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23
그리스도인의 가정
(말라기 2:10-16)
오늘은 아버지 날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어머니 날은 성대하게 지내는데 비하여 아버지 날은 조촐합니다.
아마도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돌아가는 것이겠죠.
이 땅에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가정이 존재하기나 하겠습니까?
저는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존경합니다.
지금은 노인대학에 다니시지만 공공 교육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으십니다.
그야말로 무학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한글을 깨우치셔서 맞춤법은 다 틀리지만 여러 해를 걸쳐서 성경 신 구약을 다 쓰셨습니다.
두툼한 노트가 두 권이나 되지요.
그리고 아들 삼형제를 미국에 유학시켜 박사학위를 받게 하였으니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 믿고 있는데, 그 때에는 “예수님 대학교”를 설립하여 저희 어머님처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분들에게 소정의 과정을 거쳐 대학 졸업장도 주고 졸업 여행으로 성지순례도 좀 시켜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님들이 이처럼 위대하기지만 아버지들도 위대하십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남자보다 힘이 약한 여자에게 애를 낳으라고 하셨을까?
만일 남자에게 애를 낳게끔 창조하셨더라면 아마도 세상은 요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질 급한 남자들이 애를 낳으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자기 몸이 다 망가지면서까지 불룩튀어나온 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또한 하늘이 노랗게 보이도록 아픈 산고를 치러 애를 낳고 젖을 물리며 애를 키우려고 하겠어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남자들아!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일하여 처자식들을 돌보라고 내가 너를 여자보다 강하게 만들었노라”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자하고 남편하고는 다릅니다.
세상 여자가 모두 자기 아내가 아니듯이 세상 남자가 다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결혼하여 맞아들인 오직 한 남자만이 자기 남편이지요!
그리고 결혼하여 남편이 된다고 해서 저절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반듯이 자녀를 낳아야 됩니다.
연구를 많이 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아버지가 되는 것 아닙니다.
자격시험을 보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부부간의 금슬이 좋아도 자녀가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이 특권에 따른 책임도 많습니다.
이 책임을 잘 한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이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는 좋지 못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의 날을 맞아 Washington Post지는 라이스대학의 대통령학 전문인 브링클리 교수에게 역대 대통령의 아버지들 가운데 좋은 아버지 셋 그리고 나쁜 아버지 셋을 뽑아 달라 부탁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브링클리 교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아버지, 아버지 부시의 아버지, 그리고 애담스 대통령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들로 뽑았습니다.
왜 케네디 아버지를 안 뽑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국 대사를 지냈던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단체나 공공기관에 돈을 기부하고 일부러 자기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자기 대신 자기 어린 아들들을 보내 연설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John F. Kenney 가 어렸을 때부터 연설을 잘 하게 되었더군요.
이처럼 좋은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Gerald Ford 대통령은 아버지의 술과 폭행으로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생후 겨우 16일 된 Gerald를 데리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긋지긋하였는지 재혼하여 아들 성(Last Name)도 전 남편 것을 버리고 새 남편 성을 따 Ford 라 바꾸어 버렸습니다.
Bill Clinton 대통령 아버지는 클링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였는데, 그의 step father는 매일 술 먹고 어머니를 때리니까 한번만 더 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여하튼 자녀들에게는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아니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유대인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오히려 아버지의 역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여자가 이방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 남자를 유대인화 시키는 것으로 여기며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 드립니다.
하지만 유대인 남자가 이방인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유대교를 떠나는 행위처럼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난 자녀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며 이해 하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한 형제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과 겨뤄 이기신 이스라엘 백성이며,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 내지는 우월사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백성들 외에는 모두 이방인들이며, 이방인들을 자기 민족보다 열등하다는 의미에서 야만인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직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헬라어를 하는 자들은 Gentile 이라 불렀으며, 헬라어를 모르는 자들은 야만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Gentile 이라 할 때에는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로마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를 잘 구사할 줄 모르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는 barbarian, 즉 야만인들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선민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혈통을 지키고자 노력하게 하였으며 결국 근친결혼이 성행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순수하고 순결하며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포기한채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의 길로 빠져가는 것에 대한 책망과 심한 경고입니다.
우선 10절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책망합니다.
우리들은 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형제들인데, 왜 서로 돕고 희생의 사랑을 하여야 할 같은 형제들끼리 거짓말을 하고 속이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방인을 속이는 것도 금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를 속이는 것은 더더욱 금지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행위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제들끼리 왜 속이느냐, 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어놓은 언약을 파기하느냐 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일찍부터 혼자가 아니라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기심 때문에 생기는 거짓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단순히 물질문제가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물질에 시험이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은 것은 물질에 시험이 든 그 자체가 아니라 성령을 속인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기심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였던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으로 시작된 교회가 막 성장해 나가는데, 갑자기 이기심이 발동하여 각기 이기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그 교회는 과연 몇 일이나 가겠습니까?
본문 12절부터는 개인간의 관계를 좀더 확장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소단위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가족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 중에서 누가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이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해 나가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본문은 무엇이라 가르칩니까?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이 젊었을 때 결혼하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같이 고생해온 자기 아내를 버리고 이방의 젊고 예쁜 여자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이 왜 자신들의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방 여인들과 혼인을 해야 했는지에 대하여서는 그들 나름대로 정당화시킬만한 이유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당장 오는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의 축복은 그들이 예상했던 시일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의 위협은 더욱 심해가고 경제적으로는 더욱 궁핍해져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그들의 부를 나누어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명분상 그들과 혼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저 명분상 혼인이지 조강지처를 버리고 가정을 파괴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방인의 칼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여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왜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젊은 이방인 여자들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현명한 조치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 외에는 별다른 수단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게 감히 돌을 던질만한 명분도 없었습니다.
