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8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라
(말 라기2:1-9)
말라기 1장은 백성들이 성전제사를 소홀히 여기다가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는 행위로까지 치닫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긴 그들은 제사 희생물로 병들고 비루먹은 짐승들을 가져오더니 나중에는 제사에 제대로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 건너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을 따라갔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제사,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제사는 아까운 짐승만 죽일 뿐 아무런 능력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짐승을 아무리 많이 잡아서 제단에 드려도 성령의 역사가 없는 제사는 절망 속에 빠진 자들에게 아무런 소망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속죄 제라고 짐승에 안수하여 잡아서 하나님께 태워 드리지만 여전히 죄책감에 빠져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들에게 형식적인 성전제사는 더이상 필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면서 죄악에 빠진 채 소망이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다고 오늘 본문은 제사장들을 정죄합니다.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할 너희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의 길을 향하였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백성들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백성들이 죄의 길에 빠졌다며 호되게 책망하시며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며 죄의 길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소리를 듣는 나라마다 예외 없이 크리스천들의 숫자는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한국도 1992년을 분기점으로 크리스천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결국 교회의 총 책임자이자,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의 책임입니다. 말라기 시대에도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타락이 어찌 우리 만의 탓입니까 라며 억울한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어찌 목사들만의 잘못이냐며 항변하고 싶겠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문제들은 주님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이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물론 다른 이유들을 댈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담임목사인 제 탓입니다. 괜히 순교자적인 변론을 펴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제가 잘못 행하고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여 봅니다, “예수님! 건강하게 잘 성정하는 교회의 담임목사들이 하는 것을 제가 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하여 마음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자나 선포하는 자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임하시기를 그리고 마음속에 큰 도전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밝힌 당시 제사장들이 잘못한 죄를 보면: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2-3).
하나님의 이름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제사장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의 이러한 권세와 능력을 영화롭게 하는 것, 즉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온전히 인정하고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는 삶,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A.W. Tozer 는“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당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입니다”라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분과 나는 어떤 관계냐 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분이 아무리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다 할지라도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더이상 생각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나와 깊은 관계라면, 그 분이 나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분이라면 그 분에 대한 나의 태도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그 분에게 달려있다면 나는 그 분을 기쁘게 하고 그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의 뜻을 첫 번째 우선순위로 놓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분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나의 인생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면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즉 지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지 전능하신 분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의 여러 호칭 중에서 이 호칭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위대한 능력의 호칭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믿고 그 분을 그렇게 대우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로는 우리 아버지가 최고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생각과 전혀 상관도 없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 덕에 아버지의 집에서 편히 먹고 자면서 아버지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무시를 당한 느낌이면 엄청나게 화가 납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존경하고 앞장서서 섬겨야 할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앞장서서 무시하고 업신 여겼다고 엄중히 책망했습니다.
둘째, 제사장들이 먼저 하나님의 길을 떠났습니다.(8절 상단)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업신 여기다 보니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창자가 왜 아버지를 떠납니까? 형의 구속을 떠나 입신출세를 원하는 자신의 미래에 아버지의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무시하고 살아계신 아버지를 죽은 자처럼 여기면서 유산을 물려달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약 70마일 떨어진 Dyersburg라는 아주 조그만 시골에 James 라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골구석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아주 가난하게 사는 자기 부모님들이 정말 싫었습니다. 너무 가난하여서 집안에 번듯한 가구 하나 없고 침대는 다 낡아서 삐걱거리며 소파는 낡아서 용수철이 툭 튀어나온 우중 침침한 집, 그래도 무엇이 좋다고 아침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자기 부모님이 정말 바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지긋지긋한 시골을 떠나 멋지게 살아야겠다. 난 절대로 우리 부모님들처럼 멍청하게 살지 않을 거야. 도시로 나가서 돈도 많이 벌고 예쁜 도시 아가씨와 결혼을 해야겠다”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획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떠나 큰 도시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예상했던 것처럼 세상이 그리 쉽지도 너그럽지도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무슨 경험이 있었겠습니까? 기술이 있습니까? 경력이 있습니까? 거기에다 TN 시골의 Hilly belly 사투리까지 쓰는 그를 접시 닦기 외에는 아무도 환영해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 식당 저 식당에서 Busboy로 전전하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술과 마약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자 그는 자기를 뒤쫓던 경찰을 쏘게 됩니다. 알고보니 결혼 5년 차 4살 난 딸을 가진 가장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사형언도를 받게 됩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며 진정으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면회 온 미망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마지막으로 면회 온 목사님께 “목사님, 저는 죽어도 쌉니다. 저는 정말 나쁜 놈입니다. 제 부모님을 무시하고 가정을 떠났던 것이 가장 죄송스럽고 후회스럽습니다. 소파에 엎드려 늘 기도하시던 어머님의 기도소리가 그립습니다. 엄마 아빠 사랑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을 무시하면 부모님이 싫고 부모 곁을 떠나고 싶듯이, 하나님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예배 드리는 것이 오히려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편하고 자유롭게 할 것 같은 그 길은 곧 파멸로 이어지게 됩니다.
셋째, 제사장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이웃을 파괴합니다(8하단)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들은 개인 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술 주정뱅이가 다른 사람과 시비를 걸고 멱살을 잡았다 해도 신문에 대서특필 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목사가 그랬다 하면 도대체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9:14-16절에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하게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받는 도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다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하셨습니다.
