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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03/2013
오늘은 엘리야처럼 기도하자 세번째로써 “올바른 기도”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같이 나누시겠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 상 18장은 갈멜산의 대결이라는 제목이 붙을 만큼 유명한 구절로서 이미 여기에 대한 설교도 여러번 들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 속에서 바알 제사장들의 기도와 엘리야의 기도는 무엇이 어떻게 달랐는지 보시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약할 당시 이스라엘 왕 아합은 수시로 처들어와 나라를 혼란시켰던 북쪽 아람을 견제하고자 지금의 레바논 땅 시돈과 동맹 협정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 드리게 됩니다. 아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왕국 유다왕 여호사밧하고도 동맹 협정을 맺고, 자기 딸을 유다왕 여호사밧의 며느리로 줍니다.
한편 시돈은 바알 숭배의 본거지 였고, 이세벨은 바알 숭배에 특별히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합 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기나라의 바알 제사장들도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알 제사장들을 통하여 전 국민들에게 바알 숭배를 촉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심하게 박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고, 엘리야 선지자도 The most Wanted, 최고의 지명수배자가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엘리야 선자자는 “아합왕을 찾아 바알 제사장들과 대결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숨을 걸고 아합왕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왕의 명으로 바알 제사장들을 상대로 영적 전투를 벌리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뜻밖에 아합왕은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아합왕은 그 싸움에서 엘리야가 바알 제사장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한데, 그렇다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엘리야를 제거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 450명과 영적 대결을 하게 됩니다. 대결 방법은 제단에 제물, 즉 지금 막 잡은 짐승을 올려놓고 자기가 섬기는 신을 불러 제단에 있는 그 제물을 태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자기가 부르는 신이 하늘에서 불로 임하여 제단에 있던 제물을 태우면 그 신은 참 신이요 그렇지 않으면 거짓 신이다는 것입니다.
우선 바알 제사장 450명은 아침 일찍부터 바알 제단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바알 바알 하며 바알 신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시간 두시간 세시간을 그렇게 열심히 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성질 급한 몇명 바알 제사장들은 자기 몸에 칼로 상처를 내며 소리높혀 바알을 불렀습니다. 여러분 생각헤 보십시오. 450여명의 바알 제사장들이 바알 바알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뛰고 더러는 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저녁 소제를 드릴 시간, 즉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바알을 부르며 소리를 지르고 광적으로 날 뛰었지만 제단은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이 어떻게 응답 할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포기하였고,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우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 즉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옛날 아브라함 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칭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백합니다. 자신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에 따라 사는 존재, 그리고 지금 현재 이렇게 제단에 제물을 놓고 바알 제사장들과 내기를 하는 이 자체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Answer me, O LORD, answer me, so these people will know that you, O LORD, are God, and that you are turning their hearts back again. 주여, 나의 이 기도에, 나의 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소서. 그리하여 여기있는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바알에게 빠진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였습니다. 제단의 제물 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태웠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명실공히 증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 제사장들은 백성들에 의하여 무침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 예수 믿는자들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구하여야 합니다. 이 영적 전투에서 바알 제사장들이나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선별하여 놓는데 까지 한 일은 똑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겉 모양은 같다 할지라도 바알 제사장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그 제단을 쌓았고 바알의 이름으로 구하였으나,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제단을 쌓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태나 순서는 타 종교와 거의 비슷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를 가는 것이나 모슬렘 사원을 가는 것이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것 모두 겉 모양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누구를 섬기느냐, 누구의 이름으로 구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끔찍하게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든지 다른 신을 믿고 살든지 일하고 밥먹고 잠자는 것은 다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이름으로 구하여야 겠습니까?
얼마전 작고하신 작가 최인호씨가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참 은혜스럽다 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그 명령을 어기고 구태여 엿장사라고 하였을 까? 하며 반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분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바로 엿장수와 엿판위의 엿과 같은 관계라는 신앙 고백을 하신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나의 엿장수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반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 이십니다. 어떤 분은 세상 남자 하나도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참 신랑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나의 형님이시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그렇게 하실지라도 기도 할 때에는 “나의 엿장수 되시는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23-24절에“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할때 다른 이름으로 구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하실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구태여 다른 명칭으로 하시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기도를 그 간구를 꼭 들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선 , 예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구하는 것이 나 개인적인 유익과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두 팀이 경기를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자 한 팀은, 하나님, 우리 팀이 꼭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른 팀 역시도, 하나님 이번 경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팀이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 전서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키신 일들을 이루어 가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 필요한 것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 지혜,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도록 힘과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은 것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실때 무작정 나의 필요만을 놓고 기도하지 마시고 우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동의하시는 내용인지 생각해 보시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반듯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우리 예수 소망교회를 축복해 주시옵고 날로 모이는 숫자와 구원받는 숫자가 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 오다가, 기도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해 왔는데 왜 아직도 교회는 크게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까? 제가 아직 더 큰 무리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혹시 아직도 제가 다루어져야 할 문제가 남아 있습니까? 제가 고쳐야 할 부분은 무엇이며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어떤 것들입니까?
