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4
거친들로 가자(호세아 2:14-15절)
October 06/2013
꿈 많은 문학도가 깊은 사색에 빠진채 길을 가는데 한 여인이 눈에 꽉 차게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필이 꽃혀 버렸습니다.
나는 소설을 쓰고있는 문학도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찾던 바로 그 이상형입니다. 난 당신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 심장이 멎는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심장이 어찌나 크게 뛰는지, 거선의 고동처럼 펑펑 뛰는 내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습니다. 당신의 나의 공주, 나의 사랑, 아니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내가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하여 우리나라 양대 신문에 당신의 이름까지도 대문짝 만하게 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은 이러한 남자의 박력있고 진솔한 구혼에 매료되어“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멋진 남자입니다. 난 당신과 함께라면 정말 행복할것 같습니다.”고백하며 승락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곧 신혼사림을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않아 여자는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 함에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나자, 우유 살 돈도 없는데 시댁에 맡겨 버릴까 아니면 고아원에 갖다줄까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둘 사이는 급격히 멀어져 갑니다.
그러다가 한 해가 훌쩍가면서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과 같은 하늘 밑에 산다는 것도 숨막힐 지경인데 그 아이는 남편을 빼 닮았습니다. 자기가 배아파 난 자기 딸인데도 불구하고 안아주기는 커녕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두 아이들을 방쳐두고 외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조심한다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불러 옵니다.
남편하고 각방을 쓴지가 오랜데 그렇다면 뱃속에 있는 아이는 누구 것입니까? 그간 상대한 남자가 한둘이 아닌지라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이를 낳자마자 그대로 집을 나가 전에 바람을 피웠던 남자들을 찾아 다니며 문란한 생활을 합니다.
한편 남편은 홀로 어린 세 자식들을 키우면서 소설을 쓰느라 얼마나 힘듭니까?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나라 최고 큰 두 신문사에 이런 광고를 냅니다:
순아 돌아와만 다오. 과거는 묻지 않겠다, 돌아와만 다오.
이렇게 해서 남자는 10년 이내에 양대 신문에 그녀의 이름이 나게 해 준다는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여하튼 세월이 흘러갑니다. 남자는 열심히 글을 써서 드디어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간 써왔던 소설들이 빛을 보게 되며, 이제는 생활의 여유도 좀 생겼습니다. 엄마없이 자랐지만 아이들도 비뚤어지지 않고 성격들도 좋아서 비교적 화평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기가막힌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기의 아내가 청량리에서 몸을 파는데, 포주에게 빚을 많이져서 돌아오고 싶어도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날마다 눈물로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속을 그렇게 썩이더니 꼴 좋다 하며 고소해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있는 돈 다 털어서 몸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르는척 하면서 젊은 여자와 새장가 들어서 새 출발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 같이 보시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찢기고 상처나고 더럽혀진 우리에게 친히 찾아 오셔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Allure,청혼하십니다. Allure 는 예쁘고 사랑스런 여자를 본 남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I love you, 난 당신의 포로입니다 제발 나의 사랑을 받아 주십시오 라고 사랑을 고백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내세우며“얘, 너 좀 예쁜데, 너 이리좀 와봐. 안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제발 내 사랑을 받아주오”라며 Allure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청순하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듯이, Allure 하십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이길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슴 두근거리시며 “나의 사랑이 되어다오”사랑을 고백하십니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입니까?
결혼 전에도 바람을 피웠고,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옛날 버릇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람을 피우다가 결국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까지 낳고서는 나가서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여자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창기가 되어 거기서 빠져나오지도 못합니다. 그 전에는 바람을 피우는 재미로 음행을 하였지만 이제는 지은 빚 때문에 노예처럼 갇혀서 몸을 파는 비참한 신세가 된 여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여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나름대로 죄 안짓고 정직하고 경건하게 순결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바람피우고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낳아 남편의 가슴을 찢어놓은 그 여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천하의 바람둥이 음란녀와 살면서 가슴이 다 타서 숯덩이가 된 남편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이야기이며 이 얼마나 기가막힌 사랑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추악한 과거를 다 아시면서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더럽혀지고 불결해진 죄악의 흔적은 모두 당신의 사랑으로 온전히 덮으시고, 우리를 순결한 신부로 보시면서“내게로 오라, 나와 함께 살자”고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의 사랑이여 내게로 돌아오라. 우리의 부끄럽고 아프고 슬픈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지금도 부르십니다, 내게로 오라. 거친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이여! 두려워 말고 불안해 하지 말고 지금 내게로 오라 고 부르십니다. 지금까지는 너 혼자 가다가 강도만난 자처럼 찢기고 상처난 가슴, 내가 싸매주고 낫게 해 줄 터이니 내게로 오라. 지치고 메마른 심령 내가 위로하고 끝없는 사막처럼 매말랐던 네 인생을 내가 물댄 동산처럼 바꾸어 줄 테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간절히 부르십니다.
