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4
고난중에 드린 기도(요나2:1-10절)
요나서 2:1-10절
(고난중에 드린 기도)
March 4, 2012
지금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을 기념하는 고난 기간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밖히시기 40일 전부터를 고난 기간이라 정하였는데, 이 고난 기간동안 초대 교회에서는 먼 여행을 삼가고 각종의 오락을 금하며 늘 경건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금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도 캐톨릭 교회에서는 이 고난기간동안 금요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리며 특별히 물고기를 먹습니다. 우리도 이 고난 기간동안만이라도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 내가 즐기던 것들을 최소한 한가지씩만이라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금하고 경건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고난중에 있는 요나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오늘 요나의 고난을 당신의 십자가에 달리실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너희에게 보일 것이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고난기간 중에 혹시 고난중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건강을 잃어서, 부부간의 갈등에서, 자녀 문제로 인하여, 직장 및 대인관계와 돈 문제등 많은 문제들이 고난과 함께 위기를 몰고 옵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고난이 닥치면 신앙 문제까지 겹치기 때문에 통과해야 할 고난의 관문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고난을 겪지 않은 분들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고 혹독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모난 성격과 그릇돤 사고방식들이 다듬어져가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까지, 그저 아침이 오지않고 영원히 이 밤이 지속되었으면 하며 눈물로 지세우신 경험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오, 주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요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 인생에 피할수 없는 우리가 통과 해야 할 관문이며, 결국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 그는 자신의 불편한 이웃 니느웨로 가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다가 거센 풍랑이라는 고난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바닷물속에 던져져 물고기에 삼킨바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물고기 뱃속이라는 고난의 깊음속에 빠져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처럼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두가 캄캄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도 안가고, 거기에다가 머리에는 바닷풀이 엉겨있다고 한 것이 아마도 물고기 뱃속 어디에 쳐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 겨드랑이, 입, 코 등 온 몸이 끈적거려 한시도 견딜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줄 알고 있지만, 사실 요나의 입장에서는 어딘지 볼수도 없고 알수도없는 곳에 쳐박혀 겨우 숨만 깔딱거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요나는 이러한 고통중에서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고난에 면역 된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연단을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고난은 역시 견디기 힘든 아픔이요 정말 피하고 싶은 고통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아버지여, 할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라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매달리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요나가 견딜수 없는 고통가운데 부른 찬송이요 기도입니다. 찬송도 기도 속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오늘 설교 제목을 “고난중에 드린 기도” 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을 요나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면서 선포하는 자나 듣는자 모두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고난은 결단코 변장된 축복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고난은 변장된 축복” 이라는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고난 자체가 축복이 될수는 없습니다. 물론 고난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절로 축복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에 고난이 결국 축복으로 변화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비극이 될수도 있고 축복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게 되면 대부분은 쓰러지고 넘어져 일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일어서면 될 것 아닙니까? 라고 쉽게 말할수 있는 사람은 아직 힘든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제가 직접 힘든 고난을 겪어보지 안했을 때에는 그렇게 쉽게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고난중에 서 보니까 왜 사람들이 넘어져서 못 일어나고 포기하게 되는가 이해가 갔습니다.
처음부터 포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처럼 쉽게 일어설수 있으면 왜 안 일어서겠습니까? 다시 일어서야 된다는 것 몰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일어서려고 해도 기력이 없고 너무 힘들기 때문에 못 일어 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한가지 고난은 또다른 고난을 불러 옵니다. 즉 고난에 또다른 고난이 겹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고난만 넘어서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며 안간힘을 써서 다시 일어섰다가 그보다 더 큰 고난이 닥치는 것을 보면서 피해 버리거나 주저 앉아 버립니다.
또한 잠시동안 겪는 고난은 어렵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해가 지나도록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에 아주 지쳐버리고, 다시 일어설 기력을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포기하고 타협해 버리거나 주저 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쓰러진 사람 우습게 보거나 함부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도 훌륭하지만, 고난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마침내는 쓰러져버린 사람들도 그 못지않게 훌륭한 분들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 고난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평소에는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다가도 고난이 닥치면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저희 시골 고향의 집사님 한분은 남편이 암에 걸리자 2년 동안 새벽기도를 한번도 안빠지고 열심히 새벽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분 집에서 교회까지 오시렬면 최소한 30분은 걸리는데, 집이 바람을 막아줄수 없는 들판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비가오면 대부분 비바람이 몰아 칩니다. 그러면 우산을 받아도 옷이 다 젖고 발이 푹푹 다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그 이른 새벽에 얼굴이 아리도록 찬 바람을 맞아가며 그 멀리서 교회를 나옵니다. 그리고는 난로도 없는 차가운 마루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울며 부르짖다가 가십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서도 특히 건강을 잃었을때에는 기도 내용이 다르더라고요. 우리 송목사님도 경험을 하셨고, 제 처도 경험을 하였는데, 암 수술을 놓고 기도할 때에는 참 난감합니다.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마음가짐도 다르고 그 내용도 다릅니다. 체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도하는 목소리 조차도 달라집니다.