요즘 세상이 힘들고 대학을 졸업해도 직업 잡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제 큰 아이도 심리학을 전공하였으면서도, 어느 나라에 가서든지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두 개나 땄습니다.
그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면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영어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밥은 굶지 않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Double Major를 합니다.
제가 Computer Science를 석사학위를 할 때 인기 있던 학위는Business Management & Computer Science 복수 전공이었습니다.
Computer Science 석사는 36학점이면 마치는데 여기에 18학점만 더하면 Business Management 석사까지 주었습니다.
그래서 Computer Job 이 안되면 Business Management Job 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미련하게 한 가지로만 All In하지 않고 이 길이 아니면 저 길로, 즉 비가오면 우산이 필요하고 비가 안 오면 양산이 필요하니까 둘 다 준비한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이 가르쳐 주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드렸는데, 같이 살다 보니 자기 생각과는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자기 아내, 젊어서 같이 고생하며 살아온 조강지처는 이미 늙어서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이방 여인과 살다 보니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 보인 것입니다.
젊은 여자들에 쏙 빠져버린 그들은 이방여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점차 그들의 삶에, 그들의 풍습에 젖어 들게 되고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여인들이 원하는 대로, 조강지처인 유대인 부인과 이혼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유대인 부인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이방 여인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방 여인의 요구대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여인에게서 난 아이들은 물론 자신들도 유대인적인 삶과 점차 멀어져 가고 이방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유대지파 후손들이 먼저 행하였더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긍지에 비하면 별 것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의 자랑은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질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일부가 르호보함 을 따르게 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들을 다 화해시키고 구원한 요셉이 지도자인 것 같지만, 유다가 지도자였습니다.
야곱은 창 49:8-10절에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가 네 형제들뿐만이 아니라 그들 후손들 모두의 지도자요 네 후손 중에서 메시아적인 지도자가 나올 것이라 하였는데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더 있겠습니까?
다윗 왕도 유다 지파요 메시야도 결국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 유다 지파가 앞장서서 타락했으니 이 어찌 할 것입니까?
이제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자기 조강지처인 유대 여인과 이혼한다는 의미는 단순이 남녀가 갈라서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Divorce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떠나 버리는 것,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결부시켜 말씀합니다.
즉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것은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서 곧 하나님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는,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방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유대 여인과 이방여인 두 아내가 있듯이 그들은 하나님과 이방신을 동시에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은 하나님과 이혼하기에 이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God hate divorce, 하나님은 이혼을 아주 싫어하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심리상태 아닙니까?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정성껏 예배를 드립니다.
준비한 희생의 헌물과 십일조를 드리고 간절히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당장 월요일부터는 세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내다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가 나의 작은 이기심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작은 이기심, 한번만 혹은 잠시 동안만, 혹은 언제든지 그만들 수 있으니까 라며 시작한 행위가 결국은 나의 삶을 지배해 바리고 만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혼을 하고 가정을 파탄시키려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내 몰래, 남편 몰래, 자녀들 몰래 훔쳐보고 연모하다가 진전되어 관계가 깊어지다가 꼬리를 밟혀 하는 수 없이 파국을 맞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그럴 때 그 피해는 가장 심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단순한 가장이 아니라 가정의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삶은 가족, 특히 자녀들의 신앙에 거의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마친 루터의 아버지는 루터를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그 당시 평민이 귀족으로 진출하는 길은 변호사가 되거나 신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 아버지는 머리 좋은 루터가 변호사가 되어 아들 덕에 귀족소리를 듣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들 루터를 변호사 학교에 집어 넣었는데, 어느 날 친구와 길을 가다가 같이 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그는 하나님께 맹세를 하고 사제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가 서품을 받고 사제식을 할 때 자기 식구들을 모두 초청하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변호사가 되지 않고 신부가 된 것에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날 파티에서 술을 잔뜩 먹고 온갖 행패를 부립니다.
그가 그런 아버지를 얼마나 싫어하였는지 훗날 그는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어머니였으면 좋겠다” 라고 고백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느끼기 힘듭니다.
아버지로부터 폭행이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기가 힘듭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들이 탈선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기심이 아닙니까?
불륜이나 비리는 물론 사소한 죄악도 더러는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어느 장례식에 갔더니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하여 소개를 하는데“우리 아버지는 늘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아마 앞으로 아버지의 그 모습이 가장 보고 싶을 것입니다”라며 회고하였습니다.
제 관 앞에서 제 아들은 뭐라고 말할까 한번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테레사 수녀님의 인기가 최고일 때 미국의 한 기자가 어렵게 수녀님과의 인터뷰 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인터뷰한 내용이 전 세계 언론에 실리게 될 것을 생각하니 너무도 흥분되었습니다.
그는 무슨 질문을 할까, 무슨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할까 여러 날에 걸쳐 질문 리스트를 작성하여 충분히 연습을 한 뒤 마침내 인터뷰에 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수녀님!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들 중 수녀님께서 생각하실 때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수녀님은 “가장 큰 문제? 그리고 가장 시급한 문제? 자네 가정일세. 자네가 속히 가정으로 돌아가서 사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일세”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들이여! 힘을 내십시다, 기도의 힘을.
아버지 날에 가족을 위하여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를 하고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며 좋은 시간을 갖는 것도 매우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더욱 시급한 것은 아버지가 영적인 가장으로서 먼저 이기심을 버리고 가족을 위하여 더욱 낮은 자세로 주님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이 아닐까요?
구약,말라기,설교및 말씀자료,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