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03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리고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 는 동침한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안다” 라는 성경적인 의미는 부부처럼 늘 같이 지내다보니까 예수님이 나를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마음 속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그 분을 체험적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도 “성경에 누구든지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 하였다고 아무런 체험의 감동도 없이 그저 지식적으로 고백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설교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경공부등을 통한 지식적인 것들과 내가 그분을 실제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을 체험할 때 비로소 그분과 나 사이의 의심과 신비의 비밀이 풀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당대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가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며 오늘 본문 요나 4장을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을 봉독합니다.
요나서 3장으로 하나님의 니느웨 사역은 끝이 났습니다. 요나서는 3장으로 끝나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4장은 요나와 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편입니다. 3장에서 보았듯이 물고기 뱃속이라는 고난가운데 회개한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는 갔지만 선교활동은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전하는 멧세지를 니느웨사람들이 듣지않고 회개없이 다 죽어 멸망 당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멧세지도 크게 외친것이 아니라 가만가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도 시내 전체를 다닌 것이 아니라 겨우 몇군데 다니다가 돌아와서 “이 놈들, 이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멸망당하는 꼴이나 보아야지” 하면서 니느웨 성안 어느 여관에 머물면서 니느웨가 멸망 당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자기의 멧세지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아주 깊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 갔습니다. 자기가 머무는 여관 손님들도 주 화제가 바로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여기 저기 사람들이 모여 수근대는데 가까이 가서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에 대한 말들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시 한 구석에서 일어난 회개운동이 점차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궁궐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하여 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됩니다.
이 멧세지를 들은 왕은 깊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자신도 금식하며 회개하면서, 온 성안에 금식을 선포하고 심지어는 짐승들도 금식을 시키라고 합니다. 짐승들도 굶기라는 것은 금식기도에 동참시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짐승에 밥을 주려면 일을 하여야 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말고 오직 회개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성읍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회개기도를 하고있는데, 이 땅을 회개시키도록 파송된 요나만은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교사의 멧세지를 들은 원주민들은 모두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데 말씀을 선포한 선교사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정작 회개 기도에 앞장서야 할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이 성읍이 멸망 당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채, 성읍이 파괴되면 어디로 도망처야 겠다 라는 탈출 장소까지 물색해 놓고 변화되는 니느웨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40일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 “소돔성처럼 멸망을 시키실까 아니면 여리고 성처럼 무너 뜨리실까?” 예의 주시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무슨 징조가 있는가 구름만 이상하게 떠가도 “야, 이제 곧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리겠지” 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며 가슴이 떨렸을 것입니다. 천둥만 쳐도 이제 정말 심판이 시작된 것 아니냐 며 기대에 찬채 흥분하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며 마침내 40일 째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밤새 잠도 안자고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혹시나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아직도 캄캄한 하늘을 쳐다 봅니다. 이 쪽하늘에서 저쪽 하늘을 구석구석 다 살펴 보아도 무수한 별들만 반짝일뿐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반짝이던 별빛들이 점차 사위어가고 둥근 아침해가 떠올라도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한 낮이 되어도 태양은 어제처럼 여전히 따갑게 비취더니, 어제와 동일하게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 갑니다. “내가 혹시 날짜를 잘못 세었나?” 하면서 하루를 더 기다려도 오늘도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울어 갑니다.
그러자 4:1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하였습니다. 누구한테 노하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그냥 노하는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하게 노하였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온 성사람들은 기뻐하는데 요나 홀로 화가 나 있습니다. 니느웨 온 성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데 요나 홀로 하나님께 엄정나게 화가 나 있습니다. 이 얼마나 Comic 한 장면입니까?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리고 자신이 선포한대로 니느웨가 멸망을 당했어야 했는데, 세상은 너무도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어야 할 니느웨 시내 골목골목은 오히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처럼 애곡하는 소리가 온 성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오히려 웃음소리 가득합니다.
자신이 산 증인으로서 니느웨 멸망소식을 고국에 맨 먼저 전해야 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수의 나라가 멸망을 당했노라고, 우리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노라고 기뻐 날뛰며 축제를 벌릴텐데, 자주받아야 할 원수의 성 니느웨는 오히려 더 맑고 깨끗하며 행복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마음은 아랑곳 없이 니느웨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이방인들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는 하나님,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되는데 오히려 잘되는 것 정말 못참겠다는 것입니다.
