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30

Extra Mile 사랑(말4:4-6절)

Posted by on Aug 30 2012 at 06:03 pm

Extra Miles 사랑
(말 4:4-6)

                                                                                                             August 26, 2012

차에 기름을 넣으면서 주유소 이름을 보니 Extra Mile 였습니다. 같은 기름일 지라도 이 주유소 기름은 좋아서 Extra Mile을 더 갈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주유소 서비스는 Extra Mile 즉, Extra로 서비스를 더 해 줄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이름 참 잘 지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1절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하셨습니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싫다는 표정 짓지말고 기꺼히 십리를 동행하라는 기쁜 마음으로 Extra 5리를 더 가라는 Extra Mile Service 아닙니까?  이처럼Extra Mile Service는 예수님의 특허이십니다. 그런데 이 주유소 주인은 예수님께 로열티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허 문제로 지난 금요일 바로 여기 산호세 법정에서 삼성은 Apple에게 1조 2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유소는 한두 개가 아니라 전국에 퍼져있고 수십 년간 이 상표를 사용해 오고 있으니까 벌금으로 따지자면 1조원이 아니라 자기 주유소 다 팔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 교회도 Extra Mile Church 라는 별명이 붙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Extra Mile 사랑의 사역을 감당할 때 Extra Mile교회가 될 것입니다.

말라기 전체의 주제도 그렇지만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Extra Mile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중단한 채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며 마침내는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전에 이미 가뭄이 들어 농사가 안되게 하셨고 그나마 있는 것을 벌레들이 다 먹어 없애게 하는 아주 혹독한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자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를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기다리던 농사가 잘되고 외적이 물러가는 풍족하고 평안한 삶은 오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농사는 여전히 하자 다시 우상숭배에 빠져 버립니다.

이제 마지막 경고를 하십니다,“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심판의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호렙에서 내가 모세에게 준 율법을 지키라. 호렙에서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지키면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너의 병을 고쳐주고 마음의 상처를 씻어주며 자녀들에게 복을 주고 네 산업을 축복하여 침침한 외양간에 있던 송아지가 고삐가 풀려 이리뛰고 저리 뛰듯이 네가 기뻐 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때 저주로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런 경고 없이 그냥 갑자기 심판하시면 모두 멸망을 당할까 봐 하나님께서는 친히 엘리야를 먼저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심판이 임하시기 전에 엘리야를 먼저 보내 우리로 하여금 심판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시키시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Extra Mile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때처럼 심판하여 쓸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 Extra 기회를 주시는 Extra Mile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선포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주님의 크신 은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호렙산 사건이 여러분들의 삶에도 꼭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나의 말을 지키라” 혹은 “율법을 지키라” 라고하면 짧고 이해하기도 더욱 쉬울 것입니다.
말라기 당시에는 양피지나 파피루스를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일일이 붓으로 썼기 때문에 가급적 줄여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라고 길게 열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호렙산을 강조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산은 무엇을 의미하며 호렙산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를까요?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성장하였으나 자신의 신분이 왕자가 아니고 애굽 사람들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히브리사람임을 깨닫고 번뇌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애굽사람들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하고자 안간힘을 쓰다가 애굽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탄로가 나서 살인죄로 몰려 미디안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이드로라고도 하고 호밥이라고도 하는 미디안 제사장의 데릴사위로 들어 갑니다. 그는 처가의 양을 치러 호렙산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고통받는 자기 민족을 애굽의 식민지에서 구원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살인죄로 몰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좌절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40여 년을 살던 어느 날, 그 날도 여느 때처럼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불에 휩싸였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게 됩니다. 아무도 없는 이 적막한 산에서, 오직 한 그루의 떨기나무가 훨훨 타고있어서 너무도 신기한 광경인지라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 타는 불 속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모세야, 모세야! 네가 섰는 곳은 거룩하니 네 신발을 벗어라.”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이 양을 치면서 늘 다니던 곳입니다.  양도 다니고 자기도 다닌 그 평범한 장소를 하나님께서는“이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하십니다. 그 장소가 특별한 곳이 아니라 그 날 그 때에 그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에 거룩한 곳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거기서 사명을 받습니다,“가서 내 백성을 애굽의 식민지에서 인도해 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 이 장소가 거룩합니다. 건물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소명을 주실 것입니다. 떨기 나무에서 타는 불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예배 가운데에서도 역사하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 역시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그가 갈멜산 영적 전투에서 바알 제사장과 아세라 제사장 도합 850명을 죽이고 승리를 선포합니다.
이 광경을 다 구경한 아합 왕은 궁궐로 돌아와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 고해 바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결단코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자기 신 바알에게 맹세를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사마리아에서 도망쳐서 40주야를 걸어 그 멀고 먼 호렙 산에 이르게 됩니다. 호렙산으로 가는 노중에 너무지쳐 로뎀나무 아래서“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며 죽기를 구합니다.  그러면서 그 나무아래 쓰러져 누워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식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식물을 먹고 힘을 얻어 호렙산 굴속에 들어갔던 엘리야, 그를 기다리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하십니다.  그러면서 Go out and stand on the Mountain in the presence of the Lord, 굴 밖으로 나가 산위의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서라고 하십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굴 밖으로 나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선 모세처럼 호렙산에 섰을 때 폭풍이 요란하게 불어 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지진이 일어 나고 천지가 진동합니다.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나 하였더니 그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훨훨 타는 불이 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타는 불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처럼 요란하게, 지진처럼 지축을 흔들면서, 혹은 모세가 목격한 대로 훨훨 타는 불로 임하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의 선입견을 완전히 무너 뜨리셨습니다.

