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19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말라기3:7-12절)

Posted by on Jul 19 2012 at 12:19 am

오래 전에 영화 Love Story를 보면서 두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는 “사랑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입니다.  사랑은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이해하고 덮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는 관계다 라는 의미겠지요. 또 하나는 결혼 서약식 장면인데요, 주례자가“당신은 돈보다 이 여자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자 신랑 될 사람이“I do”하더라고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미국사람들은 돈만 밝히는 속물이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질문이야 말로 가장 실질적이고 중요한 것이었다 라는 것을 결혼한 후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돈보다 더욱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물론이지요 라고 당장 대답은 나오지만 부부싸움의 절반 이상은 돈 때문일 것입니다. 아내가 더 예버지고 싶어서 화장품 사는것 아까워해서는 아니됩니다. 아내 역시 남편 돈 못벌어 온다고 구박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잘 아시고 나도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구태여“I am sorry”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이십니까? 언제나 돈보다 하나님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극한 상황에서 돈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했을때 주저함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으십니까? 이러한 질문을 마음속에 두고서 오늘의 본문 말라기 3:7-12절을 같이 봉독합니다.

방금 본문을 같이 읽었는데요, 어떤 구절이 먼저 들어옵니까? 복을 받는다는 구절입니까, 아니면 십일조에 대한 구절입니까? 부담을 줍니까? 소망과 기쁨을 줍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부담을 갖게한다면 그것은 본문 말씀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선입견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일반 백성들보다는 주로 제사장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Florida에 젊은 청년이 있었는데, 교회에 다니면 사업도 잘되고 돈도 잘 벌릴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 가까운 침례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른 돈을 벌어 장가도 가야 되겠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기대했던 것처럼 월급도 오르지 않고, 돈이 참 안모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목사님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여러분들이 궁핍하게 살아온 이유는 하나님의 몫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창고가 넘치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불필요한 지출들이 다 막아질 것이요 여러분들의 사업은 날로 성장 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부터 시험하여 보십시오”

그 설교를 들은 이 청년, 귀가 확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옳다, 내가 한 3개월만 시험하여 보리라” 그리고는 그간 안하던 십일조 생활을 하였습니다. 한푼이라도 잘못 계산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을까봐 아주 철저하게 계산하여 드렸습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두달이 지나 갔습니다. 그래도 돈이 더 벌릴 아무런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간 않던 십일조 생활을 하다보니 생활은 오히려 더욱 궁핍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로 잘하는 짓일까? 십일조를 낸다고 해서 과연 돈이 더 잘 벌릴까 점차 의심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큰 맘먹고 석달째 하였습니다. 하지만 석달이 지나고, 그리고 한주가 더 지나고, 그리고 또 한주가 지나가도 돈은 더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간 십일조 낸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날은 화가 치밀어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께 “내가 당신 설교를 듣고 매달 십일조를 꼬박꼬박 냈는데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힘들어 졌습니다.
내 돈 당장 내 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기죄로 고발하겠습니다.”

목사님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요.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문제요. 그러므로 고발하려면 하나님을 고발하십시오.”
그래도 이 청년은 매일같이 교회에 찾아와 힘들게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집사 한분이 “당신은 하나님도 오해하였고 설교말씀도 오해하였소.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려고 교회에 다닌다면 어느 교회를 간다해도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이 돈을 줄테니까 당신의 오해를 푸시오”라고 하여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받을 자들이 복을 받을 준비는 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와 복 받을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요 권면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라 정하였습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고 싶은데 받을 준비는 하지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 법도와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집나간 아들을 찾으시는 심정으로 속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까? 14절에서 그 이유를 알수 있는데“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였듯이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푸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자면,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고 말씀듣고 힘들게 헌금도 하였는데 자기들이 바라던 축복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사업도 잘되고 직장에서 승진도 되어 돈도 많이 벌리고 아이들도 공부 잘하여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해야 되는데 항상 그렇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벽재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 애걸하여도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별로 없더라는 것입니다. 암걸린 남편을 위하여 추위와 더위와 무서움과 외로움을 다 견디며 2년동안이나 새벽재단을 쌓았는데 남편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권력도 주셨으니 이제는 돈도 더 많이 주십시오, 솔로몬처럼 큰 부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은행이름을“솔로몬”이라 하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십일조 철저히 드렸는데 결국은 쇠고랑을 차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 편입니까?”라는 탄식이 나올만 하지요.

