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6
이 시대의 말라기
(말 1:1)
Wrong-way Roy 라는 말이 있습니다. Roy Riegels 라는 미식축구 선수가 잘못된 길을 달렸다 라는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1929년 1월 1일 남 가주 Pasadena Foot Bowl 경기장에서 Rose Bowl 최종 경기가 있었습니다. 상대팀은 남부의 Georgia Tech 과 UC Berkeley이었습니다. Super Bowl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던 Rose Bowl, 정확히 1만 송이의 장미로 장식된 카 퍼레이드와 함께 시작된 입장식이 끝나고 드디어 관중들의 뜨거운 열광 속에 결승 경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관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처음부터 팽팽한 기 싸움으로 양팀은 시소게임처럼 가다가 이렇다 할 특별한 묘기나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도 없이 전반을 마쳤습니다. 후반 역시도 수비 위주로 팽팽하게 맞서서 서로 추가 득점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관중들의 열기도 점차 식어만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는데 아차, Georgia Tech 의 쿼더백이 공을 세게 던진다는 것이 뜸을 드리다가 상대방의 공격에 밀려 그만 공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기 쪽 30야드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정말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볼을 서로 줍느라 지금까지 잠잠했던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만일 Georgia Tech쪽이 공을 줍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상대편에게 빼앗긴다면 Touch Line 이 워낙 가깝기 때문에 경기는 그것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수들은 서로 공을 차지하려 뒤엉킨 채 사력을 다하여 밀치고 넘어지고 위에서 누르고 잡아 당기고…… 정말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관중들도 과연 누가 이 공을 차지하는가 모두 일어서서 고함을 치고 괴성을 지르며 흥분해 하였습니다.
잠시 후, 그러한 아수라장 속에서 한 선수가 빠져 나오더니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공을 자기 팔로 세게 감싼 채 힘차게 달렸습니다. 그는 UC 팀의 Roy Riegels 였습니다. Georgia Tech 선수들은 워낙 빨리 달리는 그를 감히 뒤따라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력을 다하여 독주하여 중앙선을 넘어 안쪽 깊숙이 30야드 그리고 40야드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거의 이성을 잃고 고성을 지르는 관중들의 환호소리에 Roy는 확신에 찬 채 힘차게 달렸습니다.
이제 몇 발자국이면 Touch Down입니다. 주심은 손을 번쩍 든 후 큰 제스처를 써가며 큰 소리로 Touch Down 을 외칠 것이고, 전광판에는 Touch Down 라는 문자가 번쩍거릴 것입니다. 감독은 너무도 좋아서 모자를 집어 던지며 달려와 Roy를 끌어안으며 “We did it, Roy!”를 외처 댈 것입니다. 내일 아침 LA Times를 위시로 하여 대부분의 미 일간신문 일면은 “우리의 영웅 Roy Riegels”라고 장식 될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MVP(Most Valuable Player)로 뽑힐 것은 물론 엄청나게 밝게 비치는 그의 미래를 바라보며 사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의 생각은 오직 Touch Down뿐 귀에 들리는 것도 눈 앞에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가Touch Down을 향하여 크게 마지막 발을 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그 때 갑자기 Roy를 힘차게 나꾸어 채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팀 선수였습니다. 도대체 웬일인가! 넘어져 망연자실하는 Roy에게 그는 고함칩니다,“You ran Wrong Way, Roy!, 빌어먹을, 너 거꾸로 달려왔잖아!”
그 날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나 버렸습니다,“You ran Wrong Way, Roy!” 그리고 그 다음날 일면 기사는 “영웅 Roy!”가 아니라 “Wrong-way Roy, 거꾸로 달린 로이!”로 장식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달려가거나 헛수고 한 사람을 보면“Wrong-way Roy!”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Roy는 왜 이렇게 잘못된 길을 달리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코치가“Roy! It is wrong way! Turn around! Turn around! 로이야! 잘못 가고 있어! 돌아서라! 돌아서라!”수없이 외쳐댔지만 Roy는 왜 계속해서 달리기만 하였을까요?
