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9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였노라(말1:2-5)

Posted by on May 19 2012 at 07:04 pm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였노라
                                                                                               (말 1:2-5)

시집간 딸이 친정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엄마, 나 이 사람하고 정말 못살겠어!
매일같이 다투기만 하고 정말 지옥 같아. 엄마 아빠도 많이 싸웠잖아. 그런데 어떻게 참고 살아왔어?”
나하고 네 아빠는 결혼 전에 약속을 했었지.
무슨 약속?
큰 일은 네 아빠가 결정하고 작은 일은 내가 결정하기로.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어떻게 되긴? 지금까지 큰 일이 한번도 안 생겼지.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면 큰일도 작은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작은 일도 큰 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세상사가 모두 사랑이 아닙니까?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영국 사람은 부인이 심장마비로 숨이 끊겼는데, 그리고 의사가 죽었다고 선포하였는데 그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자기 부인 귀에 대고 “Honey! I love you. I am here, I am with you!” 하였더니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고 의식이 되돌아 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옆자리 분들과 “사랑합니다” 라고 인사 나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랑” 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에 대한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아가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 왔습니다.
뜻밖의 이러한 기쁜 소식에 그들은 너무 좋아“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 라며 기쁨에 넘쳐 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너무나 황폐해져서 아연 실색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도록 마구 부수고 불지르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는지라, 시가지는 너무도 지저분하고 여기 저기에는 아직도 해골들이 뒹굴어 다니며 들개를 비롯한 짐승들이 우글거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방 앞에서 높이실 것이고,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라는 예언의 말씀을 믿고 힘들지만 정성을 다하여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칠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도 자기들이 바라던 하나님의 축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적의 위협은 더욱 심해지고 경제적으로는 더욱 어려워지며 기다리던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올지 전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을 7가지로 들어 원망하며 불평하고 성전 제사를 소홀히 하며 이방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을 떠나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삶이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피하고 떠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택하여 이 7가지 불평을 들춰 설명 하시면서 하나님의 준엄한 신탁을 선포하십니다.

그 일곱 가지 불평 중 오늘은 그 첫 번째,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주 심한 불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 하노라” 고 고백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사랑한다 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 진행형으로써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갑자기 사랑한다 가 아니라, “내가 너를 옛날부터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지극히 미천한 인간사이의 언약적이고 경건하고 준엄한 그러한 사랑이 아닙니다. 남녀간의 사랑처럼 친밀감 가는 사랑, 다정 다감한 사랑, 즉 내가 너를 내 품에 안아 주었다, 내가 너를 품었다 라는 Intimate 한 사랑입니다.

The Sacred Romance(거룩한 사랑) 이라는 책에서 저자 John Eldredge 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친밀함, 모험과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여행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설득하시며 꼬드기신다. 이러한 은밀하고 친밀한 부르심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심장과는 완전히 단절된 살아있지만 죽은 자와 같다” 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가끔씩 너무 가상적인 말을 하기 때문에 이 분의 말 전체를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대목은 동의합니다.
아가서 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마치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며 청혼을 하듯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감정도 없이 그저 거룩하기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또한 우리 인간처럼 감성도 가지셨습니다.
때로는 화도 내시고 때로는 질투도 하시는 등 정말 인간적이십니다.
때로는 절대권을 가지고 우리의 의사에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시지만 때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면서 우리의 뜻을 존중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적인 하나님, 신약의 희생적인 하나님 그렇게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하였듯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의 사랑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다음의 몇 가지 특성(Aspects)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Sovereign,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당신의 절대권을 가지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시편 2:7절에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절대권을 가지시고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의 다른 점을 아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자기 몸에서 나온 자녀이기 때문에 본능적입니다.
그리고 아기가 울 때 아버지는 그 울음소리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탯줄이 끊어져도 약3-6개월 간은 아기 쪽의 끊어진 탯줄과 어머니 쪽의 끊어진 탯줄 자국의 세포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살아있는 세포들을 통하여 서로 정보가 오고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정보를 이성적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위험에 처했는지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는지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갑니다.
아버지는 “이는 내 아들입니다” 라고 소유권을 선포하여 관계를 시작하고 그 관계를 통하여 발전해 갑니다.
그러므로 부자간의 사랑은 살아가면서 점차 이해하고 느끼면서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 역시도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욱 자주 만나고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본능적인 어머니와 사랑과 달라 아버지의 사랑과 같아서 믿음과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이 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하니까 내가 그렇게 믿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같이 살다 보니까 나에게 참 좋으신 분입니다.
내 옆에 와서 나와 놀아도 주시고 나의 필요한 것도 채워 주시고, 때로는 말 안 듣는다 고 혼도 내지만 참 좋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이 분이 네 아버지다” 라고 하니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였듯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I love you,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그 청혼, 그 사랑을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찾아 오셔서 “I Love You!” 라고 고백을 하셨는데,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반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왜 내가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내버려 두십니까?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에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내가 아파 신음할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라고 원망합니다.

