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말1:6-14)

Posted by on May 20 2012 at 09:26 am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라기 1:6-14절)

지난 번에 본 것처럼 바벨론 포로에서 놓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힘든 가운데에도 성전을 건축하고 나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자기들의 삶이 무척 풍요로와 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먹을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외적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믿고 열심히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던 그러한 축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여기에 따른 불만이 점차 커져 갔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제사는 드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보다 더욱 의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제사 때면 여전히 짐승을 잡아 희생물을 드립니다.
하지만 흠없고 순전하고 살진 것은 나중에 자기들이 잡아 먹으려고 보관해 두고 병들고 비루먹어 어짜피 처분할 것들 만을 골라서 드립니다.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라 제단 위에 놓고 태워버리는 것인데 왜 살지고 좋은 것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논리적으로는참 맞는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보았자 우리의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럴려면 무엇 때문에 좋은 것으로 골라 드려야 하느냐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어떤 것이 아깝겠습니까?
더 좋은 것 더 많이 못 드려서 한이이지요.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살진 소는커녕 병들고 비루먹은 것도 아까운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몸은 하는수 없이 와 있지만 마음은 이미 멀리 다른 곳에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William Shakespeare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남자가 가장 슬플 때에는 자기 품에 안겨잇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눈을 맞추고 있을 때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드리는 제사, 오늘날로 말한다면 예배를 무시한 행위는 결국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주인, 우리의 아버지 되심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저 막연한 분이시지 실제로 살아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하게 책망하고 질책하십니다.

우리가 매주마다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는 예배가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의 승리는 신앙생활의 승리로 이어지고 결국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예배에 실패하면 신앙생활에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생에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려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고 예배를 받으시려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설립목적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예배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나 선교를 하는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믿는자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타 문화권 사람들을 초청하면 이것을 선교(Mission)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일 문화권 사람을 초청하면 이것을 우리는 전도(Reach out/Evangelism)라 부릅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예배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실패한 그 근본원인을: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본문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였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다 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능력, 권능을 δυναμις(Dunamis) 라고 합니다. 영어의 Dynamite 가 여기서 왔는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엄청난 Power 를 δυναμις 라고 합니다.
우리를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능력, 병을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일어서 걷고 뛰게 하시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 δυναμισ 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을 세상 그 무엇이 감당할수 있겠습니까?

작년에 일본에 쓰나미가 일어 났고, 아직도 복구되려면 수십년은 걸려야 할 것 같은데요, 왜 어떻게 그러한 엄청난 쓰나미가 일어 납니까?
과학적인 설명은 이렇습니다.
지구는 겉은 흙과 물이 있지만 그 중심은 끓는 용암, 즉 바위와 쇠등이 녹아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욥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위에 육지 조각들이 떠 있고 그 위에 바다도 있고 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5대양6대 주로 되어있는 이 지구가 사실은4조각으로 나뉘어져 끓는 용암 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어떤 때에는 이 조각들이 아주 천천히 부딪힙니다.
아주 천천히 부딫혀 지각이 좀 구부러지고 겹치게 되면서 그렇게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파도가 일고 그렇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엄청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이러한 엄청난 능력과 권능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ἐξουσία 로써 Power of Act, 권세 Authority 가 있습니다. 창세기 49:1-2절에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자녀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들어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는 이스라엘에게 들을찌어다» 고 합니다. 그러자 힘센 야곱의 아들들은 늙어 죽어가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모두 나와 아버지의 말씀을 아주 정성껏 듣습니다.
야곱이 아들들보다 힘이있고 능력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들은 아버지의 권세에 순종하여 나아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늙어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니는 대통령보다 힘이 약해서 대통령의 말을 듣습니까? 그 분의 권세, Authority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권세에 복종하듯,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종, 우리의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분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 되시고,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우리가 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는 분이십니다.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 Federation Internationale du Sport Universitaire) 이 주최하여 2년에 1번씩 열리는 Universiade 라는 세계 학생스포츠대회가 있습니다.
대학스포츠의 발전, 학생의 체육 및 후생, 모든 나라 학생들의 좀더 밀접한 접촉 및 국제적인 대학스포츠 통일을 위한 협력 등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1949년 재개 되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1959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하여 1997년에는 주최국으로 등장하여 전주에서 열렸고, 2003년에는 다시 대구에서 개최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3년 대구 대회 때에는 북한 선수들도 300여명의 응원단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회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가지고 온 김정일 사진이 비를 맞았습니다. 이를 본 북한 선수들과 응원단들이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자기들 지도자의 사진에 비를 맞히다니, 이 얼마나 불충한 행위일까 그들은 스스로 죄책감에 젖어 흐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까짓 사람같지도 않은 김정일 사진에 비좀 맞았다고 저렇게 흐느끼다니, 그것도 대부분 지성인들이라는 대학생들이 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세뇌교육을 당하였으면 저렇게 상식 이하의 바보짓들을 서슴치 않고 할까! 저렇게 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처벌을 당할까봐 억지로 저러는 것이겠지” 하며 그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억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슬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일 같은 사람도 이처럼 존경을 받는데 하물며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포기하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질문이십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명쾌한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예배에 실패한 원인은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선별하여 드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10절에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내가 필요 없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 없더라고요.
그러므로 선물을 줄 때에는 최고로 좋은 것, 내가 꼴 필요하고 아끼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고도 좋은 말 듣지 못합니다.

