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31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 (누가복음 2:1-5절)

Posted by on Dec 31 2012 at 08:48 pm

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어제는 미국 교회와 함께 Homeless를 위하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습니다. 매월 3번째 주 토요일 오전 11:30분부터 배식하여 1:30분까지 계속됩니다. 여러분들도 참여하셔서 이 분들과 같이 식물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면 좋으실 것입니다. 여하튼 풍성한 음식,특히 Corn Bread, Ham등 남부 음식이 모인 모두를 즐겁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Homeless 들도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여하튼 그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5년째 Homeless로 살고 있는데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많이 본다고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아서 매우 바쁜데 Homeless가 되니까 남는 것은 시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누가 Homeless 말을 귀담아 듣겠느냐, 내가 무슨 힘이 있느냐. 그래서 자연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과 자연을 관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할까 기회를 보며 듣고 있다가 그 말 끝에 “나무를 관찰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기 자라는 나무들을 보십시오. 한번 정착하게 되니까 움직이지 않고 평생 저기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춥다고 덥다고 다른 곳으로 갈수나 있습니까? 누가 올라와도 무방비 상태고 누가 가지를 잡아 당겨도 심지어는 도끼로 자기를 쳐도 그대로 견디기만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남녀노소 그리고 흑백 노란색 누구를 막론하고 다 똑같이 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차별 없는 사랑 하면 생각나는 사람 없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Homeless 였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 분의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을 감사 드리는 크리스마스 아닙니까?”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를 고난에서, 불안에서, 아픔에서, 그리고 죄악에서 건져내고 구원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행사입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하기 위하여 Extra 순종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한 순종은 항상 거기에 따르는 대가가 따릅니다. 때로는 지불해야 하는 그 희생이 너무 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 인류가 크리스마스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강과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그 분들의 Extra 순종, 희생의 사랑을 보면서 은혜 받고 도전 받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마리아의 순종입니다. 누가복음 1:30-31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십니다. 아직 남자와 동침해본 적이 없는 처녀에게 무슨 날벼락과 같은 소리입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난 처녀인데! 지금까지 남자 없이 아이를 낳은 여자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꿈에서도 보지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세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어?

하지만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선명하게 또박 또박 다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천사가 지금 자기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생각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임신한 것이 알려지면 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얼마 전 신문에 친자 확인하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부인이 난 자식인데 정말 자기 핏줄인지 부인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핏줄이 아니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삶을 같이 나누었던 남편이 자기 아내를 간음죄로 고발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물론 부인이 외도를 하여 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덮어주고 기르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문화가 많이 개방되었다는 오늘날 조차도 대부분의 남자들로서는 쉽게 용납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의 법대로 한다면, 처음 결혼하는 신부가 처녀가 아니면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것도 신부의 아버지가 제일 먼저 자기 딸에게 돌을 던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입니다. 혼인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이미 신부의 몸값도 지불 된 상태입니다. 이제 날짜만 잡아서 잔치를 열고 신부를 모셔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천사가 와서“네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내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남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부정한 여자, 바람둥이, 정말 치욕스럽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의 아버지에게로 가서 자신이 치른 신부 몸값을 배상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34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라며 황당해 합니다. 나는 남자와 동침은커녕 손목을 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3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리고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한 것을 보면 마리아가 천사의 말에 그 자리에서 “OK”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두려워 떨면서 계속 피하려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38절에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한 것처럼 마침내는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인데,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으로 쓰신다는데 내가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하나님, 이제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아이를 임신하면 어떻게 될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나는 모릅니다.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옵소서. 라고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마리아인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그녀는, 낮에는 결혼식을 앞두고 준비하느라 바쁘고 밤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꿈, 자녀를 몇이나 둘까, 아이들이 참 귀엽겠지 하면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은 접어야 했습니다. 아니, 자칫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십니까? 마리아처럼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십니까? 두렵습니까? 이 시간 고치기 힘든 질병, 가정문제, 자녀문제, 사업, 직장 등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 나를 두렵게 하는 모든 문제들을 마리아처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마리아처럼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께서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들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의 순종입니다.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 요셉은 이미 나이가 꽤 된 사람 같습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남자가 결혼을 하려면 양 몇 십 마리 혹은 나귀 몇 마리 등 신부의 몸값을 마련해야 하였습니다. 그의 신체적 결함이 지적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일찍 결혼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 신부의 몸값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드디어 마리아라는 여자를 보고 마음을 정하였고 열심히 일하여 신부 값을 다 치렀습니다. 노총각이 얼마나 가슴이 설레겠습니까? 이제 결혼식 비용을 마련하여 많은 손님을 불러 크게 잔치를 하리라 가슴이 설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마태복음 1: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하였습니다. 이것,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생 일대기에 큰 위기입니다. 야곱이 자기 외삼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위하여 7년간 열심히 일하여 신부 몸값을 지불하였는데 첫날밤 야곱이 술취한 것을 보고 맏딸 레아하고 바꿔 치기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자기 외삼촌 라반에게 어떻게 합니까? 노발 대발 하였다고 합니다.

