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1
남은자 신앙
(요나 3:1-10)
Sacramento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한번은 복숭아를 가져 오셨는데 알이 아주 크고 좋더라고요.
맛을 보니 입 속에서 살살 녹는데 그렇게 맛있는 복숭아는 처음 먹어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이렇게 귀한 것을 구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추수하고 남은 것 따온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야긴즉, 거기에 과수원이 많은데 복숭아를 늦여름에 추수하고 나면 아무리 다 딴다고 하여도 각 나무마다 한 두개씩은 붙어있다고 합니다.
과수원 주인은 그대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두주 있다가 그것을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따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복숭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남은자란 복숭아를 샅샅이 다 따내도 몇 개는 남듯이 엄청난 재앙이나 환난가운데에서도 우리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살아남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은 전쟁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하였는데 왜 이 사람들만 살아 남았습니까?
이 사람들이 더 착하고 하나님을 더 열심히 잘 섬겨서 그렇습니까?
죽임을 당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 열심히 잘 섬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더 많은 학식과 지혜가 있어서 살아 남은 것입니까?
죽임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 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때가 되자 이들의 후손 중 일부를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강대한 바벨론 왕국이 갑자기 페르시아에 망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왜 이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냅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그런데 요나 역시도 환난가운데 살아남은 남은자입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던져졌는데, 그러면 마땅히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셔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자 그를 육지에 초해 내게 하셨습니다.
이 어찌 우리 논리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무슨 목적으로 소수의 남은자를 살려두십니까?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같이 생각해 보며 “남은자 신앙” 이라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큰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남은자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남은 자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오바댜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는 “에서 곧 에돔은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할지라도 곧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라며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에돔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이스라엘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또 한번의 기회, 즉 남은자 축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또 한번의 기회가 없이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나이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다가 56미터나 되는 급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폭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폭포 위 강 위에서 해마다 카누 경기가 있었습니다.
카누를 타고 누가 폭포 낭떠러지 가까이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느냐는 경기입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급한 물살에 휩싸여 떠내려가버리니까 낭떠러지 가까이 점에는 붉은 기가 꽂혀 있습니다.
여기 이상은 위험하니 넘어오지 말라는 표지지요.
그런데 해마다 한두 사람들이 모험심에 그 선을 넘다가 폭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거기서 떨어지면 시체도 찾을 수 없지요.
그리하여 결국 그 경기를 폐지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구부러지는 철사도 여러 번 구부렸다 폈다 하면 마침내는 끊어지고 말듯이 하나님의 관계도 그렇게 됩니다.
물론 7번씩 70번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주님이시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짓고서 “I am sorry”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개선할 의지가 없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죄에는 하나님도 한계를 두고 계십니다.
또한 죄도 다 같은 죄가 아니라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결국 하나님의 용서와 보호가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남용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둘째, 남은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가는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건지셔서 살려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좀더 잘 살아 보자고 모압으로 이민 가서 남편도 죽고 자녀들도 죽었습니다.
그러한 환난 가운데에서도 나오미의 생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베들레헴으로, 아니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끊어졌던 대도 잇게 되고, 잃었던 자녀대신 더 훌륭한 손자를 갖게 되고, 이민 가서 잃었던 재산도 도로 다 찾았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는 가산을 탕진하고서 하는 수 없이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부자간에 끊겼던 관계도 회복하고 이전에 누렸던 아들로서의 특권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도 돌아 와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요나 처럼 물고기 뱃속 같은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만 한다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 아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의 자존심, 명예욕, 이기심은 물론 나의 분노, 원망, 질투,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등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의복을 찢지 말고 진정으로 가슴을 찢고 회개하라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대로 우리 마음을 찢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 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부끄럼이 없이 바로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남은 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생명을 바쳐 지켜야 합니다.
당뇨가 좀 심한 분이 있는데, 벽에는 “오늘부터 내 남은 삶의 새로운 출발이다” 라고 써 붙여놓고, 온 사방 눈에 띄는 곳에는 어디든 붉은 글씨로 크게 온통 “약” 이라고 크게 써 붙여놓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렇게 목숨을 걸고 산다면 당뇨가 아니라 그 어느 병도 다 낫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수기도하면 낫을 것 같은데 언제든지 그러한 확신이 들면 내게 말하시오” 라고 했는데 아직 때가 안 되었는가 봅니다.
우리 남은 자들은 건강에, 돈에, 약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남은 자들은 “나무가 믿둥까지 잘리는 듯 모든 소망이 꾾어졌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거기서 열매를 맞게 하실 것이라”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가 멸망을 당하였도다” 라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기회만 닿으면, 하나님을 섬길 기회가 한번만 더 주어진다면 일반 백성들과는 철저히 구별되어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다짐합니다.
