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01

당신은 어디에 뜻을 두고 사십니까?

Posted by on Oct 01 2012 at 11:25 pm

다니엘 01:3-21절

(당신은 어디에 뜻을 두고 사십니까?) 

Ohio주 Cleveland 근교의 Lakewood에 있는 Harding 중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간논은 원래 멕시코에서 태어났습니다. 양 팔이 없이 태어난 그녀는 멕시코의 한 보육원에서 자라게 됩니다. 부모님이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이였더라면 바로 입양이 되었을 텐데 아무도 양 팔이 없는 이 아이를 입양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7살이 될 때까지 보육원에서 누가 입양해 주기만을 기다리며 눈치 밥을 먹고 자랍니다.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7살이 되던 어느 날, Cleveland 에 살던 한 가족이 그녀를 입양하게 됩니다. 보육원에 버려졌기 때문에 그녀는 미국 부부에게 입양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자라면서 자기도 다른 정상인처럼 잘 살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세웠기에 양팔이 없는 그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작년부터는 보조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녀가 그렇게 바랐던 정 교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자기의 실수로 오는 위기도 있지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간논처럼 그렇게 찾아오는 위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는 기회를 가져오게 됩니다.  절망과 좌절의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성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위기는 여하튼 기회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닥치면 그 위기를 극복하기 보다는 피하거나 Compromise, 타협을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능입니다.

물론 위기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으로 밀어 넣습니다. 하지만 간논처럼 위기는 뜻을 정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한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게하며, 그로 말미암아 절망과 좌절로 몰아 넣던 위기는 마침내 성공의 기회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도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짓밟히고 나라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남녀 노소 구별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면전에서 갈대아 인들의 칼날에 처참하게 죽어 갑니다. 자기 부모님들 역시도 그때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전쟁포로로 잡혔으나 다행히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한편 바벨론의 느부갓내살 왕은 자기 식민지를 영원히 통치하려고 민족 융화정책을 씁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에게 노예취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국민들보다 더욱 좋은 대우를 하여 줍니다. 그리하여 전쟁포로들로 말미암아 자기 나라에 대한 동경심을 잃게 하고, 바벨론 땅에 정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여 나라의 관리로 등용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감정을 없애고 바벨론 민족으로 동요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이미 장성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바벨론 식 교육을 시켰고, 바벨론식 음식을 먹게 하고, 바벨론식 예절과 모든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 방법이 성공적이어서 나중에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 때 불과 5%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정착하여 잘 살고 있는데 왜 예루살렘으로 고생하러 돌아 가느냐 면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하튼 바벨론의 이러한 계획으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 소년들 중 인물이 출중하고 똑똑한 소년 몇 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바벨론의 식민지였던 다른 민족들 중에서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 중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떠한 위기를 당했으며 어떻게 극복해 나아가는지 같이 보시면서 은혜 받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삶의 환경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 안에 살았는데, 거기서 매일같이 보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성전에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 예복을 입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 그리고 성경을 큰소리로 낭독하고 가르치는 소리 등을 들으면서 자라왔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열심히 섬겼는지는 모르지만, 믿는 집 아이들이 좋으나 싫으나 찬송소리와 성경말씀을 들으면서 자라듯이 그는 이미 습관적으로 하나님 문화에 젖어 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 왔습니다. 주변에는 우상이 가득하고 우상을 섬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혹시 우상숭배가 심한 선교지역에 가 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Los Altos의 Altos Avenue에 가는데 그 입구에 울긋 불긋하게 색칠해진 망부석 같은 우상이 우뚝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낮인데도 얼마나 놀랐는지 섬찟하고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래서 제 입에서 무의식 중에 나온 첫마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마귀는 썩 물러가라” 였습니다. New York에 사시는 저희 큰 누님 부부가 사업을 하여 꽤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Long Island에 대지가 2에이커나 되는 새집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에 계시던 시부모님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님이 완전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오실 때 불상과 불경 외우는 테이프를 가져와서 그 우상을 모셔놓고 밤이나 낮이나 항상 녹음 테이프를 켜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 큰 집안 가득히 향냄새가 나고 밤낮으로 중얼중얼 염불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누나가 병이 나 버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예수 믿는 사람이 밤낮으로 불경을 들으니 영이 눌려서 살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루는 이판사판이다 하고서는 시 부모님께서 외출한 사이 그 우상을 쓰레기통에 버렸답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이 시부모님들, 우상을 찾느라 난리가 난 것입니다. 우상이 안보이니까 불안해서 안절부절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온 집안을 벌집 쑤시듯이 해 놓고 마침내는 쓰레기 통에서 그 우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우상을 쓰레기통에 버린 장본인이 바로 며느리인줄 알고서는 “네 집에 다시는 안 온다” 라며 노발대발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두분 모두 돌아 가셨습니다.  당신들 말씀대로 다시는 오시지 못하신 것이지요. 쓰레기 통에서 조차 못나오는 우상을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지 참 한심하지 않습니까?