언젠가 미국 목사님이 교인으로부터 “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하고 싶다” 라는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반가워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역정을 내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교회가 쓰레기장인줄 아는가? 자기는 필요하니까 좋은 것 새로사고 이제 필요없으니까 기증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어디 매립지가 있으면 거기에다가 버릴 것이지” 라고 하시더라고요.

본문에 자기가 쓰다 남은 것, 먹다 남은 것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여보 당신 사랑해 하면서 좋은 것은 자기가 다 골라먹고 맛없는 것, 못 먹게 생각 것만 남기고서 “여보 이것좀 먹어봐, 참 맛있네” 하면 기분 좋을 것 같습니까? 사랑 한다는 말을 하지 말든지, 정말로 사랑한다면 좋은것 가져와 라고 하실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한 후 오랜만에 자기고향을 방문할 때였다고 합니다.
목포에 있는 한 식당에 들를 것이라고 하면서, 각하께서 조기 구이를 좋아한다는 전갈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식당 주인은 영광 굴비를 찾아 목포 시내를 다 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표만 영광굴비라고 붙었지 시중에 나도는 것은 모두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배를 타고 멀리 흑산도까지 갔답니다. 그런데 흑산도 어시장에도 중국산만 돌아 다니더랍니다. 그래서 고깃배가 들어 올 때까지 거기서 묵으면서 기다렸다가 배에서 직접 잡은 것을 사왔답니다.

그런데 겨우 14마리 밖에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부족할 까봐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그 모두를 아주 정성껏 요리하여 상에 올렸답니다. 그리고 혹시 한 마리라도 남기면 맛이라도 보려고 기다렸답니다. 잠시 후 “식당 주인 좀 오라고 하세요” 하셔서 급히 달려갔더니 “야! 이것 정말 맛잇네. 정말 감사합니다” 하시더니 대통령 부부가 아주 맛있게 잡수시더랍니다.