요셉 역시도 보통사람 같았으면 마음속에 끓어 오르는 분노, 아픔, 억울함, 등등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보통 남자와는 달리 정말 의로운 남자입니다. 의로운 남자일지라도 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자 그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Why Me?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쳐야 하나? 왜 하필 이런 여자야?”라며 요셉은 괴로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여러 날을 고민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19절에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한 것처럼 이 문제를 조용히 피하려고 합니다. 자신은 마리아의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가만히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신부의 몸값을 마련하느라 많은 수고의 땀을 흘렸지만, 그까짓 것 모두 포기하고 조용히 빠져 나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한번 택하셨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놓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한번 소명을 주셨으면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우리 교회보다 시설도 좋고 교통도 편리하고 재미있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교회들이 이 산호세 지역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손을 떼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하필 우리 교회로 보내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택하심에는 반듯이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중요한 목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요셉은 이 문제로 이렇게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20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하십니다. No, you must keep that woman as your wife.

마리아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멀리하려고 하지 말고 그 문제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여러 날을 고민하며 결정했던 자기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태복음 1:24절에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대목을 “요셉이 마리아의 특별하신 기름 부으심 때문에, 메시아를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요셉은 아직 그러한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아직도 가까이 하기가 께름찍 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까 “그 약혼자” 라고 하였습니다 혼인식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제 마리아의 배는 불러오는데, 만일 그 사실이 밝혀지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든지 망신을 당할텐데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 1절에 “Now in those days a decree went out from Caesar Augustus, that a census be taken of all the inhabited earth.”했듯이 그 당시 로마 황제가 자기 식민지 내의 백성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세금을 먹이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In those Days, 그 때는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을 두고 인구조사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와 혼인하기로 약속하기 전부터 이미 인구조사는 실시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같이 살았을 것이다” 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당시 상황이나 풍습상 그렇지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던 것을 보아도 나사렛을 떠나면서 그들은 이미 고향을 등진 것입니다. 여하튼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동거한 것이 아니라, 혼인식도 하지 않고 마리아를 데리고 곧장 베들레헴을 향하여 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그렇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요셉은 아름다운 결혼식도 포기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왔습니다. 자기의 목수라는 사업도 직업도 친구들은 물론 정든 부모형제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순결한 아내에 대한 소망도 모두 접어야 했습니다.

셋째,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순종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임신 중입니다. 첫 아이이기 때문에 특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먼 여행이나 힘든 일을 피하여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이와 산모가 같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과 베들레헴은 먼 거리입니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았던 그 당시, 요단 강변도로를 타고 내려오려면 최소한 일주일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도 중간에 강도 떼가 많았던 것을 누가복음 10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직선 거리로 오려면 산악지방이기 때문에 오다가 강도를 만나고 나귀를 빼앗기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먼 길을 강행하였습니다. 부모 형제의 축복을 받으며 아름다운 신혼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크리스마스를 위하여 그러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저절로 온 선물만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특별히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Extra 순종을 통한 엄청난 희생의 결과입니다. 누가복음 11:27-28절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당신처럼 훌륭하신 아들을 키우신 당신 어머니는 참으로 복 받은 여인입니다 라고 하자, 마리아가 축복을 받은 것은 아들을 잘 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고쳐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들어 오시려면 “주여, 내게 오소서”라는 외침의 기도도 필요하지만 특별히 마리아와 요셉 같은 순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순종으로 말미암아 치러야 할 대가가 아무리 엄청나다 할지라도 그 희생을 감수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크리스마스, 예수님께서 들어 오셔서 주인이 되시려면 마리아와 요셉 부부처럼 순종과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 특히 마리아와 요셉의 희생의 순종을 보면서 혹시라도 남편에게 혹은 아내에게 불평과 불만이 있으신 분들“하나님, 왜 하필 나 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내가 희생해야 합니까? 왜 이런 사람을 내 아내로 주셨습니까? 왜 하필 이런 남자를 내 남편으로 주셨습니까?”라는 불평이 “하나님 저를 택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여자를 아내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남자를 남편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 다같이 일어나셔서 가실 때 곧 오시마 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찬송가 104장 같이 부르십니다. 이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도 마리아처럼 요셉처럼 순종하겠습니다.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각오와 함께 찬송가 104장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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