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20

소명과 은사를 악용하지 말라

Posted by on Jan 20 2013 at 11:45 pm

January 13/2013

혹시 기도하시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시거나 혹은 그러한 꿈을 꾸신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서 목사님이 혹시 신비주의에 빠지셨는가 하며 이상하게 생각하시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몰랐던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안 나타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살아계신 예수님께 예배만 드리지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은 싫습니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보십시오. 기도 중에 “숙아!” 혹은 “환아”  “은희야” 라고 불러 주시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가시는 것을 체험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고난 받는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 “내가 네 고난을 안다” 그 위로의 말씀, 여러분 체험해 보십시오,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을 소유하고 이루려고 전심전력하였던 것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 집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지식이나 노력이 아닌 체험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직접 뵈옵나이다” 라며 고난 중에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욥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마시고 성경 말씀을 계속해서 읽으시고 그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고 또한 “예수님 내게도 찾아와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바울 사도를 찾아 오시고 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도 반듯이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환상이라고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또한 꿈이라고 다 영적인 꿈은 아닙니다. 영적인 분별이 반듯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꿈으로나 환상으로 계시하시는 것, 즉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온전히 믿고 행실로 옮길 때 나에게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간혹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주변 사람들을 Control 하고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때로는 자기 감정에 치우쳐 예언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을 더욱 힘든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게 할 뿐만이 이니라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정죄하려는 사람들이 목회자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2:31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무시해서도 훼방해서도 막아서도 아니됩니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기도하여 영분별을 철저하게 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모하시고 기도에 전념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는 체험들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왕국을 40여년간 통치해온 아주 막강한 절대 군주였습니다. 그 앞에서는 아무도 부인들도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장기간 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리게 된 배후에는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했듯이 무엇인가 엄청난 비리와 음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국의 모택동은 수백만명, 소련의 스탈린은 천만명이 넘는 자기 반대파들을 처형시켰다고 합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기 영구적인 정권 유지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고, 우리나라 군사정부도 걸핏하면 “공산주의자다” 라는 누명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 않습니까? 느부갓네살 왕 역시도 지난 40여 년 동안 통치해 오면서 수많은 자기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을 시키고 감옥에 처 넣고 종을 삼는 등 비리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500여년 전의 일이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더 무자비하고 잔혹하였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늘 전쟁을 해온 전쟁의 왕이었으며 정말 전설처럼 전쟁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변국들은 물론 멀리 아프리카의 이집트 일부까지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땅에 전쟁이 그쳤습니다. 더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그쳤다는 것  더 이상 정복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위기를 의미 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적군들을 치고 노략질 하던 군인들이 이제 가정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제는 넘치는 힘과 패기와 열정을 쏟아 놓을 곳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가정을 비워 놓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던 혈기 왕성한 군인들이 가정에 돌아오니까 가정에 평화가 온 것이 아니라 혼란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들에게 맞는 직장이 있어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이런 직장들을 어떻게 만들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연스럽게 정치를 넘나보게 되었고, 그것은 곧 바벨론 왕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이 처한 현실이 아닙니까? George Bush 대통령은 전쟁 대통령이었습니다. 탈레반 원수를 갚는다고, 911 테러 사건에 보복한다는 명목으로 Afghanistan 을 쳤습니다. 그의 그러한 대담성에 미국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고, 그리하여 미국 국민들은 그에게 대통령을 4년 더 하도록 기회를 한번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 Iraq 를 정복하여 사담 후세인을 처형시켰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자신이 곧 오늘 본문의 느부갓네살이 다시 태어난 환신이다 라며 암암리에 그가 하였던 일들을 모방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본문의 느부갓네살 왕처럼 신상을 만들었고 또한 암암리에 느부갓네살 왕이 증건하였던 바벨탑을 만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George Bush 대통령이 이를 격파하자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린 느부갓살 왕을 제일 싫어하던 유대인들과 사담 후세인을 적그리스도라 믿던 미국 내 일부 크리스천들의 마음을 감동 시켰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는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일 그가 지금까지 대통령을 하고 있다면 “왜 쓸모없는 전쟁을 하여 아까운 생명들을 희생시키고 나라 경제를 이렇게 망가뜨렸느냐” 고 사람들은 가만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러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던 느부갓네살 왕은 일생 일대기에 최고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전쟁만 잘 하였지 그리고 불 같은 성격에 정치적 역량도 없고 포용력도 부족하였던 그는 아마도 “어떻게 이 여러 민족을 영원토록 다스릴까? 만일 반란이라도 나고 구테타 음모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 중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로서는 해몽 불가능한 이상 야릇한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위기가 닥치지 않으면 심각한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전심전력을 다하여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주변에서도 자주 보지 않습니까? 저도 위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차가운 기도원에서 45일 동안이나 처박혀 있으면서 날마다 8시간 이상씩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위기가 닥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두 다리 펴고 편안히 잠든 한 밤중에 기도원 동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위기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의 기회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느부갓네살 왕은 심히 고민을 하던 중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신상, 큰 동상인데 신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신상이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 꿈은 분명히 아주 중요하고 의미 심장하다 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연관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의미인줄 모르니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의 모든 박수와 점성술가등 그 당시 자기 왕국의 모든 지혜자와 미래 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을 불러 당장 자신의 꿈을 해몽하라는 소동을 벌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꿈 해몽을 못하자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 점성술가 등을 처형시켜 버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때 다니엘이 왕 앞에 나타나 “왕이 큰 신상을 보았나이다” 라고 말하자 느부갓네살 왕은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내가 꿈에 본 것을 정확히 말할까? 저 것이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정말 두렵고 떨립니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왕은 열 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 이 말에 왕은 온 백성이 다 보는 가운데 어린 다니엘에게 아니 다니엘이 믿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온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던 신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야 말로 전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느부갓네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많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인 그 악명 높은 느부갓네살 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도 마침내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여기에 나오신 것 아닙니까? 저는 원래 전깃불도 안들어 오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 시골에 일찍부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5살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된 것도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 하나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많은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마침내는 전깃불도 안들어 오는 시골에 벽돌집 지어놓고 땅바닥에 가마대기 깔고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미제 껌 하나 얻어 4등분 하여 씹고 또 붙여놓고 또 씹고 하면서 교회에 흥미를 갖게 하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라는 거기서 그쳐서는 아니 됩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여야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우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엄청난 신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돌로 한번 맞자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 너의 그러한 왕좌도 내가 준 것이며, 내가 언제든지 너를 흔적도 없이 만들 수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엄청난 크기의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들에게 절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거역하는 자들은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 태워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다니엘의 해몽 중에 자신이 그 신상의 머리라고, 금으로 된 머리라고 하였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그러면 그렇지,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왕이로구나.” 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이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온 세상의 왕임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꾼 꿈과 그 꿈 해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 까요?