여하튼 오늘 본문의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날마다 눈만 뜨면 우상을 보며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보고 우상 앞에서 주문 외우는 것을 보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정말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멍 해졌을 것입니다.

두 번째 위기는 3-4절에 기록된 것처럼 바벨론 식의 새로운 지식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새로운 말과 인생의 하나님 적인 가치가 아닌 바벨론 우상식의 새로운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좋으나 싫으나 믿거나 말거나 유대인식 즉 성경에 의거한 지식과 지혜를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 라는 기본적인 틀이 머리에 꽉 박힌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고, 즉 생각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혀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힘으로도 가장 강력한 나라였지만, 메소포다미아 문명의 발상지였던 것만큼, 학문과 문화도 세계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잡혀오기 이미 수세기 전에 하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온 백성들을 다스렸을 정도로 정치도 최고의 수준이었습니다. 로마가 법치국가였다고 하지만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을 많이 인용하였으며, 결국 바벨론의 체제를 모방하여 발전 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학문과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그들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 기입니다. 사춘기때 막스 엥겔스등 공산주의 사상에 빠지면 걷잡을수 없듯이 자칫 새로운 지식에 훅 쏠릴 나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오하이오에서는 크리스천 School 을 다녔기 때문에 진화론에 대하여서는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California 주에 오자 갑자기 진화론을 배우게 되는데 지금까지 자기들이 배워온 것에 대한 혼선이 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DNA 구조가 발견되면서 진화론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물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인정되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할 때 창조론보다도 훨씬 더 많은 허점이 있습니다. 인류는 절대로 단세포가 발달하여 된 것이 아니다는 것이 유전자 구조를 통하여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창경원의 원숭이는 나중에 진화하여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과는 점차 더욱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 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이들에게 그 거짓 이론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하튼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바벨론의 새로운 학문에 엄청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위기는 새로운 음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음식이나 마구잡이로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 법이 따로 있습니다. 그 음식 법이 사람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거나 영적으로 더욱 신령하고 거룩하게 한다는 근거는 성경에서도 과학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양고기를 먹으면 유대인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영적으로 흐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리 찜이 부정한 음식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음식 법은 물론 심지어는 입는 옷까지 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음식만 보아도 입은 옷만 보아도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하라” 는 의미로 음식 법을 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실에서 공급하는 바벨론식 제복을 입어야 하고, 바벨론 왕실에서 공급하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제복이라는 것, 참 중요합니다. 평소에는 친구요 동창이었던 사람들도 일단 군복을 입혀놓으면 계급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제 초등학교 동창 둘이서 방위로 입대 하였는데, 하나는 다른 아이보다 3개월 먼저 입대하였습니다. 방위병 3개월이면 엄청난 차이더라고요. 어느 날 동네 잔치가 있었는데 이 둘이서 같이 왔습니다. 그리고는 동내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 고참이 3개월 졸병에게 군기를 잡겠다고 “일어나 앉아 차렷” 하는데 참 꼴 불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군복의 위력입니다. 바벨론식 제복을 입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벨론 왕의 수족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경찰도 제복을 입지 않으면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을 보아도 티켙을 줄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식 음식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그 산해진미를 포기 하였다고 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이 얼마나 맛있고 고급이냐가 아닙니다.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바벨론 백성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가 고기를 거절하고 채식을 선택한 것은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벨론 왕의 의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근거로 채식이 더욱 건강에 좋다는 일방적인 해설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채식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왕의 명령에 무언의 반항이요 자칫 항명죄로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목숨을 건 반항입니다.

네번째 위기는 자기들 이름입니다. 6-7절에 왕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합니다. 우선 히브리식 이름을 다음과 같이 개명해 줍니다:

 .Daniel – God is my judge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다. Belteshazzar – Bel will protect. 벨이 보호할 것이다.