Touch Line가까이까지 달려갈 때까지도 상대방 선수들이 태클을 걸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모습에서 왜 이상함을 깨닫지 못했을 까요? 자신이 너무 빨리 달려서 감히 대들지 못하고 구경만 했을까요?
자신의 욕망과 관중들의 환호에 사로잡혀 정작 들어야 할 코치 말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달리고 있는 길이 맞다 는 확신 위에 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이상한 행동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Touch Down을 향하여 전진 그리고 또 전진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과 고난도 따르지만 때로는 많은 환호와 격려와 위로의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확신 때문에 정작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을까요? Roy Riegels 처럼 말입니다.
정말, Wrong-way Roy는 열정만 가지고 매달리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과 유사한 점은 없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Turn Around(진정한 회개)가 필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일까요? 좀더 준엄한 질문을 드린다면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달리는 것일까요?
말라기 선지자는 잘못된 신앙에 열정을 쏟는, 아니 하나님을 무시한 자신들의 제사와 자신들의 축제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Turn Around 를 외칩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희석되고 하나님이 무시되는 예배는 하나님을 오히려 괴롭게 할 뿐이라 목소리를 높여 책망합니다. 속히 가슴을 찢고 Turn Around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라기는 외칩니다.
당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 왔습니다. 뜻밖의 이러한 기쁜 소식에 그들은 너무 좋아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 라며 기쁨에 넘쳐 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너무나 황폐해져서 아연 실색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원래 성전이 있고 그 안에 왕이 사는 궁궐이 있었고, 또한 약 4만명 정도가 살 수 있는 시가지와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시가지는 물론 주거지까지 모두 완전히 초토화 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태우고 헐어서 완전히 흩어버려 다시 지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건축은커녕 그 황폐한 무더기를 치우는 것만해도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시가지는 너무도 지저분하고 여기 저기에는 아직도 해골들이 뒹굴어 다닙니다. 그리고 들개를 비롯한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밤이 되면 여우와 늑대가 번갈아 울어 댑니다. 정말 너무도 실망하고 의기소침되어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방 앞에서 높이실 것이고,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라는 예언의 말씀을 믿고 힘들지만 정성을 다하여 성전을 지어 갔습니다. 그런데 외적의 위협도 있고 또한 여기에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성전 건축을 잠시 중단합니다. 그러자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다시 선포하면서 성전 건축을 촉구합니다.
오랜 고생 끝에 드디어 성전은 완공되었습니다. 요단강 동편 총독들의 위협과 극심한 식량난으로 그간 정말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마침내 성전 건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칠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도 자기들이 바라던 하나님의 축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적의 위협은 더욱 심해지고 경제적으로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기다리던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올지 전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백성들까지 자기들을 위협하는 이방 민족의 여자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외적의 위협도 없어지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 민족 총독의 방을 마련하여 그들이 성전 안에 기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 안에 이방 민족들이 들어와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제사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고, 제물도 제대로 드리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엄숙하게 드려야 할 성전제사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성전 안의 창고는 텅텅 비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제사장들은 생계를 위하여 하나 둘씩 성전을 떠나 버렸습니다.
또한 이방여인들과 사이에 난 자녀들은 예루살렘 성 안에 살면서도 집에서 히브리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물론 히브리 말도 모르는 이방민족으로 자랐습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서 예루살렘 성은 이방인의 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 자체가 지구상에 사라질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택하여 당신의 준엄한 신탁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냥 선포하여서는 잘 듣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절대로 변개치 못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신탁으로 내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다음의7가지 그 당시 백성들의 불평을 들추시고는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우리를 사랑 하셨으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 왜 우리가 이처럼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이에 하나님은 “내가 장자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였지 않느냐?