무작정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혀드리는 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구하는 것을들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둘째, 예수님의 권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 이름도 아십니다. 하지만 나와 예수님의 권세는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국회의원 선거하는 것 보니까, 좀 약하다 싶으면 그 자리에 대통령을 초대하더라고요. 대통령이 못오시면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걸어놓고 선거 유세를 하더라고요. 무슨 의미입니까? 나도 능력있는 사람이지만, 난 특별히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공약하는것 대통령이 서둘러 지키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믿어도 됩니다. 그러니 나를 찍어 주십시오. 그런 의미 아닙니까?
수년 전에 제 친구목사님이 박사논문을 쓰려고 한국에 나가 국회도서관에 갔었더랍니다. 그런데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못들어가게 하더랍니다. 국회 도서관에 비치된 책을 보려고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노라고, 곧 돌아 가야 한다고 통 사정을 하여도 안되더랍니다. 그래서 당시 여의도 순복음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이 도서관에 한마디 하니까 무사 통과더랍니다.
이처럼 이름은 권위와 신분, 존재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권세와 Dunamis, 능력이 있습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부터 형의 자리를 빼앗으려다가 참으로 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애굽 왕 앞에서 “험한 삶을 살았나이다” 라고 한 것처럼 그는 참 말로 형용하기 힘들만큼 험한 사람을 살았습니다. 외삼촌에게 속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출산하다 죽고, 좋은 짐승은 형에게 다 빼앗기고, 아들들은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노예로 팔아먹기까지 하고…… 정말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임종이 가까웠을때 “야곱의 아들들아 다 모이라” 고 하자 아들들은 모든 일을 다 중단하고 아버지 앞으로 다 모입니다. 침상에 겨우 일어나 벽에 기댄채 숨을 헐떡이며 “야곱의 아들들아!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가 비는 축복은 나의 부여조보다 더 나으니라” 합니다. 자신이 비는 축복은 자기 아버지 이삭은 물론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축복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권세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도 야곱처럼 인생을 그렇게 마쳐야 겠다 라고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안증뱅이가 일어 섰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때 바로 이 권세와 능력이 함께 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41절에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 내 이름으로 마실 물 한 잔을 주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자기 보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제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찬송을 해도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나보다 강한 마귀를 쫓아 낼수 있겠습니까? 요한 1서 4:42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Because the one who is in you is greater than the one who is in the world.” 우리 안에 계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마귀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0:17절에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하였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세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6-7절에도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하였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였더니 안증뱅이도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권세와 예수님의 능력으로 마귀는 물러가고, 병마는 쫓겨가고, 걱정 근심은 떠나가고 소망가운데 기쁨을 누릴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또한 나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셨습니다. 누구나 에수님을 자기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 즉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의 가족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여기의 “너희”에 속하셨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지금 나는 예수님의 식구인가 ?” 라는 자기 성찰과 함께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분노에 찬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또 한분은 “목사님, 하나님께서 저주 기도도 들어 주십니까? 다읫도 요압에게 아주 끔찍한 저주의 기도를 하였지 않습니까?” 라고 묻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시기 전에, 내가 분노할때 내가 상대방을 저주할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지 먼저 살피십시오. 제 경우는 그런 순간에는 하나님이 안보이시던데, 그 순간에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말 아름답고 끈끈합니까?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살피시고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또 한가지 의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과 박해도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으면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키리라” 고 하셨듯이, 예수님 께서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내 이름로 인해 고난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41절에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 하였는데,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오히려 축복으로 되돌아 옴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요 Eternal Blessing, 영원한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끝까지 고통속에 돌아가셨습니까? 왜 그러한 고통을 보이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없애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너희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할 때가 있을 것이라. 하지만 내가 참듯이 너희도 참고 견디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도 골로새서 1: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십시다. 내가 예수믿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 부터 핍박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예배된 나의 Eternal Blessing, 저 영원한 천국에 쌓이는 축복을 생각하며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십시다. 이 감사의 계절에 나 같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하심으로 나의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나타나게 하신 것에 오히려 감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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