요란한 폭풍도 지축을 흔드는 지진도 그리고 훨훨 타는 불에도 안계셨던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간 후에, 자신의 선입견을 다 버린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러면서“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그로 하여금 아합 왕조를 무너뜨리고 네 목숨을 찾던 이세벨을 치도록 하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도 지치고 힘들고 하나님께 불평하며 원망하며 지낼 때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지치고 힘들어 쓰러져 누었을 때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받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지치고 힘드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면서도 힘드십니까? 모세를 보십시오, 그리고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던 호렙산으로 가십시오.  아니 지금 이 장소가 호렙산이신 줄 믿으시고 지금 이 시간 세미하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나의 모든 선입견, 미운 생각, 분노, 용서 못하는 마음, 질투, 욕심, 교만함, 편견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시고 주님을 다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세미하게 부르시는 음성 “진환아!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네가 섰는 곳은 거룩하니 네 신을 벗어라. 세상을 누비고 다니던 신발을 벗고 이제는 내가 신겨주는 신발을 신고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한 삶을 살아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Extra Miles 사랑의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준비시키십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그는 족보도 없는,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라는 기록 밖에는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을 방불하게 합니다.  그는 일정한 거처도 없었던, 주거지가 없는 Homeless 였습니다. 아무도 사망의 권세에 도전할 꿈도 못 꾸던 그 시절에 엘리야는 사망의 권세를 조롱하듯 불수레를 타고 홀연히 승천하였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게 하기 위하여 침례 요한이 왔으나 심판하러 오시기 전에는 실제의 엘리야가 인격적으로 오리라고 보았습니다.  순교자 져스틴(Justin Martyr)도 엘리야가 주님의 재림의 크고 무서운 날 선두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엘리야는 엘리야라는 사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엘리야를 보내십니까? 이제 곧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He will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to their children, and the hearts of the children to their fathers.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돌아서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아서게 하실 것이다”즉 아버지와 자녀간의 관계 회복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즉 아버지와 자녀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심판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며 구약성경은 끝을 맺습니다.

우리 말로 회복이라 번역된 히브리어shikhzur(שִׁחְזוּר)는 흙탕물이 가만 있으면 흙먼지가 가라앉아 저절로 맑아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회복이 아닙니다.  외부의 힘이나 강압으로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 아버지와 자녀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도 의미하지만, 가 가정의 아버지와 자녀간의 관계도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뜻은 우선은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 회복이요, 나의 신앙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회복입니다.