 .Hananiah – God is gracious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Shadrach – Inspiration of the Sun 태양의 영감

 .Mishael – God is without equal 하나님은 특출하신 분이시다. Meshach – Belonging to Aku. 아쿠 신의 것

 . Azariah – The Lord is my helper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Abednego -Servant of Nego. 느고의 종

Nebuchadnezzar 왕은 이들의 이름을 고쳐 줌으로써 그들의 모든 생각하는 방향도 바벨론 식으로 변화 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 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 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하였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식탁에 오르는 그 맛있고 기름지고 좋은 음식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환관 장을 통하여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용단을 내리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하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고 살려면 반듯이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절제하고 포기하고 참아야 되는 것이 많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권을 샀다고 하는데, 야곱이라고 해서 팥죽이 먹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발각되면 죽을 각오를 하고 형의 외투를 입고 아버지의 축복을 구하러 아버지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장자 권을 빼앗고자 하는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반듯이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실기로 뜻을 정하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크고 많은 희생이 따르겠습니까?

요셉은 하나님을 위하여 세운 뜻을 이루기 까지, 노예, 죄수 생활 등 그가 지불한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 역시도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을 위하여 뜻을 세웠기 때문에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형제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더니, 나중에는 사울 왕이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전국 수배령을 내리고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굴속에서만도 수년을 지내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하나님을 위하여 뜻을 세웠을 때 희생하고 포기한 것은 좋은 음식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은 고기 반찬에 포도주를 마시며 흥겹게 놀 때 자신은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바벨론의 학문을 연마하며 학식을 자랑할 때 그는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뜻을 세우고 나아 가는 데는 반듯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쿨쿨 깊은 잠을 잘때 홀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디에 뜻을 세우고 사십니까?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우신 뜻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할 각오와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세우고 산다는 것은 눈 앞의 영광이나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 품에 가는 그 날 그 순간까지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늘 동행하는 삶입니다.

Henry Clay Morrison 은 1857년, 남북 전쟁을 이끈 아브라함 링컨이 태어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Kentucky 주의 시골 Barren County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당시 신앙적으로는 제 2차 영적 각성운동 끝에 일어난 시한부 종말론자 Miller 추종자들의 몰락으로 혼란기였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공장과 은행들이 문을 닫고 먹을 것이 없어 곧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시기에 쓸모 없는 땅 Barren County 시골에 태어났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의 나이 4살 때 남북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고, 아마도 이때 그의 양 부모님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 집에서 외롭게 살게 됩니다.
세상에 의지할 부모님을 잃은 그는 11살에 하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고, 이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는 19살 때부터 순회 설교자로 섬기다가 결국 부흥강사가 되어 Lexington Camp Meeting등 파격적인 영적 부흥의 불을 지핍니다. 그리고는 1910년부터 Asbury College 학장으로 섬기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꿈이 있어 중국 과 아프리카에 선교활동을 합니다. 그러던 중 부인께서 병을 얻어 치료 차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란이 일어납니다. 아프리카로 사냥 나갔던 루스벨트 대통령 일행이 탄 것입니다. 그리고는 대서양을 지나 드디어 뉴욕 항구에 도착합니다. 부두에는 양탄자가 깔려있고 군악대의 음악 소리가 요란하며 환영 인파로 가득합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잠잠합니다. 대통령 일행과 함께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병든 아내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배에서 내리는데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도 환영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고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가 병을 얻었는데 아무도 반겨주지 않다니, 마음이 참 쓸쓸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 집으로 가려고 터벅 터벅 걸어서 뉴욕의 Central Station 정거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Kentucky 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아무도 아는 체 하는 사람도 반겨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드디어 Kentucky 주 Lexington 아래에 있는 Wilmore라는 조그만 시골 역에 도착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입니다. 그 새벽에 자기들을 환영하거나 마중 나온 사람은커녕 역을 지키는 간수도 역원도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들 외에는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역에서 내려 집을 향하여 터덕 터덕 시골길을 걸어가는데 참 허무하였습니다. 하늘을 보니 그날 따라 밤하늘에 별들이 유난히도 밝게 비칩니다. 갑자기 너무 슬픈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대고 흐느낍니다, “하나님,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까 루스벨트 대통령이 받았던 환영은 내가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이렇게 희생했는데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지르던 남편이 갑자기 조용합니다. 그리고 잠시후 어깨가 들썩거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옆에서 남편을 의지하며 걷던 부인께서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으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슨 말이라고 하셨나요?”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Son, you are not home yet. When you come home I will welcome you more than what you saw today. 아들아, 아직 내 집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가 올 때에는 오늘 네가 본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한 환영식을 해줄께”

그렇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한 사람들의 삶에는, 주님 품에 안기는 그 순간까지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은 “The best part of our life is yet to come, 우리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도 그렇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생애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지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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