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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013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대 주교였던 요하네스는 당대에 학문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분은 풍부한 지성과 신실한 믿음으로 말씀을 아주 잘 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을“크리소스토무스” 즉 “황금의 입”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의 별명이 이름으로 되어 오늘날은 그 분을 요한 크리스톰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강직하기로 아주 유명하신 분입니다.
신앙은 용서와 포용은 있어도 타협은 없다 가 저의 신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참하게 사셨지만 비굴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러한 신조와 성격때문에 고난도 많이 받았고 지금도 받고있습니다. 여하튼 간에 이분도 이러한 강직한 신앙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저와 다른 점은 저는 힘들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했는데 이 분은 억울함을 당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항상 감사하며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 분은 자기 관할 지역에서 사역하는 모든 신부나 수녀들뿐만이 아니라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녹을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한 독신생활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동방정교의 본부였는데, 이러한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의 고집으로 인하여 알렉산드리아 본부 주교와 갈등이 생깁니다. 또한 로마 황실의 사치와 방탕을 책망하자 자연히 로마 황제, 특히 황후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를 아주 끔찍히도 싫어했던 황후는 황제를 설득하여 멀리 귀향을 보내게 합니다. 그러자 요하네스 주교는 교황 청에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황제는 교황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서기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죽으면서도 그 분은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남달리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정적들이 생기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감사하는 신앙, 심지어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당부하는 스데반 집사님,“왕이여 그리아니하실 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겠나이다”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자신의 신앙을 선포하는 시드락, 메섹, 아벳느고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하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지난 주에 본 대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왕임을, 아니 신임을 온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꿈에 본 신상모양의, 아니 자기 모습의 신상을 만듭니다. 자그마치 높이 25M, 폭이 2.5미터나 되는 그러니까 약 6충 높이의 엄청나게 큰 자기 동상을 순수한 금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이 오며가며 쉽게 볼수있는 편편한 두라 평지에 세워놓고 모든 백성들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 낙성식에 자기 모든 신하들은 물론 정치인, 법조인, 각 도의 도지사 및 시정 군수들, 경제인, 교육가등 나라의 주요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왕의 대변인이 선포합니다, “이제 음악이 나오면 모두들 이 신상 앞에 절하여 경의를 표하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쇳물도 펄펄 끓는 아주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리게 할 것이요. 그러므로 다들 준비하였다가 주악이 울려퍼지면 그 즉시로 엎드려 절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나팔과 함께 모든 악기들이 울려퍼졌고, 두라 평지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우뚝 서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하면 바벨론의 각 도를 다스리는 도지사들입니다.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엎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곧바로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저 곧바로 바람에 흩날리는 한줌의 재로 되어버려야만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 양심 때문에 순교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거역할수 없어 엎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갈대아 사람들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처럼 보이던 이 유대인들, 전쟁포로 주제에 남의 나라에 와서 출세하고 도지사까지 올랐으니 얼마나 심한 질투가 났겠습니까?
제가 컴퓨터 회사에 다닐때에 한번은 흑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네 나라로 가지 왜 여기 있느냐? 너희들 때문에 우리도 Job이 부족해!” 저는 우리 한인 2세 3세들이 미국사회에 많이 진출하여 시장도 되고 주지사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기를 바라는데, 만일 그렇게 될 때 미국사람들이 얼마나 질투가 심할까요?
이제 왕 앞에 끌려온 그들, 방 금 전까지만 해도 충성스러운 신하와 왕의 관계이었는데 이제는 역적으로 몰렸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왕은 이들을 아끼는지라 기회를 줍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느브갓네살 왕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그들의 목숨이 자기에게 달려있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의 목숨은 당신 손아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물론 당신의 왕국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풀무불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왕이 우리에게 어떠한 해를 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실 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설득하거나 협박하지 마십시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왕의 권유대로 신상에 절 한번만 했더라면 그들의 인생은 평탄대로였을 것입니다. 왕의 신임받는 충성된 신하요 또한 학문과 지식이 탁월하여 앞으로 장래가 정말 활짝 열린 온 세상이 부러워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신들을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구 하나님을 배반할수 있겠습니까?