특별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리야 선지자가 주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이 땅에 다시와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 시키실 것입니다.
크릿 시내의 물을 마시며 은둔 생활을 하던 엘리야, 이방 신을 섬기던 제사장 850명과 외롭게 홀로 싸운 엘리야, 이세벨에 쫓기면서 죽기를 간구하며 사명을 감당한 엘리야 입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어 재 충전하고자 호렙산으로 겨우 기어 들어간 것입니다. 왜 하필 호렙산에 들어갔을 까요?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곳입니다.  호렙산은 지치고 번아웃된 자가 재 충전 하는 곳이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곳이요 새로운 사명을 받는 곳입니다. 호렙산은 옛 돌판을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향하여 던져 부수고 새로 갉고 닦아 새긴 돌판 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바로 그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는 재 충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 위하여 호렙산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대적 부름의 사명이 있었기에 호렙에서 새로운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유대 정통주의자들은 아직도 오실 엘리야를 기다리며, 절기 때마다 오실 엘리야 자리라고 하면서 자리 하나를 비워 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엘리야는 이미 이 땅에 왔다고 믿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믿는 것처럼 승천했던 엘리야가 지구상으로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혼탁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불의와 맞서서 신앙의 지키는 분들이 바로 이 시대의 엘리야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분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며 따돌림을 당할 지라도 회개하라, 오실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고독하게 진리를 외치는 전도자들이 바로 이 시대의 엘리야라고 믿습니다.

침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존재하는, 오직 하나님과만 교제하였기에 자신의 생각과 논리와 경험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생각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엘리야라 고 믿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8-9) 구원의 확신이 없이 예수님과의 만난 흔적이 전혀없이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 Go-er)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엘리야일 것입니다.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호의호식하는 제사장이 아니라 거친 광야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가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엘리야라 믿습니다.  목이 베임을 당하는 위협과 환난을 당하면서 까지도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 예수님을 위하여서라면 그 분께서 지워주신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질수있는 자가 바로 이 시대의 엘리야 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변화 산에서 모세와 함께 엘리야를 만나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엘라이 엘라이 라막사박다니” 하셨을 때 구경꾼들이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는가 보자”고 한 것처럼 예수님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엘리야, 우리는 그 분의 시대적 호소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각 가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회복의 핵심은 아버지들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이 서로에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그 핵심은 순종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보고 자녀들이 아버지께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일에 너무 바쁜 우리 아버지들, 그로 말미암아 각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현실은 자녀들에게 너무나 황량한 공허를 갖게 하였습니다.

George Bush 대통령의 어머니 Barbara Bush는 어느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허연 머리를 날리며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졸업생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이제 세상에 나가서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사업가가 되는 것을 가장 큰 일처럼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배우자에게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투자하는 것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하여 시험에 낙방하고 사업이 기울었다고 해서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시간을 더 많이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공하느냐의 핵심은 백악관에 있는 대통령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가정에 달려있습니다.

가정의 회복을 어떻게 이보다 더 강조할 수 있겠습니까?

North Carolina에서 사역하시는 미국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목사라고 해서 늘 집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North Carolina 주립대학으로 간 뒤 아버지와, 아니 가족과 연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왔는데 2학년 여름학기 때 노란 봉투의 편지가 하나 왔더랍니다.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도대체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썼을까?”아직도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대체 뭐라고 썼을까?”라는 호기심으로 편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첫 문장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참 잘못했구나. 이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였습니다. “내가 목회에 바쁘다는 핑계로 너와 같이 할 시간이 없었고, 너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고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구나”라고 편지는 이어집니다.  끌어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참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더 이상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외롭고 고독할 때마다 그 편지를 꺼내 기숙사 침대에 엎드려 읽었습니다.  그러면 어느덧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온기를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로 그렇게 싫어하던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로 갔고, 지금까지 North Carolina에서 재미있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 오셔서 우리와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 시키셨듯이 우리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자녀들과 진정한 화해를 청할 때 비로소 가정은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 앞에 큰 소리 치며 명령하는 것은 용감한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녀 앞에 무릎을 꿇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요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영적 가장만이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여호와의 그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 강조하십니다,“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지켜라” 그리고 그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요 또한 가정의 회복입니다.  이 시간 두 눈을 감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떤지 먼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지금 회개하여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듯이 아들에게로 딸에게로 다가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식 앞에 무릎을 끓어서라도 불편한 관계,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체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도 가정의 회복도 결국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도하십시오. 지금 회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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