I know your pain, I know your shame. I‘ve been there. But forget about your past, and come to me.
지금까지는 너 혼자서 인생 길을 걷다가 지치고 넘어지고 다치고 찢겨졌지만, 이제는 나와 함께 가자. I know your life is messed up. But, you can start all over. Come to me. We can start all over.
주님의 간절히 부르시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좋은 점, 장점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슬프고 부끄러운 과거의 상처까지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덮어지고 녹여지고 싸매지는 예수님의 사랑, 주님께서는 지금도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애절한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외면하고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주님의 그 부르심에 마음을 여시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하나 살리시려고 여태까지 오래참고 기다려 주신 주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나이다 라는 고백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가 이시간 주님께 다시 헌신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 다시 나아 갑니다. 이제 다시는 세상 열락에 빠져 세상과 외도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겠나이다. 주님 나를 받아 주소서 고백과 함께 이 시간 우리 주님께 다시한번 각오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신실한 마음을 받아 주시고,“그래 나도 이제부터는 오직 너만 사랑하겠노라”약속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혼에 응한 우리를 이제는 거친 들로 초청하십니다. 신부로 받아 주셨으면 화려한 혼인잔치에 초대하든지 황홀하고 아름다운 침실로 인도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화려한 잔치도 은밀한 침실도 아닌 거친 들로 같이 가자고 하십니다. 푸른 초장으로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황량한 거친 들로, Wilderness, 즉 광야로 가자고 합니다.
왜 광야로 가자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겁에 질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내 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저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철철 물이 넘치는 요단강이라는 시험거리, 장애물 들을 믿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You are not ready. 네 현재 믿음으로는 아직 세상 때를 온전히 벗지 못하였기 떄문에 요단을 건널 수 없도다, 광야로 가서 믿음의 연단을 받아라고 주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마른 광야에서 우리가 무엇을 구할 수 있습니까? 광야에는 맛있는 과일도 예쁜 화초도 푸른 초장도 맑은 시냇물도 없습니다. 광야는 사슴이나 순한 양이 아니라, 이리떼와 굶주린 사자가 사는 곳입니다. 광야는 길 잃으면 당장 목이 마르고 사나운 짐승에 찢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정착하여 사는 곳이 아니라 더 좋은 곳을 가기 위하여 지나쳐야 하는 행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는 신부를 왜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이나 평안하고 아늑한 곳으로 초대하지 않고 삭막한 광야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어떻게 광야 생활을 하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아침 일찍 나와서 하늘에서 뿌려주신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다 굶어 죽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나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철저하게 배운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한시도 살 수 없다 라는 그것입니다. 땅에서 자란 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고사는, 즉 땅을 바라보지 안고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즉 광야는 하나님의 첫 사랑을 체험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한 갈증에 연못에 뛰어 들어가 그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가 너무 써서 배앓이를 하고 넘어집니다. 그때 모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나무를 잘라 그 연못에 던졌더니 쓴물이 단물이 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쓰디쓴 인생이 예수믿고 단물처럼 변화됨을 체험 한 곳입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는 이제 입에서 신물이 난다고 불평하였다가 메추리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 배탈나 죽어갔던 곳도 광야입니다. 지나친 물질 욕심은 죄악을 낳고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할수 있음을 체험으로 알게 된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모세가 예수님을 상징하는 바위를 쳐서 생명수를 내었던 곳도 광야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채찍으로 맞으심으로 죽었던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됨을 체험하게 된 곳입니다.
