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17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

Posted by on Jun 17 2013 at 12:47 am

가상칠언(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39-43)

                                                                                                                  February 17/2013
Frank 라는 중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취미생활이란 오직 낚시질뿐이었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에 열심히 다녔지만 그는 교회 문턱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다른 식구들은 모두 교회에 갈 때 자신은 동네 호수에 가서 담배한대 물고서 낚시하는 그 맛, 아이스박스에서 시원한 맥주 하나씩 꺼내 마시는 그 맛, 아무런 잔소리 듣지않고 인생을 즐길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그는 십 수 년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2-3년만 있으면 은퇴를 하는데, 은퇴하고 나면 낚시나 실컷 즐겨야지 하면서 조그만 보트하나를 마련하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속이 좀 쓰리고 살살 아팠습니다.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것이겠지 하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픈 것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우선 정밀검사를 한번 해 보자고 합니다.
몇 일 후 의사가“부인을 꼭 모시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갔더니 암 말기라며 당장 입원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전신에 다 퍼져서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3개월에서 길면 6개월 정도……”하며 말 꼬리를 흐리던 의사의 말에 Frank는 호흡이 그대로 정지되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대로 병원 침대에 쓰러졌던 Frank, 지난 날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면서 두 줄기의 눈물이 뺨까지 흘러 내립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 보아야 할 텐데, 너무도 갑작스럽고 너무도 빨리 찾아온 종말에,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날마다 투여되는 약물로 인하여 정신은 몽롱하고 식욕은 떨어지고 체력은 급격히 약해져 갔습니다.
자신이 보아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부인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자기 부인을 늘 핍박해 왔던 터라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네더니 곧바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을 시작 하셨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말이었지만,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 지라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지옥이 아닌 천국에 꼭 가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여태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나 같이 교회 한번 안 나가고 못된 짓만 하던 사람도 구원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럼은요.
아니 목사님이 아시는 분이 아니라 성경에 그런 사람이 나오냐고요?
그러자 목사님은 오늘 본문의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도 ‘예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Frank 씨! 평생 못된 일만 하던 그 강도가 구원 얻었음을 믿으신다면 당신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Frank는 긴 한숨을 내 쉰 다음, “그렇군요” 하더랍니다.

그리고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드디어 Frank 의 임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더니 자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Frank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였습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엽니다,“목사님께 ‘거기 가는 길 알려주셔서 고맙다’고 그래요”
어디? 어느 길?
당신이 말하던 그 길 말이야.
그럼 천국 가는 길을 찾았던 말이야?
응, 예수님이 나에게도 찾아 오셨어, 어젯밤 나 같은 죄인에게도 찾아 오셨단 말이야.
평생 못된 짓만 해서 죄송하다고 하였더니 나더러 두려워 말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인은 북 바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에 두 손을 대고 엉엉 한참을 울다가 눈을 떠보니 남편 Frank 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양 볼은 흐르다 만 눈물로 얼룩졌지만 미소를 띠고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주님 품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Frank 처럼 천국에 갈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시지요?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들의 삶의 종말이 온다면 “예수님! 나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며 주님 나라에 들어갈 자신이 있으시지요?

그렇다면 좀더 심각한 질문, 만일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확신이 있으시다면,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부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목적인 동시에 내가 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선상에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 십자가에 먼저 달렸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 날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에는 두 강도들도 십자가 형을 받고 매달렸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총독의 지시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며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도 “네가 멧야면 너 자신부터 구해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라고 비방하며 침을 뱉고 조롱합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역시도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였다고 하였숩니다.
그런데 오직 누가복음에서는 한 강도는 그렇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군중심리에 예수님을 같이 비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잠시후 한 강도는 회심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강도의 마지막 순간을 같이 보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두강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군중들을 따라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특별히 나쁜 감정이 있었떤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강도짓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만민들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나 가질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특별히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사역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동기나 진행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날 그 아침에 본 것이 그리고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거침없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야 될 것 아니냐”
그는 분노와 탄식으로 가득찬 목소리로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온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나좀 구해 보라. 내가 정말 너무 고통스럽다”라며 외칩니다.
왜 그랬을 까요?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기구한 운명, 그 젊은 날에 무슨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너무 억울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하며 결단을 한다 할지라도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습나다.