그러한 그들의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은 70년이 차자 그들의 후손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 시키십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들은 정말 그들의 각오대로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섬기며 일반 백성들과는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 500여년 흐른 예수님 당시에는 이러한 초대의 각오와 정신은 변질되고 형식과 전통에 얽매여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하튼 남은 자들인,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 목숨을 건 각오와 결단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체험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가되자 물고기로 하여금 육지가까이로 나오게 하셔서 그를 육지로 토해 나오게 하시고, 그에게 다시 나타나서 전과 똑 같은 사명을 주십니다.
“니느웨로 가라, 그리고 그들에게 40일이면 하나님께서 너희 성을 멸망시키리라” 라고 선포하라.”
그런데 니느웨는 큰 성으로써 걸어서 3일 거리는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큰 성의 선교사역을 차도 없었고 말을 타지도 않았을 탠데, 요나는 하루 만에 끝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지요.
아마도 조금 하다가 중간에서 그만 둔 것 같습니다.
정말 주님의 사명에 목숨을 걸었다면 왕실에 찾아가서 “왕이여, 당신부터 회개하시오” 라고 하였을 탠데, 왕은 그 나중에야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두 번째의 기회도 이렇게 놓쳐 버리고 맙니다.
요즘 신문을 잘 안 보는데, 오늘 아침 조선일보 인터넷 판을 보았더니, 서서평 선교사, 독일계 미국 선교사인데 본명은 Elizabeth Shaphing 이지요.
그런데 이분에 대한 기사가 톱 뉴스로 나왔더라고요.
조선일보에 어떻게 이런 기사가 톱뉴스로 나올까 하면서 그 기사를 읽었는데, 읽다 보니 얼마나 눈물이 나고 감동이 되는지 내 가슴이 탁 막혀버렸습니다.
32세의 아가씨가 일본 식민지로써 현재 아프가니스탄 못지않게 비참했던 조선 땅에 오게 됩니다.
당시 미혼의 아가씨를 이렇게 빈곤하고 위험한 지역에 파송하는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도 대단했습니다.
그녀는 조선 땅에 미혼으로 온 최초의 아가씨 간호원 선교사로서, 전라남도 광주와 제주도를 오가며 주로 한센병, 즉 나환자들을 돌보며 사역하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이는1921년 내쉬빌 남장로교 선교부에 보낸 선교 보고서의 일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가 이제 겨우 한 살된 자신을 할머니께 맡겨두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어머니를 다시 만납니다. 그녀 나이 49살 때의 일이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네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 고 내쳤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로부터 두번씩이나 버림을 받았지만, 그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면서 수양딸을 13명이나 두고 길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특히 조선 땅의 한센병으로 인하여 소외되고 천대를 받던 자들을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목숨을 다 바쳐 지키셨습니다.
그 분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934년 6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김치를 먹고 고무신을 신고 조선인으로 사셨던 그분,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분이 우리 주변에 계셨기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 남은 자들의 삶의 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남은 자들은 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십니까?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으십니까?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분들은 세상이 나를 실망시키고 아프게 할지라도 저 천국의 집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Elizabeth 라는 아주 신앙 좋고 잘 섬기는 집사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는데, 장례예배 때보다 하관예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하관예배에 오신 분들이 각기 아주 예쁘고 좋은 포크, 케잌을 먹을 때 사용하는 포크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윽고 목사님 설교가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에게 포크를 자기고 오라고 한 것은, 우리 Elizabeth 집사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임종하시기 전에 제가 방문하였더니,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Pastor! You preached, “The best part of our life is yet to come.”
목사님께서 “우리 인생의 최고 행복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설교하신 적이 있지요?”
Yes.
The best part of my life is also yet to come. 내 인생의 최고 행복점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So, when I die bury me with a good fork. 그러므로 내 무덤에 좋은 포크 하나도 같이 묻어 주십시오.
Why?
아직도 내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내가 저 천국에 가면 신랑되신 예수님과의 혼인잔치가 열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혼인잔치의 제일 기쁜 클라이맥스는 무엇입니까? 디저트로 케익을 먹는 것 아닙니까?
신랑되신 주님과 내가 그 커다란 웨딩케잌을 자르고 내가 우리 주님과 나란히 같이 앉아 그 케익을 먹어야 하는데 그 때 포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집사님의 말씀대로 천국에서도 웨딩케잌을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말세의 남은자 신앙인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이 분처럼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고 멸시해도 슬프지 않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 천국에 대한 기쁨과 설레이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요나는 아주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했던 요나가 정작 니느웨로 가서는 3일 거리를 하루에 마쳤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껏 지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니느웨 백성들은 구원하였지만 요나에게는 아무런 상급이 없이 오히려 불평뿐입니다.
말세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자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숨을 바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 앞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요나처럼 3일 거리를 하루에 대충 끝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좁은 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Robert Frost 의 “The Road not taken”에서처럼 그 결과는 엄청 다룰 수 있습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도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비슷했지만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먼저 길은 다른 날로 미루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라고
지금은 고난주간인데, 이 두갈래 길에서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설교및 말씀자료,요나,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