최근 Lance Armstrong 이라는 자전거 선수가 자신이 경기때마다 마약을 복용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우승하여 매달을 딴 것 모두 마약을 먹고 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계속해서 부인해오다가 마침내는 털어 놓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가 딴 메달과 기록들을 박탈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그간 그를 후원해왔던 회사들이 후원을 당장 끊었습니다. 그 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후원해 준 돈 내놓으라고 그를 고소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던 그,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우상처럼 존경을 받던 그가 하루아침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징역살이를 피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간 올림픽 경기를 비롯하여 각종 경기에서 그리고 광고수입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던 그가, 아마도 재산을 다 몰수 당하고 빚쟁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왜 그는 털어 놓을수 밖에 없었을 까요? 1996년 암 수술을 받고 회복된 소위 말하자면 Cancer Survivor 인데, 그 때부터 그는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너무 힘들고 괴로와서 결국은 털어 놓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시대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로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도하다가 체포됩니다. 그는 양 손이 포박된 상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그를 태워 죽이려고 높이 쌓아둔 장작더미 위에 던져집니다. 그 옆에는 로마 병사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려고 횃불을 들고 서있습니다
그때 총독은 폴리갑에게“당신은 나이도 많지 않느냐! 나는 예수를 안믿습니다”이 한마디만 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폴리캅은 “오! 안믿는 자들이여 나도 안믿소!”라고 합니다. 그러자 총독은 “나를 놀리는 것이요?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맹세한후 하시오” 라고 소리 칩니다.
그러자 폴리캅 주교는 미소를 띄우며 “이보시오 총독, 나는 지난 85년 동안 나의 왕 예수님을 섬겨왔습니다. 나의 왕 예수님께서는 지난 85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 구차한 목숨을 건질려고 내가 어찌 나의 왕 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배반할수 있겠소?”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부탁합니다,“나를 지금까지 지켜주신 나의 왕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뜨거운 불에도 견딜 힘을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나의 주시요 나의 왕이신 예수님을 뵈오러 가는데 걱정 마시고 내 손의 이 결박이나 풀어 주시오” 그리고는 화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에게 “그대들은 잠시 타다 꺼질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여 장차올 심판의 불, 영원히 타는 불을 모르는가?”하며 평화롭게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도 폴리캅 주교처럼 살다가 그렇게 죽기를 원합니다. 나도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 까지도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나도 요한 크리스톰처럼 억울함이나 고난을 불평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메삭, 사드락, 아벧느고처럼 죽기를 각오한 신앙, 왕이여 나의 왕 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의 그 풀무불에서 건져내 주실 줄 믿습니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렇지 아니하실 지라도 난 왕의 신상에 절하지도 왕이 숭배하는 그 우상도 믿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왕의 그 어리석고 우매한 신앙을 버리고 우리 하나님을 믿으라고 왕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나도 이러한 신앙, 나도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아직 나의 믿음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는 아직 하나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날 로마 교황청에 보고서 하나가 들어 왔는데, 포르투칼 예수회에서 파견된 페레이라 선교사가 일본 나카사키에서 체포되어 심한 고문에 못견뎌 배교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젊은 신부 로드리게는 분개합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자기들의 스승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순교를 각오한 신앙을 가지라고 가르쳐 오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매 선교 보고 때마다 그는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편지를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보다도 존경을 받던 분이었는데 체포되자 죽음이 두려워 믿음을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젊은 로드리게 신부는 즉시 가르페 신부와 함께 일본으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언제든지 순교할 준비가 되었다고 자부하면서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일본 당국에 체포됩니다. 이윽고 형 집행 날이 왔습니다. 넓은 뜰에 체포되어 온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일본사람들인데, 그 줄에 로드리게 신부도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집행관은 말합니다: 여기 그대들이 믿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이 얼굴을 밟고 지나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목을 칠 것입니다.