나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지옥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된다면 어떻게 성경을 심각하게 묵상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나의 무책임한 가르침으로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한 영혼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 넣게 될 수 도 안다면 우리의 말씨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이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거룩을 우리는 닮아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학사 에스라는 에스라 7:10절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Ezra had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and observance of the Law of the LORD, and to teaching its decrees and laws in Israel. 에스라는 백성들을 잘 가르치기 위하여 대단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우선 율법을 철저하게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연구한 율법대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전에 우리에게도 반듯이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더럽혔다(8절 끝부분).
하나님이 레위와 세운언약의 목적은 일련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를 갖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도 주시고 기쁨도 주시고 때로는 책망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레위와 세운 언약이라 하였는데 창세기 29:34절에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했습니다. My husband will become attached me because I have born him three sons라고 한 것처럼 레위의 언약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평화, 샬롬의 관계를 말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샬롬은 그저 마음속의 평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잦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샬롬이란, 마음은 물론 육신의 평강을 의미합니다. 즉 육신적으로 다친 데 없이 건강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며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평안이 찾아오는 그러한 평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리지 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는 물론 적으로부터도 온전히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신다는 언약을 레위 족속을 통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언약을 파기했다고 하십니다.
일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파기하는 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히 이 언약을 파기했다고 합니다. 이제 제사장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떠난 대가는 무엇입니까?
2절에, 만약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벌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을 징벌할 그 채찍으로 우리를 징벌하시겠다는 경고이십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을 붙잡지 않으면 다음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경고합니다.
첫째, 그들의 축복 위에 저주를 보낼 것이다.
2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으면 저주를 내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들의 축복 위에 저주가 내리게 한다는 말씀은 제사장이 축복을 구하여도 효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중요한 책임과 의무중의 하나는 백성들에게 축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 즉 제사장의 축복 권을 빼앗아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3절에“보라 내가 너희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Because you I will rebuke your descents”하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이 내일 나의 후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 우리 후손들의 앞날에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요,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의 앞날에 축복이 임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 후손들의 삶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내가 무엇을 어떻게 심느냐에 따라서 나의 후손들의 운명이 좌우된다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심는가 어떻게 심는가 삼고초려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제함을, 버려짐을 당할 것입니다.
3절에 가서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성경의 그 어느 곳도 이보다 강력하고 심한 표현은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짐승을 가져오면 우선 물로 씻은 다음 목을 찔러 피를 빼냅니다. 그리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냅니다. 내장을 가르면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 찌꺼기와 함께 똥이 나옵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역겹고 더럽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은 얼른 버립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비루먹고 병든 짐승을 가져왔는데, 비루먹고 병든 짐승은 더욱 지저분하고 더럽습니다. 그리고 뱃속에서 꺼낸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들은 냄새가 엄청나게 심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을 제사장의 얼굴에 바르겠다는 것입니다. 보기만 해도 더럽고 역겨워 견딜 수 없는데, 그것을 얼굴에 바르겠다니 이것 정말 말이 됩니까?
또한 짐승의 똥은 불결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하여 깨끗하게 한 후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불결한 것이 얼굴에 묻었으니 제사장 자신도 불결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똥과 함께 제하여 버리신다는 경고입니다.
당신의 제사장들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말씀을 마음 속에 새겨두지 아니하면 그렇게 엄청난 수치, 견딜 수 없는 악취가 나는 수치를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도 나훔 3:6절에“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라고 경고하였는데 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 양광을 돌리지 않으면 이러한 엄청난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향하여 이렇게 아주 심하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감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대 제사장이 되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백성들은 모두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베드로 전서 2장9절에는“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서로의 직책은 다를지라도 저나 여러분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계시록 1:6절에도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선택을 받은 특별히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남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총 책임자, 우리의 대 제사장 된 분 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도 책망을 받으시지만 그 분도 바로 우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십니다.
얼마 전에 법정에서 참으로 눈물 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싸움질하고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말리는 선생님을 폭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이 법정에 끌려와 판사 앞에 섰습니다. 고개를 축 숙이고 있는 그에게 판사가 판결을 내리려고 하자 방청석 맨 앞에 앉았던 한 여인이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이 뛰쳐나가더니 바닥에 쓰러진 채 판사를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탄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판사님, 제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저를 벌해 주시고 내 아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원하시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순전히 내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나 대신 매를 맞으신 우리 예수님! 내가 실족하고 내가 죄를 지었는데 매는 주님께서 맞으시고……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주님께서 달리시고 피를 쏟으시고……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된 제사장으로서, 나의 잘못 때문에 지금도 호소하시고 탄원하시는 우리 주님을 생각하며 이 시간 우리 새 찬송가 282장을 부르면서 다시 한번 헌신하는 시간을 가지시지 않으시겠습니다. 통합 찬송은 339장입니다.
이 시간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통성으로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놈이 나쁜 놈입니다.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참 잘못 살아 왔네요.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목사로서 잘못된 점들이 너무도 많네요. 내 얼굴에 부끄러운 짐승의 똥이 발라지지 전에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특별히 레위에게 주신 사랑과 평안의 언약을 지키도록 잘못된 점을 고치고 더욱 바르게 살겠습니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다짐하며 기도한 대로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약,말라기,설교및 말씀자료,주일 설교,책별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