우선 느부갓네살이 원했던 것은 신정 정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전쟁 중이었으니까 군인으로서 무력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왕으로서의 무력으로 통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칫 백성들이 반발할 때도 있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심하면 쿱데타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신격화 하면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신을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왕은 존경과 복종의 대상이지만 신은 예배와 경배의 대상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자신들을 신격화 하여 백성들에게 숭배하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이러한 작업을 추진하였고, 지금은 북한 주민들이 그를 신으로 모시고 그의 동상 앞에 절하지 않습니까?

그가 추진한 또 하나는 종교 통합입니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는 각 민족들이 자기들의 종교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하나로 뭉칠 구심점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곧 균열이 생기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산산조각이 날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력으로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중세 Roman Catholic 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수백년 동안을 통치해 온 것은 교황의 무력적 통치가 아니라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적인 통일, 즉 사상적인 구심점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적인 통일, 온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하여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공산주의를,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마오주의를, 그리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그리고 사상적인 통일과 화합을 위하여 느부갓네살 왕은 커다란 동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라가 얼마 가지 못하여 자기보다 못한 은으로 된 나라에게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나라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그 동상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동상을 모든 사람들이 잘 볼수있는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누구든지 그 신상을 보는 사람들은 그 신상이 곧 느부갓네살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제 더 이상 왕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라 선포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바벨론에는 앗시리아 인, 유대인, 아랍인, 유럽인, 아시아 인들을 포함하여 적어도 100여 민족들이 더불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만을 제외한 나마지 민족들은 각기 자기들이 믿는 우상을 숭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에는 물론 공공 장소에도 크고 작은 우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혼란한 이 때에 두라 평지에 신상을 세우고 이 것 만을 섬기라고 종교 통합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다른 신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두라 평지에 있는 이 신상만 섬기면 됩니다. 이제 살아있는 신, 느부갓네살만 섬기면 됩니다. 정치가나 점성술가나 예언 가들도 사람들을 다루기가 간편해 졌습니다.

그런데 3:1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했는데, 아마도 그가 꿈에 본 신상의 크기와 동일한 것으로 하였을 것입니다. 규빗이란 어른의 팔꿈치부터 손 끝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공식적으로 긴 규빗(52.5cm)과 짧은 규빗(44.7cm), 두가지 쓰였는데, 짧은 규빗이라 하여도 60규빗이며 25미터가 넘습니다. 그러므로 그 금상의 크기는 작게 잡아서 넓이가 약 2.5미터요 크기가 약 25미터로 건물 약 6층 높이 입니다. 평양에 있는 그 큰 김일성 동상이 20미터라는데 그보다 5미터 더 높으니 정말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자기 모양의 이렇게 큰 신상을 만들려면 금을 모으고 녹히고 하느라 여러 해가 걸렸을 텐데, 그리고 얼마나 많은 국고를 낭비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끌려 왔겠습니까? 이렇게 큰 신상을 먼 곳에서도 잘 보이도록 두라 평지에 세워놓고 악기소리에 맞추어 그 신상에 경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육십규빗과 육 규빗입니까? 물론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숫자 6은 하나님의 숫자 7에서 하나 부족한 부정한 것을 상징합니다. 요한 계시록 13:18절에도 적그리스도의 숫자가 666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아주 심상하지 못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1절 이하에 보면 바벨론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그들은 탑을 하늘높이 쌓아 하늘의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탑을 높이 쌓아놓고 그 탑 중심으로 모이자 라는 목적하에 탑을 높이 쌓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소통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탑을 완성하지 못하고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느부갓네살 왕은 이 동상 외에도 자기 조상들이 쌓다 말았던 이 바벨탑을 증건하였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렇게 엄청나게 큰 신상을 세워놓고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 영토내의 모든 총독들, 요즘으로 말한다면 주지사들과 시장 및 각 기관장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대변인을 세워서 선포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넣으리라”

이러한 느부갓네살의 우상화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그들과 타협하여 목숨을 부지 할 것이냐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혼돈과 좌절을 겪게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저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아닙니까?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강요됩니다. 세상과 타협할 것이냐  엄청난 손해를 각오하고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킬 것인가?

말씀을 정리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왕국을 하나님 나라로 건설하여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살아갈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자신의 정치적 야욕으로 바꾸었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들 중에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신 체험이 있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꿈을 꾸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방언을 하시고 예언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특히 방언을 하면 방언의 역사는 이미 끝났다고 이단시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 주시거나 꿈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우리의 식어진 신앙을 다시 수축시키기 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주신 은사를 느부갓네살 왕처럼 나의 명예나 야심을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을 Control 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겸손하게 하지만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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