야곱이 에서보다 다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를 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나에게 충성하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들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은 조건적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는 그분께서 내게 내려 주시는 축복에 더욱 관심을 갖는 오늘 우리는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으면서 일이 좀 안 풀리고 어려움이 닥치면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두번째,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어떻게 우리가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에 내 이름을 두려움이나 경건함이 없이 그냥 부르는 제사장들, 형식적인 제사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도다”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당 안에서 예배 드릴 때에도 생각은 이미 다른데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예배당 문 밖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삶, 저 사람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가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 눈앞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세번째,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을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는데,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러 오는 백성들 중, 살진 암소를 끌고 오는 사람의 제사는 정성껏 잘 드려주고, 가난하여 비둘기나 곡물 몇 되를 가져오는 사람의 제사는 대충 드려 주는 것을 질책하십니다. 또한 살지고 좋은 암소는 나중에 잡아먹기 위하여 보관해두고 병들고 비루먹은 것들, 어차피 처분해야 할 것들을 잡아 불태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헌금 많이 내는 사람, 목소리 큰사람, 세상에서 직책이 높고 존경 받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인정받는 세대는 아닙니까? 믿음의 정도는 고려되지 않고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닙니까?
네번째,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라고 사람들은 반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것, 하나님이 먹여 줍니까? 입혀 주십니까? 라고 하는 태도 모두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 말라기는 책망합니다.
다섯번째,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라고 반문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싫으니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돌아 갑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입니까?” 라며 핑계를 댑니다.
여섯번째,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어떻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히 하나님 것을 도적질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도적질 하도록 가만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지만, 하나님 몫인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로 가져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 것을 도적질 한 것이라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3:10) 고 하나님의 명예를 걸어 약속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예수 열심히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며 지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도, 여전히 사업은 안되고 가정은 힘들고 건강은 쇠약해지는데, 예수 믿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말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7가지 문제들이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겪는 문제이며 불평이며 고민거리 아닙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러한 불평을 쏟아 놓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보호해 준다면 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야 하나?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은 도대체 언제나 이루어 질 것이냐? 우리가 언제나 축복을 누리며 살수 있는 것이냐? 성전을 건축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을 내리신다 하여 열심히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그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 임할 것이냐?” 오늘 우리들과 비슷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이러한 불평 속에 소망이 없이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탁, 그 누구도 감히 변개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하여 “이제 곧 하나님의 때가 이를 것이다. 그 때에 메시아가 이 땅에 왕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불 말이 이끄는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환신하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 그리고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너희가 나를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내가 너희를 만나 줄 것이고”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는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마태복음 5:8절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열심히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을 열심히 찾는 자라고 모두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찾아 오십니다(Visitation). 그러므로 주님의 Visitation을 받으려면 우선 마음이 청결하여야 합니다.
물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저에게도 주님은 두 번 찾아 오셨습니다. 제가 전임 목회지에서 고난에 시달리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찾아 오셔서 손으로 제 머리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친히 찾아오심(Visitation)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도 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을 주님께서 몸소 찾아 오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지저분한 채로 놓아두고 오늘도 성전 마루바닥만 뻔질나게 닦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마음은 청소하지 않고 그저 성전 바닥만 두드리며 왜 나는 안 만나 주시느냐고 애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특히 주님께서 다시 오심이 심히도 가까워진 지금 주님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찾으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의 수준을 넘어 온갖 환난과 곤고함을 통하여 갈고 닦여진, 그리하여 언제든지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생명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도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길을 예비하시고자 엘리야의 환신 John the Baptist 를 찾으십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과만 같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청결하여 자신의 자아는 온전히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리하여“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존재하게 된 John the Baptist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다시 오심이 심히도 가까워진 지금은 말라기 선지자가 사역하던 때와 너무도 흡사하지 않습니까? 교회들은 타락하고, 형식에 치우치고 세속화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고사하고 하나님 자신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숫자와 헌금만 늘어나면 성공한 것으로 치부되는 이 세대를 향하여 아무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외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슴을 찢고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은 외면하고 그저 사람들의 귀를 기쁘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말씀을 선포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만 선포된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돌에 맞을 각오를 하고 말라기처럼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모 형제는 물론 자신의 삶마저도 주를 위하여 내려놓고 John the Baptist처럼 외로운 광야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Voice of God이 될 때까지 마음을 청결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부르심을 받은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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