이러한 불평을 쏟아놓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고 하십니다.
장남인 에서가 당연히 받을 사랑이었으나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강조하십니다.
장남인 에서는 거절하고 야곱 같은” 너”를 택한 것이 사랑이다 는 것입니다.
왜 에서는 버리고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택하셨습니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지으신 하나님께서 절대권을 가지시고 하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 이유를 물을 자격도 없고 알 권리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축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 우리를 절대권을 가지고 선택해 주신 것이 바로 사랑이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택정하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 여기에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십니까?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5:13-14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 큰 고난을 당하신 것에서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십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이 사랑을 알고 미든 차원을 넘어 온전히 느끼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은 훨씬 힘있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His love is unconditional)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우리의 조건을 보고 우리를 택하신 것 아닙니다.
시편 2:7절에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였듯이 나의 의사나 나의 됨됨이를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일방적으로 나를 택하셨고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들 사이의 사랑처럼 조건적이라면, 그 조건이 상실되면 그 사랑도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모든 조건이 좋다고 생각되어서 결혼을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실망합니다.
그리하여 갈라서고자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갈라서지 못합니까?
아이들 때문에? 체면 때문에?
물론 그러한 것들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결혼은 조건적인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무조건적인 Commitment 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무조건적인 Commitment 입니다.
좋을 때는 Thank you Jesus 했다가
힘들 때에는 “Why Me? Jesus! Where are you?” 가 아닙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병든 때나 건강할 때나 부자 때나 가난한 때나 항상 변하지 않는다고 서약들 하신 것 기억 나십니까?
그러므로 말라기 3:6절에서도 “I, the Lord do not change, 나 여호와 하나님은 변개치 않는다” 라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변해서는 아니 됩니다.

Philip Yancey는 그의 저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은혜에 대하여 무엇이 그렇게 놀라운 것이냐?)”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게 하는 방법도 우리를 덜 사랑하게 하는 방법도 전혀 없다” 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And take me as I am. And take me as I am. My only plea Christ died for me! Oh! Take me as I am”
이제 막 태어난 핏덩이 갓난 아이가 왜 예쁩니까?
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가리거나 숨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식이나 미사여구를 사용할 필요도, 지식이 있는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내 모습 이대로 있는 그대로, 하지만 하나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자신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적입니다(Personal)
유명한 부흥강사이자 신학자인 Max Lucado는 “하나님이 만약 냉장고를 가지고 계신다면 당신의 사진도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값어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아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도 하셨지만, 바로 나 하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내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들 이름 하나하나를 아십니다.
그리고 부르실 때에는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사야서 58:9절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절에는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 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139:1-3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하나님께 대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평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명분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시지 않으시니까 나는 떠납니다 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어느 신학교 Chapel 예배 때의 일이랍니다.
한 학생이 순서지를 보더니 “으이그, 미치겠고만” 하더랍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중년 부인이 “왜 그래요?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기도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이 학생 “이 교수는 정말 지루합니다, 실력도 제일 없고 정말 짜증나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 중년 여인이 “내가 누군지 아세요?”
아니요?
난 저 교수님의 아내 되는 사람이요!
그래요? 그럼 혹시 제 이름 아세요?
아니요?
후유! 할렐루야, Than you Jesus! 주님 감사합니다 라며 도망치더랍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요?
시편 139:7-16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라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기 까지는 험한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된 축복을 힘으로 빼앗으려고 하였을 때 그는 부모 형제의 사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의 낯을 피하여 외가로 정처 없이 도망칩니다.
하지만 환난가운데 도망치던 그를 하나님은 벧엘에서 다시 만나 주십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아 올 때 그는 자기 능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얍복강 나루턱에서 그는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해 주었던 힘을 능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하여 지금껏 열심히 모았던 좋은 짐승은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욕심을 포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벧엘로 간다고 약속했고, 형에게는 형을 따라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숙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합니다. 이로써 그는 명예 마져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사랑한 여인, 14년 머슴살이로 얻은 그녀를 일찍 죽게 됩니다.
이로써 사랑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녀의 아들 사랑하는 요셉은 그의 미래였습니다.
하지만 배다른 자녀들에 의하여 그를 잃어 버린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미래까지 포기하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애굽에 내려가 화려한 궁실에 있는 왕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해 주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하는 것처럼 물질이나 건강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택하셨다는 것, 그분이 나를 기억하신 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그 약속, 그 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One Response to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였노라(말1:2-5)”

  1. It’s in fact very complicated in this busy life to listen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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