보스턴에서 사역하던 랍비 Herold Kushner 는 Progeria(Rapid Aging, 빨리 늙는병)에 걸린 아들을 보며 욥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생후 6개월이 되면서 이러한 징후를 알게 되었고, 이미 예상된 일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뚜렷하게 나타나는 징후에 고통은 나날이 커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랍비로서 일반 사람들 보다는 훨씬 더 경건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러한 엄청난 비극이 임해야 합니까?” 라고 절규하며 “유다의 장자 에르는 하나님 앞에 악하여 하나님꼐서 그를 치셨고” 한 말씀, “상고해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있는가?” 라는 욥의 친구의 욥을 향한 판단이 너무도 힘들게 하더랍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사내 아이를 가진 이스라엘 어머니들은 아이가 자라면서 걱정도 함께 자란다고 합니다. 특히 사춘기를 지나면서 장성해가는 아들을 둔 어머니들은 마치 아들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불안해 하며 생일잔치를 화려하게 차려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어우러져 즐겁게 먹고 마실 때 어머니는 홀로 골방에 들어가 숨을 죽여가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달려가는 자기 아들을 보며 랍비 Herold Kushner는 울지 않기로 오히려 기쁘게 축하하기로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종교의식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 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아픔의 변천과정을 글로 쓰리라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 아론은 14번째 생일잔치를 한 이틀 뒤에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죽음을 아니 그의 짧은 삶을 지켜보면서 그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원인과 동기와 기타 온갖 방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모두 허사임을, 그리고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젠가 부터는 기정 사실로 받아드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의 저서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 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속 뜻을 알수 없습니다. 그저 받아 드릴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 Make Sense 하지 않고 억울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불이익이 오게 하는 결정일 지라도 하나님의 결정에 항의할 그리고 불평할 권리조차도 주어져 있지 않는 존재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2절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두 번째 기도인데,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라는 요엘 2:13절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전에 요엘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첫 번째 기도는 물고기 뱃속에서 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이라는 견딜수 없는 고통가운데 있으면서, 죄악중에서도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날 자기가 회개했던 그 잘못까지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만을 내세우며 원망하며 “이번에는 하나님이 잘못 판단하신 것입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입은 사람은 요나 자신이 아닙니까?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물고기를 통하여 구원을 주셨고 그 고통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찬양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누렸던 이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프게 한 이방인들이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으니 죽여 달라고 햡박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도 죽여 달라더니 또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는것, 한 편으로는 용기있는 일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것도 교만이요 만용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태도에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 화를 낼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는 하나님의 권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 분 마음대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맞지 않다고 그 분께 성을 낼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조그만 회사에 다니다 보니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에 참 난처하더라고요. General Electric Information Services에 다닐 때에는 연구소였는지라 언짢은 일도 거의 없었거니와 대부분 고학력자들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친절하고 공손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일하는 수년동안 인상을 찌프리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서로를 인정해주고 존경하였습니다. 뒤에서는 모르겟지만 최소한 면전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주인의 말이 곧 법이더라고요. 말대꾸를 하려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그만 회사나 식당등에서 오래 일하시는 분들 제가 참으로 존경합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짜증나는 일들도 많으실 텐데 보통 인내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무슨 말대꾸를 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9절에도 “네가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성낼만한 자격은 물론 이유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나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토록 진실하고 간절하게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막나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까? 신앙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그렇지 못할 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확 돌아 서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특히 이민사회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더욱 자주 일어나는 것 같은데, 어제까지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던 분이 하루밤 사이에 전혀 딴 사람이 될 수도 있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자신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내가 훈련받았기 때문에, 내가 봉사를 잘하고 있기 때문에 섰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전혀 딴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12)” 는 바울 사도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항상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악한 세대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껴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신실하게 섬기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절에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 하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에 요나는 마치 반항하는 아이처럼 아무 대꾸도 없이 성질만 부리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나가서 “내가 이만틈 화가 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보셨으니까 혹시라도 니느웨를 멸망시키지는 않을까” 라는 한가닥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자기를 위하여” 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다시스로 갔고 자신을 위하여 죽기를 바랐고, 이제 자신을 위하여 초막을 짓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여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겨우 몇시간 다니면서 “40일 후에는 너희들은 죽었어, 악한 너희들을 하나님이 쳐서 멸종시킬 거야” 라고 하고서는, 자신을 위하여서는 엄청난 열정을 쏟아 뙤약볕에서 초막을 짓고있습니다.
요나 혼자서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초막을 짓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하라는 선교활동은 대충 떼우고, 오히려 그 땅이 영원히 저주받기를 바라며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가 하나님을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그 표정 참으로 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반항하는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6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더니” 하였습니다. 이렇게 분노를 스스로 삭히지 못하고 식식거리며 초막을 지은 요나를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며 그를 위해 박 넝쿨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그 마음이 얼마나 씁쓸하셨겠습니까?