전례상 그 역시도 그 날 아침에 빌라도 법정에서 부터 그 골고다 언덕까지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지고 채찍에 맞으면서 힘겹게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발가 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두 손과 발이 탕탕 못 박혔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장소, 실패의 장소, 절망의 자리 골고다 언덕 거기에는 자기 부모님이나 친구들 혹은 결혼을 하였으면 처자식들이 그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도 로마 병사들이 자기 두 손목에 그 큰 대못을 대고 망치로 탕탕 치는 순간 너무도 고통스럽고 무서워 기절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윽고 정신이 조금 들면서 느끼기 시작한 너무도 극심한 고통에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고통속에 헤메다가 죽어 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기구한 운명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는지라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 하거나 탓을 할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제 운명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 남아있을 시간은 종료되어 가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한 절망이요 죽음을 앞둔 공포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자신의 그러한 처지에 대하여 분노가 치민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계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 하다가 잡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보며,“당신이 바로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라 하지 않았느냐?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나좀 살려주소, 나를 이 고통의 십자가에서 속히 내려놓아 주소. 내가 이렇게 죽어가는데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나좀 살려 주시오”라는 절규를 한 것입니다.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극심한 고통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금 그에게 천국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그에게 어떻게 천국이 있겠습니까?
우선 당장 고통을 벗어나고 목숨을 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 사망은 모든 것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그는 아직도 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드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채 고통중에 분을 삭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듯 외친 그 외마디 소리가 마침내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때 예수님께 비방하듯 내 뱉는“나 좀 구해보라”는 말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루어지지 않을 현실에 탄식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렇게 외치다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인생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처럼 저 미래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이 고통중에 분노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저 천국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죽음이 두렵기만 하고 불안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속에 두려워 떨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강도는 이렇게 고통과 두려움속에 죽어 갈때 다른 한 강도는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강도가 무슨 죄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 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 같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갚기 위하여 선행을 하고 고행을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악한 짓을 일삼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이 강도 역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가 구원받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 드린 것 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너무도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결정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위험부담이 따르는 용단의 행위였습니다.
불과 3일전 종려 주일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였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이에 로마는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백만명 이상이 모이는 이 유월절에 혹시 민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치안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던 터라 더욱 긴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급적 유대인들의, 특히 종교문제에는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최선을 다해왔던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총독이었던 빌라도 역시도 예수님에 대한 이 문제를 가급적이면 회피하려고 헤롯에게로 보냈더니 해롯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냅니다.
그리하여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인등 유대인 지도자들의 독촉과 협박에 하는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으로 사형언도를 내린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세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로마 군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로마 병사들에 의해 체포된 것에 대단히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더이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군을 물리치고 다윗 왕때처럼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메시야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성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로라고 그 난리를 쳤고, 더러는 골고다 언덕까지 쫓아오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지만, 이 강도는 군중들로부터 이렇게 끔찍한 거짓 메시야라고 조롱당하고 비방당하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이 사람은 조롱받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그 나라, 메시야의 왕국이 곧 임할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조롱받고 있는 이 사람, 자기와 별반 다름없이 고통속에 죽어가는 이 사람을 메시야라 믿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믿음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히브리서 11:1절에 말씀하신대로, 믿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곧 일어날 것으로 알고 행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미리 볼수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때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여론을 따라 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특히 두 편으로 갈라져 이 편을 택하면 다른 한편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암묵적으로 지지자가 많은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 보통사람들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론을 거스린다는 것은 거센 반대와 핍박을 감수한다는, 그 일로 인하여 기꺼이 손해를 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확신에 서있지 않고서는 여론을 거스려 자기 주장을 펼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강도, 그는 여론을 거슬려 일어 섰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위하여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변론하기 위하여 이러한 위험을 무릅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여론을 믿지 않았고 단호히 일어 섰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는 이 강도에게 “Today you shall be With Me.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고 단언하십니다.
이 강도는 미래의 언제쯤이라 생각하였겠지만 주님은 오늘, Today를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이라는 단어는 즉각적으로, “너의 육신의 호흡이 끝나는 그 즉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Marcion과 같은 학자들은 오늘이라는 대목을 우리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이라는 σημερον 단어가 낙원에 있으리라를 수식하지 않고 말하노니를 수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와함께 천국에 있으리라”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사망하신 뒤 사흘동안 낙원에 계시지 않고 다른 곳에 계셨는데 그 중 한 곳이 베드로 전서 3:19절에“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라고 하였듯이 우선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그 영이 육신을 벗어나자 마자 낙원으로 가시지 않으셨고 곧바로 전도하러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20: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결론은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 네가 마지막 부활 때에 나와 함께 천국에 오게되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과 육의 분리개념이 없는 히브리식 해설입니다.
히브리 언어에는 영과 육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에는 영과 육의 분리 개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흙으로 사람을 짓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더니 영과 혼이 동시에 들어가 아담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근거로 삼위일체를 안믿는 Unitarianism에 근거를 둔 종파들은 우리가 죽으면 영과 육이 같이 스올에 가 있다가 부활때 영과 육이 같이 부활한다 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듯이 영과 육의 분리 개념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였는데 무엇을 심판합니까?
이미 죽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심판한다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요 죽음 후에는 반듯이 영에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네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남지만 구원받은 우리의 영은 그 즉시 천국으로 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들은 Paradise 가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연옥의 개념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Paradise는 천국이 아니라 천국을 가기 전에 거치는 어느 중간 지점이라 주장합니다.
그 이유로는 주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천국(Heaven/Kingdom of God)이라고 하였는데 왜 여기서만은 Paradise 라고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Paradise는 원래 페르시아 제국에서 왕실의 특별한 정원, 오직 왕만이 자유자제로 출입하는 은밀한 정원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8절도 Septuagint, 즉 70인 번역에는 에덴 동산이 Paradise로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에덴 동산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19절 이하에 나오는 나사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죽어서 곧바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자 곧 천국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이지 실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Paradise라고 하신 것은 천국을 아무런 고통이나 부족함이 없이 편안하게 먹고 쉴수 있는 곳으로 보다 실감나고 확실하게 말해주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못된 짓만 하였던 강도도 예수님의 왕국이 올 것을 믿고 자신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 앞이 아닌 예수님 앞에 자기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며 구원받기를 구하였을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 천국에 같이 있으리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같은 죄인도 이 강도처럼 주님 나라 임하심을 내가 확실히 믿고 나의 죄를 자복하고 구원을 구하면 능히 저 천국에 들어갈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머지않아 이 땅에 주님나라가 임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가실때 곧 오시마 약속하신 주님께서 이제 곧 오실 것을 믿으십니까?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오신다고 하신 경고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다시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강도처럼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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