예수를 믿으면서도 물질관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세상적 물질관을 벗어나지 못하면 누구에게나 이러한 이해 타산적인 불평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당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제사도 드리고 힘든 율법을 억지로 지키느라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하기 짝이없는, 정말 그들 표현대로 서글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 이 유익하리요”하며 탄식한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적임을 다 알고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천국이야 죽을 때 생각할 일이고 우선은 돈벌어 편히 살고 싶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나님께 실망한 제사장들은 자기네들 표현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기만 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날마다 오줌 똥에 범벅된 짐승을 바다라고 불리는 큰 솥에 물을 가득채워 넣고 같이 들어가 깨끗이 씻습니다. 이 때 짐승에 채여 눈이 멀거나 다리가 부러지고 고환을 다쳐 평생 제사를 집전하지 못하는 제사장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렇게 씻은 짐승을 잡아 배를 갈라 이물질을 버리고 살 고기는 사시미 뜨듯 하나하나 세밀히 각을 뜨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아무리 열심히 양을 잡고 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려도, 힘만 들지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웃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않고서도 자기네들 보다 더 잘먹고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터놓고 음란한 생활을 하여도 병 걸려 죽지도 않고 더 잘살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의 하나를 어기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죄책감만 느껴지고, 아까운 짐승 실컷 잡아서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단불에 태우고,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인가 그들은 회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욕구나 채워주시고 밥만 먹여주시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주일날 교회가기 보다는 돈을 번다든지 어디 구경을 가거나 월요일부터 일할 것을 생각하면서 푹 쉬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데 신앙 양심상 찔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쩔수 없이 교회에 앉아 있으려니 참 한심하고, 당시 제사장들의 표현대로 현실이 너무 서글퍼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입술로는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적으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도 현실 상황에 집착하는 것 아닙니까?

당시 제사장들은 비록 형식이나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제사를 철저히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위한 생활수단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짜피 태워 없애는 것인데 하면서 좋은 것은 자기들이 따로 챙겨두고 병들고 비루먹고 더러워 먹지 못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1:8절에”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 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 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 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고 책망하였고 1:13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 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제사장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되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 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 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일조 드리면 다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까? 너희들이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그러한 가운데서 십일조를 정성껏 그리고 온전하게 드려 보아라. 너희들의 생활에 손해가 되던 안 되던 그런 것은 따지지 말고 하나님 약속대로만 해 보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너희가 알 것 아니냐?”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고 하시면서 왜 십일조를 말씀하십니까? 차라리 금식기도를 하라고 하든지 아니면 한 100일동안 성전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기도하라고 하던지 하지 왜 하필이면 치사하게 돈을 거론하십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물질, 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니께서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짐승들도 보면 순전히 먹을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그들의 일과입니다. 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꿀을 비축해 둔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들이 먹으려고 쌓아 두는 것 사람이 빼앗아 먹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본능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저 영원한 천국에 인도해 주실 하나님과 맞서서 우리를 유혹할 수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 사단? 아닙니다. 물질, 돈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38개의 비유에서도 16개가 물질, 돈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약 300 여 구절이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 500 여 구절이 믿음에 대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물질에 대한 구절은 무려 2,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성적인 유혹이나 명예욕심보다도 더 자주 경고하신 것은 바로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것은 물질이 우리의 삶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유혹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면역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정치가들은 물론 교회내에서도 물질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저는 권력이 돈 위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들도 돈에 넘어가는 것을 보면 돈이 권력 위에 있더라고요. 돈으로 권력도 사고 여자도 사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믿는자들에게 가장 큰 도전은 물질관입니다. 이 물질관만 올바르게 밖혀있으면 시험들일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시험은 물질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물질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은“내게 돌아오라”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싸늘합니다,“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까?”돌아가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안식일날 모여서 예배드렸고, 십일조와 제물도 드렸고, 기도하라고 하여서 성전 앞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도 했는데 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고 하십니까? 율법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지키며 살았는데 도대체 왜 책망하시는 것입니까?”회개할 일 하나도 없는데 왜 억지로 회개하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제사드리는 것을 번폐스럽게 생각해서 대충 드리고, 비루먹고 눈먼 것을 제물로 드리고, 조강지처를 쫓아 내고 이방여자들과 혼인을 하는등 그들의 문제점들을 조목목 열거하여도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랬습니까?” 하며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물질문제, 십일조를 거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에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이 온전한 금액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어떤 의미인지에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크게 다르게 이해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42절에“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정확한 액수입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아닙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값비싼 박하에서부터 텃밭의 채소까지 철저히 계산하여 바치고서도 예수님으로부터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스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은 정확한 액수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대복음 22:35-40절에“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 하셨듯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는 물질적 계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본질적인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가난한 고아나 과부및 나그네등 이웃을 돌보아야 할“사랑의 의무”를 져버렸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온전한 액수를 드리면서도 저주받을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온전한 액수에만 치중하지 말고 온전한 마음까지 드려라”

원래 십일조는 우선 레위족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로, 그리고 축제 및 성전 기물을 보수하거나 마련하는 비용으로, 그리고 고아나 과부, 나그네들을 위한 구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가져오지 않자 먹을 양식이 궁해진 제사장들이 모두 생활비로 충당했습니다. 짐승도 살지고 좋은 것은 잡아먹고 병들고 비루먹는등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을 제사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나마도 없게 되니까 급기야는 성전을 떠나 제사장직을 버리고 평민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지도자들을 잃은 백성들은 더욱 타락한 삶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온전한 액수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원리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첫째,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물질, 건강, 시간,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의무감에 젖어 아까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셋째, 우선 하나님 몫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인애와 사랑을 기억하며 가난한 이웃에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한달에 한번씩 Homeless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 구제사업을 확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전한 마음과 태도로 십일조를 정성껏 드릴 때,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가 황충을 금하겠다, 포도나무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겠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게 해주겠다, 그리고 열방이 너를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라고하신 약속이 이루오 질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정성껏 드릴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우리 교회에게 이러한 엄청난 축복을 부어 주실 것이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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