광야 길이 힘들고 지치자 일부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거역하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애굽으로 돌아가다가 모두들 길을 잃고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처럼 광야는 공동체에 균열이 가서는 아니되며, 예수 공동체를 이탈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됨을 체험으로 알게 된 곳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앞으로 계속해서 지켜 나아가야 할 십계명을 받게 되며, 우상숭배에 빠졌던 자들이 광야에서 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시시때때로 거역하고 불평하였던 출애굽 1세들이 모두 죽은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처럼 나의 옛속성이 죽고, Born Again 체험을 한 곳이 광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이요, Born Again 체험을 한 곳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직접 체험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초청하신 것은 하나님 처음 만났던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명령이요,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하라는 명령이요, 십계명 즉 말씀을 가지고 사는 방법을 터득하라는 명령이요, 애굽에서 400여년간 머물면서 섬기며 배웠던 우상과 풍습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우상숭배와 세속화로 식어졌던 신앙을 회복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광야로 초대하십니다. 더 이상 세상을 의존하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법을 터득하라 광야로 초청하십니다.
일본의 방사능 누출로 세상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전쟁과 지진의 공포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무 곳도 영원한 곳이 없으며 그나마 잠시동안 허락된 안정성, 평화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평화,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터득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친 광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일한 삶의 형태에서 일어서서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이룬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안일한 자리에서 일어나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이럼 스미스(Hyrum W. Smith)는“인생의 10가지 자연법칙”이란 책에, To reach any significant goal, you must leave your comfort zone, 크게 성공하려면 “Comfort Zone, 즉 안일한 영역을 떠나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Comfort Zone, 즉 안일한 영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반구모양, 아니 큰 솥이나 다라이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구슬을 놓아두면, 이 구슬은 처음에는 이리 저리 굴러다니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제일 낮은 곳에 멈춰 서게 됩니다. 그리고 구슬이 멈춘 바로 그곳, 가장 낮은 그곳이 바로“Comfort Zone”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심리를 참 잘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가만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Comfort Zone을 찾게 되고, 결국 거기에 머무르게 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정되고, 익숙한 상태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Comfort Zone에 맴도는 사람은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뭔가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면 안주의 뜰(Comfort Zone)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 보신 분들은 다 경험하셨겠지만, 사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Comfort Zone을 탈피해야 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업에 성공하고 싶으면 안일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과감한 투자를 하여야 합니다. 물론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감당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 제일이 아니라, 그러한 안일함에서 탈피하여 때로는 Uncomfortable 한 곳으로 영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좀 더 큰 일을 하고 싶으면, 내가 만나기 편하고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들만 만나는, 그러한 Comfort Zone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 공부 시간에도 혹은 친교 시간에도, 아는 사람 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은 Comfort Zone에서 떠나야 합니다. 내가 싫지만, 때로는 위험도 따르지만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떠나라”의“Leave”가 어떠한 일시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위험한 지역을 Escape, 피하고 모면하는 식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가 불안하고 어려우니까 그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잠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큰 축복을 바라고 안주한 자리에서 능동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식어진 신앙을 다시 회복하라, 지금이 곧 너희 식어진 신앙에 불을 당길 때이다. 지금 광야로 나아가자. 너희 무디어진 신앙을 갈고 닦고 연단하라 면서 주님은 광야로 초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광야로 나아가십시다. 세속으로 물들고 식어진 처음 사랑을 회복하십시다. 첫 사랑을 망각하여 심한 책망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를 거울로 삼으며, 에수 처음 만났던 그 첫 사랑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친 들, 광야에 나아올 때 비로소 위로하고 포도원을 차려 주십니다. 본문 15절에,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말로 위로하고”라는 히브리어 원래의 뜻은 Comfort 가 아니라, 옆에 있다 혹은 마음에 대고 말하고 라는 뜻입니다. 들으라고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 고생 많았지, 이리와라 내가 위로해 줄께 가 아닙니다. 정말 심장대 심장으로 말하겠다 는 것입니다.
아버지 Bush 대통령이 처음 출마했을 때, Read My Lips” 라는 말을 자신의 신용의 척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자신은 한번 말하면 반듯이 지킨다는 역설적인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약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Read My Lips But Don’t Look At my Heart 란, 내 입술을 보아라 하지만 내 심장은 보지 말라 고 합니다. Read My Lips 가 이제는 거짓말쟁이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콤한 말로 아무리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고 할지라도, 맹세에 맹세를 한다고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는 나의 입술로 너희의 귀를 즐겁게 하지 않겠다. 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진정으로 네 가슴에 대고 말한다. 심장대 심장으로 말한다, 내 심장을 보아라, 네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느냐. 그저 입술로 I love you 가 아니라, 내 사랑을 네가 실제로 느끼게 해 주겠다, 체험하게 해 주겠다 는 것입니다.
온통 너로 가득차있는 내 심장을 보아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네게 보여주어 너로 하여금 내 사랑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게 하겠노라고 우리의 심장에 호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랑의 고백입니까?
