어리숙했던 그녀는 “베드로 사도가 지금 밖에 섰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구 이 등신아 베드로 사도는 지금 감옥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네가 어떻게 보았다고 그래, 기도나 방해하지 마”하면서 계속해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더욱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립니다.
그 때서야 저들이 나와서 베드로인줄 알고서는 무척 반가와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확신이 없는 기도도 들어 주시는데, 확신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얼마나 더 확실히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의심을 버리고 확신에 찬 기도를 하실수 있는 확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신 것처럼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사생결단을 준비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이 쌓은 제단과 그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관망합니다.
바알 제사장 450명 아세라 제사장 400명 도합 850명은 바알바알 하며 큰 소리로 자기 신을 부리며 더러는 자기 몸을 칼로 그어 피를 줄줄 흘리며 발악을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는 커녕 구름한점 없이 맑고 푸릅니다.
그들은 불안해져 갔습니다.
자기들의 제단에는 아무런 징조가 없는데, 만에 하나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내려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점차 초조하고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그들을 응시하며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반듯이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을 쌓습니다.
그런 다음 제단 주변에 뺑둘러 물도랑을 깊이 내고 그 제단위에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물이 도랑에도 가득합니다.
그래도 더 부어라 고 엘리야는 말합니다.
그러자 제단의 제물에 부은 물이 흘러 넘쳐서 제단 밑의 깊게 판 물도랑에도 물이 철렁 철렁 넘칠듯 합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시되 불로 응답해 주실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불이 제물은 물론 도랑의 물까지 다 태워버릴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바알 제사장 450명 아세라 제사장 400명 도합 850명 1700개의 눈들, 그리고 이 광경을 보려고 몰려온 수많은 백성들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가운데 확신에 찬 기도를 합니다.
모인 모든 무리가 다 확실히 들을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그는“주여 불을 내리셔서 이 제물을 태워 주소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기도를 안들어 주시면 나는 죽습니다”라고 애원하지도 하나님을 협박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에 계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나는 하나님의 종이요 내가 지금 하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줄 이 백성들이 알게 하옵소서, 그간 바알 우상에 눈이 멀었던 이 백성들의 영적인 눈을 여셔서 하나님을 볼수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의 경우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라 비판과 조롱을 받으며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할 판국입니다.
그러한 위험하고 절박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떨림이나 주저함 없이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승리에 도취된 채 큰 소리로 선포합니다.
그는 왜 어떻게 이처럼 확신에 찬 기도를 할수 있었을 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처럼 확신에 찬 기도를 할수 있을 까요?

우리도 엘리야처럼 확신에 찬 기도를 하려면 첫째,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절에“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듯이 우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으시지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자, 존재하지도 않는 자에게 어떻게 무슨 부탁을 한단 말입니까?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큰 능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일단 죽고나면 자신의 장례도 스스로 치르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의 짐 이되어 묻히게 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맞지 않습니까?
죽은 자가 어떻게 스스로 자기 장례식을 치를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2:27절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산을 움직이시고 죽은자도 살리시는 하나님,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나의 주인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은 Reworder,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겪는 고통과 아픔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린 희생에 하나님께서 반듯이 보상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피 땀흘려 모은 돈, 정말 피가나는 돈을 하나님 몫이라 하여 십일조를 아낌없이 바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줄 믿고 먹을것 줄이고 쓸것 아껴서 정말 희생의 헌금을 하는 것 아닙니까?
또한 그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 전 재산을 헌금하는 분도 계시고, 잘나가는 직장 그만두고 전기불도 안들어 오는 선교지에 가서 평생을 바치는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벌써 수년 전의 일이 되었는데, 아프리카에 26년동안 선교하시다가 몸이 너무 쇠약해져서 하는수 없이 돌아오신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26년 만에 처음 고향땅을 밟으신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와 보았자 집이 있습니까? 모아놓은 재산이 있습니까?
그런데 자기 동기들은 큰 교회 담임목사들로서 서울에서 좋은 집에 좋은 차 굴리면서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사람들 보면 후회나 아쉬움은 없느냐고 물었더니,“난 저 천국에 더 큰 집이 있지 않습니까? 난 나의 삶에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손수 마련해 주신 저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유혹과 미련을 이겨내시는 선교사님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한 것, 물질 뿐만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 지식 이 모든 것들도 다 보상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께 드린것, 주님을 위하여 포기하고 희생한것들 이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하면 저 천국에서 더욱 좋은 것으로 보상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두가지의 확실한 믿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희생을 보상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때 비로소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구할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분이심을 체험적으로 믿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심지어는 가마귀를 통하여서도 먹여 주시고 입혀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늘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가뭄에 양식이 다 떨어지고 밀가루 한줌 밖에 없었던 사렙다 과부에게 가서“그것 내게 먼저다오 그러면 네 양식이 핍절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구 할수 있었습니다.
“이 정신나감 사람아, 구걸을 하려면 부잣집으로 가야지. 벼룩의 간을 내먹고 말지”라는 책망과 창피를 감수하면서도 그는 담대하게 그것 내게먼저 가져와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많은 군중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반듯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심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위한 희생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보상해 주실줄 믿으십니까?
그러면 지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반듯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확신에 찬 기도를 하려면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해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나와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호렙산에 간 틈을 타 백성들이 아론을 협박하고 꼬드겨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네 백성들이 범죄하였노라 내려가라고 하셔서 모세가 급히 내려와 보니 백성들은 그 금송아지를 놓고 음란하게 만지며 절하고 춤추고 난리입니다.
화가난 모세는 두 돌판을 금송아지에 내리던져 깨 버리고 백성들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이 사건이 있은후 33:1절부터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축복을 모두 다 주겠다. 가나안 땅도 주겠고, 거기에 살고있는 아모리 족속, 모압족속, 암몬족속, 여부스 족속들도 모두 네 종으로 주겠다. 그러나 너희와 같이가지는 않겠다 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희의 아비가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 내가 친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려고 하였는데, 너희가 워낙 완악하여서 자칫 내가 진노하여 너희들을 다 죽일수도 있겠다. 그러니 내가 주기로 한 약속의 땅도 주고 그 외적도 다 물리쳐 주겠지만 너희들하고는 같이 안가겠다 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너무도 황당하여“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모세는“호렙산에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를 알되 얼굴로만이 아니라 목소리와 심지어는 내 이름까지 알고 계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라며 항의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입니다. 제발 저희를 떠나지 마시옵소서. 저희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가나안 땅이든 무엇이든 그 어떤 축복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애원합니다.