한사람씩 집행관이 있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집행관은 그 사람의 자존심을 위하여 얼굴을 다른쪽으로 돌려 줍니다. 그때 얼른 밟고 지나가면 목숨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씩 한사람씩 나아가 그 앞에서 잠깐 망설이다 얼른 예수님 얼굴을 밟고 지나갑니다. 이윽고 로드리게 신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자기 바로 앞 발밑에는 구리로 만든 예수님 얼굴이 있습니다. 이제 그 얼굴을 밟으면 사는 것이고 밟지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여가며 지켜 봅니다. 집행관도 얼른 밟고 지나가라고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려 주었습니다. 로드리게 신부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난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노라, 난 그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리겠노라” 아주 장담하고 다짐하고 왔지만,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사역해 왔지만 막상 죽음앞에서는 흔들릴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그러면서 구리판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이 실제 예수님이 되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Son! Do not Afraid!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두려워 말라.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얼른 내 얼굴을 밟고 네 생명을 구하라. 난 네가 나의 얼굴을 밟는 그 순간 네 마음에 약간 가책을 느끼는 그것,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라고하십니다. 누가 흔들리는 이 로드리게 신부에게 돌을 던질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를 배신자라고 비겁한 자라고 정죄할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왜 너 나를 배신했느냐”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바요나 시몬, 아가페스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니요 주님, 난 주님을 우정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지 않겠다는 것이냐?”이렇게 베드로를 책망하거나 따지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두번째 똑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 역시도 아직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을 수 없노라고, 언제든지 위험이 닥치고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전번처럼 배신해 버릴수 있는 친구의 우정만 지키겠노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3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우정으로 밖에는 사랑할수 없단 말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내 마음 속까지도 다 아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아가페 사랑 할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전번처럼 나를 체포하려고 병사들이 와서 너도 예수 와 한패지 하면 나는 또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임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며 베드로는 흐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믿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그 솔직한 고백, 그것을 믿으신 것입니다. 지금은 연역한 믿음, 흔들거리는 믿음을 기지고 있지만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 놓을수 있는 순교자의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베드로를 믿으신 예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믿으십니다. 비록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당장 목숨을 내놓을수 있는 신앙은 없을수 있습니다. 아직은 이민 사회에 힘들고 어려우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을수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하나님 보다는 의사를 더욱 의지하려고 하는 신앙일수 있습니다. 사업이 기울고 물질이 궁해지면 물질에 시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굳센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하나님을 얼마나 깊히 아십니까? 신앙의 척도는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아느냐 입니다.
브룩스 쿡은 “당신의 계획을 믿음으로 세우라” 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남부에 살던 한 청년이 한겨울에 와이오밍에 사는 친구를 방문합니다. 그날 날씨가 화씨 5도, 그러니까 영하 약 15도 정도 되는 꽤 추운 날씨입니다. 그들은 시골길을 같이 걷다가 지름길로 가기 위하여 꽁꽁 언 호수를 가로질러 가게 됩니다. 남부에서 온 청년은 혹시라도 얼음이 꺠지면 어떻게 될까 두려워 아주 살얼음 위를 걷듯이 두 발꿈치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한발짜국 한 발짜국 걷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는 뭣하느냐고 하면서 아무런 염려도 없이 뚜벅 뚜벅 걷습니다. 그때 호수 한쪽에서 커다란 트랙터가 호수 한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얼음판 위를 걷는데 자기 친구는 조금도 두려움없이 뚜벅 뚜벅 걷는데 자신은 발 끝으로 서 있다니,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입니까? 북쪽의 친구는 그 호수를 늘 지나기 때문에 그 호수의 얼음이 어떻다는 것, 아무리 뛰어도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남쪽 친구는 처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드락, 메섹, 아벳느고와 우리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순교하면서도 감사한 요한 크리스톰과 우리의 다른 점은 무엇 일까요? 죽음 앞에서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폴리캅과 우리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그 분들은 우리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욱 깊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욱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예배 드리고, 성경말씀 더욱 열심히 읽으시고, 더욱 자주 더욱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 보다도 하나님과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러면 우리들도 마침내는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 놓을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우정으로 밖에는 사랑할수 없노라고,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면 주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믿음을 울며 호소했던 베드로가 마침내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았듯이, 지금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침내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내 놓을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될 것임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믿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더욱 가까이 지내면서 주님과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고 주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면 마침내는 사드락, 메섹, 아벳느고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이 될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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