주님은 그러면서 계속해서 약속하십니다,“힘내라, 내가 다시 일으켜 줄께, 새로 시작하라 내가 도와줄께, 포기하지 마라 내가 함께 해 줄게, 너희 빼앗긴 포도원을 내가 찾아 줄께”
여기서 포도원을 주신다는 것은, 우선 빼앗긴 포도원을 찾아 주겠다는 뜻도 되고, 또는 광야가 포도원이 되게 하겠다 라는 뜻도 됩니다. 여하튼 내 수중에 없던 포도원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기업을 의미합니다. 포도원은 나의 일터요, 나의 산업이요, 나의 가족이요, 나의 생명, 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내가 세상의 열락에 빠져 세상과 바람을 피우다가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탕진해버린 나의 포도원을, 나의 기업을 그리고 나의 생명을 찾아 주신다고 나의 심장에 대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광야 같은 나의 인생을 풍성한 열매가 탐스럽게 열린 포도원처럼 변화시켜 주신다고 맹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으로 인하여 잃었던 포도원을 되찾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빼앗긴 유업을 되찾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새 생명을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깨 광야로 나아가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친 들, 광야에 나아올 때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십니다. 15절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라고 했는데, 아골 골짜기는 요단 강 서편 여리고 위쪽에 위치한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후 아간이라는 사람을 처형한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는 실패의 골짜기요 이로 인하여 아이성 같이 작은 성과 싸워 패하게 되는 수치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아골 골짜기는 환난, 절망, 실패, 고통을 상징 할 때 사용되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니 우리 자신들도 아간처럼 하나님 앞에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간처럼 비통한 피를 쏟으며 돌아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고통과 죽음의 아골 골짜기를 넘어 용서와 회복이라는 소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우리의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들이 덮어지고, 죄인이면서도 마침내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는 본래 추한 골짜기입니다. 타락의 골짜기입니다. 고통의 골짜기 입니다. 범죄의 골짜기 입니다. 그리고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었던 장소가 바로 아골 골짜기였습니다.
죄를 지었던 곳, 실패의 골짜기, 수치의 골짜기, 그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던 바로 그곳, 하나님을 거역했던 바로 그곳,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손길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주시며 그 끔찍한 죽음의 골짜기가 저 천국으로 이어지는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아골 골짜기에 희망의 문이 열립니다. 그 골짜기는 더 이상 절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희망의 골짜기로 변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험한 골짜기는 더 이상 실패요, 수치요, 굴욕이 아닙니다. 이제 소망의 골짜기입니다. 승리의 골짜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요, 수치요, 굴욕이 아닙니다. 인류의 모든 죄가 매달렸던 그 십자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묻은 그 십자가, 사망이 아닙니다. 절망이 아닙니다. 승리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다. 나 자신에게도 아골 골짜기가 있습니다. 실패의 골짜기, 수치의 골짜기, 고통의 골짜기, 아픔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나 스스로 그 골짜기에서 나오려고 부단히 애를 썼건만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그 골짜기를 메우려 하였지만, 깊이 파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주님은 부르십니다.
명령이 아닙니다. 질책이 아닙니다. Allure, 부드러운 말로 부르십니다, “순아, 영아, 환아 내게로 오라. 너의 무거운 짐을 내게 다오. 그리고 너는 내가 주는 가벼운 멍애를 메어라.
주님은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우리 광야로 가자. 너를 처음 만났던, 그 뜨거운 사랑을 맺었던 광야로 가자. 나를 떠나 거친 세상에서 찢기고 아픈 상처를 내가 싸매주고 낫게 해 줄터이니 지금 나와 함께 광야로 가자.
네 인생의 아골 골짜를 이제는 내게 다오. 나의 십자가를 아골 골짜기에 꽂고 너는 이제 일어나라 주님은 부르십니다.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
이 시간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은 지금 청하십니다. 순아, 영아, 숙아 그간 세상에 속고, 사람들에게 속고, 세월에 속아 육신은 망가지고 곱고 팽팽했던 얼굴도 이제는 주름살이 대신하고 마음은 미움, 아픔, 상처투성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옛날의 그 첫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How about you? 나는 네 허물을 다 덮어버리고 너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수 있는데 How About You?
나는 네가 내 샘에 와서 인생의 갈증을 채우고 세상여파에 시달리면서 빼앗겼던 행복을 되찾고, 빼앗겼던 믿음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는데, Are you rea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