이처럼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는 갓나은 아이와 엄마의 관계처럼 절대적입니다.
갓나은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울다가도 곧 그치지요?
하지만 아무리 달콤하고 맛있는 사탕도 엄마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손에 달콤한 사탕이 쥐어져 있다 할지라도 엄마 품에 안기든지 엄마 등에 엎혀야 그 사탕도 맛이있는 것이지 엄마가 안보이면 그 사탕 내 팽개치며 울어댑니다.
이처럼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는 갓난 아이와 엄마의 관계처럼 잠시도 떨어져 있을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이었습니다.

한편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안전하고 마음껏 뜯어 먹을수 있는 좋은 풀이 있으며 마음껏 마실수 있는 맑은 시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고 하였는데, 이리 떼가 오면 막대기로 막아 주고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만 따라다니면 먹을것 마실것 걱정, 건강걱정, 나라걱정, 장래문제 걱정 하나도 안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관계였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택된 종임을, 자기 임의대로 할수 없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임을 알았습니다.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종은 자기 인생을 계획할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주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주인의 삶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신의 Master, Lord, 주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제가 아는 집사님 한분은 기도하실 때“아버님! 오늘은 참 좋은 일이 있었어요.
아버님, 죄송해요. 아까전에 화가 날 일이 있어서 그만 혈기를 참지 못하였어요.
아버님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이렇게 기도합니다.
심지어는 대회 대표기도 때에도 “아버님, 오늘은 큰 대회로 모였네요. 축복해 주세요. 아버님, 은혜 많이 내려 주셔서 모인 저희가 많은 은햬받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십니다. 연세도 많으시고 또한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신데도 이처럼 천진하고 정말 자기 친 아버지께 이야기하듯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하실때 하나님을 어떻게 누구라고 부르십니까?
그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분으로 여겨지십니까?
형님 나좀 도와 주세요 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주인님, 하명 하옵소서 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아버님, 아버님이 옆에 계시니까 제 마음이 참 편안하고 좋네요. 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느냐, 즉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가 바로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늘에 게신 아버지라고 밖에 부를수 없다면 그 분은 아직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적어도 내 아버지, 내 어머니 혹은 나의 신랑이라는 느낌이 와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아버지가 참 힘들게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법률가가 되어 집안을 일으켜 세워 보라며 루터를 법률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12살때 친구와 함께 나란히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옆에있던 친구가 그 벼락을 맞아 죽게됩니다.
자기가 자기 친구쪽에 있었으면 그 벼락에 자기가 죽었을 것 아닙니까?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자기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갑니다.