잘못 되어가는 아들을 보면서도 힘으로 안되니까 그리고 억지로 막으면 더 나쁜 길로 빠질까 안타까워하며 오히려 그를 도와주는 부모의 심정,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이글거리는 태양볕 아래 초막에서 니느웨가 속히 망하기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까지도 이웃이 망하기를 고대하며 사서 고생하는 요나를 하나님은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며 박 넝쿨을 주셔서 그 머리를 시원하게 하셨습니다. 불효자도 자식은 자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난 박넝쿨처럼 일이 착착 잘 풀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박 넝쿨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할 뿐이지 우리 삶의 핵심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그 박 넝쿨을 보고 “심히 기뻐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요나서 전체를 통해 요나가 이처럼 기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합니까?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니느웨 백성은 그를 매우 화나게 만들었고, 잠시동안 더위를 가리워준 박넝쿨은 그를 매우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회개하는 니느위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생명을 구해주신 하나님은 그를 몹시 화를 나게 만들었고 그를 위하여 보내주신 하루살이 박넝쿨은 그를 몹시도 기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은 보지 못하고, 일시적인 기쁨에 만족해 하는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의 이러한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하무한 것인지 우리는 다음 구절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4:7).”
하나님께서는 이 하찮은 존재, 벌레 한마리를 보내셔서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모든 것을 그것도 하루아침에 완전히 망가지게 하셨습니다. 작은 벌레 한 마리로 끝장을 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것을 붙들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기쁨이나 행복이 바로 요나가 의지한 박넝쿨은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작은 축복에 안주한 나머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박넝쿨을 갉아먹는 벌레를 보내실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혹시 하나님 보다 주변 환경에 더욱 의지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성찰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잘못이 있으면 더 큰 화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곧 바로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요나가 의지하였던 박넝쿨을 말라죽게 하신 하나님은 8절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4:8).” 하였습니다. 뜨거운 동풍이라는 것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인데, 초원지대를 지날 때에는 이상기온의 영향을 일으켜 메뚜기 떼가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나게 하여 초토화를 시키기도 하고, 사막을 통과하면서는 뜨거운 모래알까지도 휩쓸고 오기 때문에 그 위력과 열기가 대단합니다.
이렇게 뜨거운 동풍이 불어대는 거기에다가 이글거리는 한낮의 뜨거운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정통으로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순한 사람이라도 신경질적이 되어 버리고 심하면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상까지 동반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 처한 요나는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라며 탄식합니다. 지금까지 이 때를 기다리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4:9).” 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아니? 네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느냐? 그렇게 화를 내는 합당한 이유라도 있느냐? 네가 그렇게 반항하는 자격이라도 있느냐?” 4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던 요나가 이제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라며 반항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교훈하며 지도해야할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에 불만을 나타내었고, 거짓 열심으로 초막을 지었으며, 순간적인 기쁨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불의한 일에 기뻐하였으며,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일에 화를 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도 망각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땀흘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4:10).” 하며 하나님은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하시면서 책망하십니다. 우선 박 넝쿨의 소유권에 대하여서는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심으로써 박 넝쿨을 만드시고,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을 시들게 하실지라도 불평하거나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 내가 기뻐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것은 실제로는 별 존재가치도 없는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라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졌다고 죽고싶다고 소리치는 요나!
제가 목회학 석사를 하면서 공부를 참 열심히 하였습니다. 총 103학점을 따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장학금을 얻기 위하여 항상 A학점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방학때 빼고는 잠을 7-8시간 길게 잔 적이 없엇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쉬는 날이 있으면 체력단련한다는 핑계로 테니스 게임을 안쉬고 계속해서 8시간 까지 한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4년은 걸려야 할 것을 2년 반 만에 마쳤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기뻐야 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졸업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이것을 받기 위하여 지금까지 목숨을 걸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PhD는 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하는수 없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를 좀 갖고하자 하였더니 나중에는 기간내에 마치지 못할까 쫓기면서 논문을 쓰다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한 학위가 내 삶을 더 기쁘게 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요나의 박넝쿨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할 위치에서 박넝쿨 같은 학위에 목숨을 걸다가 진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서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
어떤 학자들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를 어린 아이로 해석해서 니느웨 인구를 60만명 이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육축도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니느웨 성에는 니느웨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짐승들도 얼마나 많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통하여 요나의 그릇되고 편협한 생각이 불합리한 것임을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요나가 어떻게 했다는 결론은 없습니다. 부끄러운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다짐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사막의 뙤약볕에서 분노하며 살았는지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도록 일부러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못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다고 요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나무는 보면서도 그 나무들이 이룬 숲은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다시스로 가다가 날벼락을 맞기도 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물고기 뱃속 같은 고통중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새롭게 다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또다시 박 넝쿨의 그늘 아래로 들어 갔다가 그 넝쿨이 마르면 분노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이 아닌 주변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박 넝쿨에 가려서 사명을 망각하는 일이 어디 한두번이겠습니까?
삶의 우선순위라는 말은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지금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기꺼히 포기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삶에는 반듯이 우선순위가 확실해야 합니다. 현재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더 중요한 것을 위해 과감하게 던져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하나님 중심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세워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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