상을 흘낏 쳐다 보니까 2마리가 남았더랍니다. 옳지, 저것 남으면 먹어야지 하는데, “이것 정말 맛있다, 이거 싸서 가지고 가지” 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는 맛도 못 보았지만, 대통령 부부가 그렇게 칭찬까지 해 주면서 맛있게 잡수시는 것을 보고 자기는 일생에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현직 대통령도 아니고 퇴임하여 힘이 없는 대통령도 이렇게 정성껏 모시는데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과 죽음, 우리의 행복과 불행 이 모든 것을 다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모셔서는 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셋째, 그들이 예배에 실패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San Francisco 에 사는 노 부부가 있었는데 개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교회는 한달에 한번 내지 두번 정도 나오시는데 개는 끔찍히 사랑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목사님! 이 개로 말하자면요……” 하면서 족보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장강의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못하시고 속으로만 “예수님을 저 개만큼만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면서 그냥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어 달 후에 그 부부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LA에 사는 아들 집에 차를 타고, 물로 그 개는 가운데 태우고 가시다가 그만 사고가 나서 개까지 모두 한날 한시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당 안에서 예배 드릴 때에도 생각은 이미 다른데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예배당 문 밖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삶, 저 사람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가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 눈앞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이 사건을 보면서 웃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과연 나는 하나님을 제일 첫 번째 우선순위로 두고 사는지, 그 분보다 더욱 사랑하고 그 분보다 더욱 존경하며 의지하는 것이 있는지 자기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은 어머니 주일인데, Sue 라는 간호원이 쓴 글을 소개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밤 중에 중년의 남자가 엠블란서에 실려 급히 들어온다.
Intensive Care Unit Room 17 에 입원하였다.
응급 치료가 끝난 뒤 의사 들은 나갔지만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이미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도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이 환자가 무엇인가 쓰겠다는 표시를 해서 종이와 펜을 가져다 주니 몹시 떨리는 손으로 안간힘을 다하여 무엇인가를 써서 준다.
전화번호 같은 숫자다.
그리하여 늦은 시간이지만 급박한 상황인지라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자다 전화를 받는지 졸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병원인데요, 혹시 Robert 씨를 아십니까?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분이 지금 응급실에 입원했습니다.
그래요? 아주 다급한 목소리다.
지금 달려 갑니다. 아마 4시간 반 정도는 걸릴 거에요. 그 때까지 그분 돌아가셔서는 안됩니다. 절대로요.

이른 새벽에 그녀는 도착하였다.
밤새 운전했기 때문에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급히 환자 방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녀와 같이 그 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 남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 남자의 손을 붙들고 그녀는 “아빠,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돌아 가시면 어떻게 해요?” 라며 통곡을 하는 그녀를 두고 조용히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의 1년 반 만의 일이다.
부모님의 잔소리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집을 나온 후로 전화번호도 바꾸고 연락을 끊어 버렸다.

늦은 밤인지라 신호가 일곱 번째 울릴 때에야 비로소 받는 소리가 나더니 “여보세요” 하는 졸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나야.
Sue 냐? 아이고 이것아. 너 지금 어디야?
엄마! 죄송해요, 집으로 돌아 갈께요.
그래. 아빠 바꾸어 줄께 하시더니, “여보, Sue 가 온데요. 어서 전화 받아보아요” “응! Sue가 온다고?” 라는 대화가 전화 속으로 들린다.
그리고는 아빠의 다정한 음성이 들린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아픈 데는 없니?
너무 보고 싶구나.”
아빠 죄송해요. 지금 비행기표 끊으면 아마 오늘 저녁에는 도착할 거에요.
그래, 너 올 때까지 오직 너만 기다리고 있겠다.
아니에요, 아빠. 자 괜찮으니까 편히 계시다가 저녁때 뵈워요.
아니다, 네가 온다는데 내가 무엇인들 손에 잡히겠니! 난 걱정 말고 조심해서 어서 속히 오렴.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당신 품을 떠난 자들, 마음이 떠난 자들, 불편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 속히 당신 품으로 돌아 오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왜 그랬느냐, 이유나 책임이나 조건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냥 받아 주십니다.
이 시간 눈을 감고 주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한번 돌아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난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지는 않았는가? 그 이름의 권세나 능력을 믿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는가?
난 과연 하나님께 최선의 시간과 물질을 드리며 사는가?
난 과연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가?
그리고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속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로 달려가지 않으시겠습니까, Sue 가 어머니 아버지 품으로 돌아 가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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