아버지는 영 못마땅해 하였지만 어머니는 루터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신부 서품을 받던 날, 큰 파티를 열었습니다.
신학교 교수들들과 신부들 그리고 많은 하객들이 모인 그 경건한 자리에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한채 파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루터는 후에 이런 말을 합니다,“나는 하나님 아버지는 싫습니다. 차라리 하나님 어머니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처럼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않은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도 되고 어머니도 되십니다. 나의 신랑도 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끌리는 대로, 자신이 체험한 대로 부르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먼저 점검해 보십시오.
혹 불편한 관계는 아닌지, 부끄럼이 없는 관계인지 살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누구라 부르고 싶으신지 생각해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골방 기도 하실때 막연한 하나님이라 부르시지 마시고, 다윗처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할 산성이시요, 나를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는 나의 목자님이라 불러보십시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처럼 하나님을“나의 참 신랑되신 하나님!”이렇게 부르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확신에 찬 기도를 하려면 셋째, 의심이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고 또한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하면 그때에 비로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쭈여, 믿씁니다  라고 소리치는 것은 확신에 찬 기도가 아닙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볼때 그것은 불안과 혈기를 참지 못하여 내 뱉는 고함소리입니다.

의심이라는 헬라어 Diakrinovmenos”(디아크리노메노스) 는 두개를 다 믿는 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안 믿는 불신이 아니라, Dia 즉 두가지를 다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콩코드 뒤쪽으로 Diabola 산이 있지요?
Devil,  악마라는 단어가 바로 Diabola 에서 왔습니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그 산 이름이 악마의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Diabola 라는 원뜻은 둘로 나누다, 갈라놓다, 그리고 이간질하여 갈라놓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사단, 악마는 도깨비 탈을 쓰고 우리를 잡아먹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여 갈라놓는 것, 가족 친구들의 관계를 갈라 놓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분열되어 싸우는 것도, 부부가 이혼하는 것도 성경적으로 본다면 Diabola가 이간질하여 사이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한편 의심이라는 헬라어Diakrinovmenos(디아크리노메노스) 도 둘 사이를 경쟁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다 라는 것도 믿고, 또한 응답 주시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도 믿게끔 이 둘사이를 경쟁시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도 믿고 거짓을 말한다는 것도 믿는다는 이 두가지의 믿음을 내 마음속에서 서로 경쟁시킵니다.
이처럼 의심이 생기면 이 두가지의 믿음이 내 마음속에서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이 생기면 있었던 평안도 빼앗기고 초조하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불신이 아닙니다.
믿음인데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의심은 불신보다도 더욱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생길때 이 의심이 사라지도록, 의심을 갖다주는 Diabola 사단을 물리쳐 달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나를 무엇 때문에 사랑하신다는 거야? 그러한 의심이 가면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0-11절에“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배가 고파 우는데 먹지못할 돌맹이를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타임지에 실린 사진 한장, Afganistan의 한 가게에서 배고파 우는 아들을 위하여 주인이 지켜보는데도 우유를 훔쳐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아버지, 그 두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습니다.

스바냐 3: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세상은 나를 못생겼다는 둥, 키가 작다는 둥, 무식하다는 둥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이 벅차는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줄 아십니까?
자기 아들이고 자기 딸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첫 애가 테어나니까 참 예쁘더라고요.
누가 뭐라고 하든 우선 나를 닮은 내 딸이니까 더욱 신기하고 예쁜것입니다.
어서커라 어서커라 하면서 자꾸만 젖을 먹여 주니까 살이 좀 쪘던 모양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살쪘다고“Oh, Fat Joe!” 라고 하는데도“아이고, 너는”하면서 우리 아이가 살찐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서너살 되어서 젖 살이 다 빠진 후에 옛날 갓난 아이때 사진을 보니까 정말 볼이 이만하고 턱이 두개입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이는것은 내 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예쁘고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고 딸이기 떄문에 우리들을 바라 보시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아빠 이것좀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두리뭉실하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께 구할 것은 정확하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여호수아처럼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라고 확신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구하십시오.
태양을 항하여 달을 향하여 구체적인 명령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물고 달이 야알론 골짜기에 그대로 멈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대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처럼 담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Diabola, 참된 믿음을 빼앗고 의심으로 갈라놓는 사단에 속지마시고 엘리야처럼 확신에 찬 기도를 하십시오.
지금 기도하십시오.

태양을 멈추고 달을 멈추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흐르는 모든 걱정 불안 근심 우울증을 멈추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태양을 멈추고 달을 멈추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가정에 집안에 흐르는 모든 저주의 맥을 완전히 멈추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멈췄던 태양과 달을 다시 돌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저주대신 축복의 강물이 흐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태양을 멈추고 달을 멈추신 하나님께서는 걱정 근심 좌절대신 기쁨의 강물이 넘쳐 흐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앞에 산처럼 감당하지 못할만한 장애물이 있습니까?
지금 그 산 같은 장애물을 향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금 들리어 바다로 던져지라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큰 산이 바다에 던져져 사라지듯이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지고 여러분들의 앞 길이 시온의 대로처럼 확짝 열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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