어느 여집사님의 7살된 외동 아들이 전립선 암에 걸렸습니다. 저 때문에 시험에 들었는지 한동안 교회를 안나오셨는데, 한 1년쯤 뒤에 그 분의 아들이 전립선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전립선 암은 어른들이나 걸리는 것인데, 이 어린 아이가 그것도 초기가 아니라 이미 많이 번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교인으로부터 듣고서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 이미 미국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교회에 나가고 있었지만, 다급하니까 우리 교인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순간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이미 키모 세라피를 여러 번 받은지라 몸속에 백혈구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와 말은 하되 직접 접촉하지 못하도록, 그가 입원해 있 병실 안에 비닐을 쳐서 아이는 그 비닐 속에 있는 것입니다.
키모 세라피를 여러 번 받았는지라 머리털도 하나도 없고, 옷도 하나도 안 입었는지라 비닐속에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참 이상하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어머니를 보니까 가슴이 얼마나 탔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않고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억지로 참느라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내 양복이 젖을만큼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와 비닐을 가운데 두고 손을 맞대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병실을 나서는데, 그 여집사님이 따라 나오면서 “우리 아이가 낫기만 하면 교회 생활 열심히 하겠다, 어쩌겠다” 여러가지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고통중에 있다고 “이 고난만 지나가게 하시면 내가 어떻게 하겠나이다” 라는 등의 지키지도 못할 맹세는 하지 마십시오. 지키지 못하고 “내가 왜 그런 맹세를 하였던고” 하게되면 다 하나님께 죄가 됩니다.
여하튼 제 마음속에는 “과연 저 아이가 살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뒷짐을 지고 나오면서 “집사님! 나는 돌아가서 교회에서 기도할 터이니 집사님은 여기서 기도하십시오”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보면 기도가 제대로 안나올 것 같아서 일부러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 일년쯤 뒤 아직 머리가 다 자라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기 어머니 손을 잡고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뛰고 기쁜지 하마터면 설교하다 말고 엉엉 울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이처럼 주님께 나아가게 하고, 주님께 매달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져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러 집을 떠난 후로는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기도한 흔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였기 때문에 기도할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2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하였듯이 물고기 뱃속이라는 숨막히는 고난이 닥치자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 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던 그가 이제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다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을것처럼 하고서, 다시 스로 도망치면 하나님을 피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이제는 심지어 바다속 깊은 곳에까지 계심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이 곳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친교 할 때에도, 차를 타고 집에 갈 때에도, 그리고 우리 집에도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화를 내고 죄를 지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계십니다. 너무 힘들어 비틀거릴 때 주님은오셔서 우리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기쁘고 즐거울 때도 주님을 부르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주님을 부르짖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정직하게 행하여 마음이 기쁠때에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요나처럼 죄를 짓고 도망칠 때에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약속대로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의 부르심에, 울부짖음에 “내가 여기 있노라” 응답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 때가 되면 반듯이 이루어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고난은 자기 성찰을 가져 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심한 고난을 겪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영원하심,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제가 고난을 통하여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 방법을 포기할 때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시골에서 수의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루는 낛시질을 하러 갔다가 들렀더니, 자기 집에서 직접 기른 벌통에서 꿀통을 내서 원심 분리기에 놓고 돌려서 직접 꿀을 따 주더라고요. 그 꿀물을 먹는데, “요즘 시골 사람들은 하도 영악해 져서 이 짓도 못해 먹겠어” 라며 넉두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데?
아니, 자기들이 의사 인양 소나 돼지가 병에 걸리면 약국에서 약을 사다가 직접 주사도 놓고 약도 먹여서 낫으면 좋은데, 그렇게 하다 하다 안되면 나를 부르거든. 그래서 가 보면 주사 한방이면 될 것을 그렇게 엉터리 짓들을 하여 병을 다 키워 놓았어. 그리고는 뭣을 그렇게 많이 아는지 “내가 이렇게도 해 보았고 저렇게도 해 보았습니다” 라는 등 이 돌팔이들이 아는체들을 하는데 정말 미치겠어.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나를 불렀습니까?” 하고 팍 집어 던지고 나오려고 해도 안면이 받혀서 그러지도 못하고…… 정말 힘들어.
사람은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주님께 돌아갈 때 주님은 나의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진즉 오지 무엇 때문에 여태 고집을 피웠냐 책망하시지도 않습니다. “Do not worry about past failure. We can start all over again.”
지금 까지는 너 혼자 뛰느라 힘들었지? 이제는 나와 함께 가자.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 주님께서는 오히려 위로 하시고 우리의 문제들을 감당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혜와 힘과 능력이 아닌 주님의 방법대로 하기 때문에 마침내는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히려 축복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그 사람이 다듬어지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Broken-ness 가 없습니다” 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자 내 자신의 교만함과 거만함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Broken-ness 가 없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는 할수 있어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동정해 버립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고통 중에 괴로워하고있는 욥에게 위로한답시고 “욥아, 죄없이 망하는 자가 있느냐. 네가 정말 큰 죄를 졌는가 보구나. 속히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라.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가 창대케 되리라” 라고 욥을 판단합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 삶의 일부로써 아무도 피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아주 지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도 내가 어떻게 대하고 극복해 나아가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수도 있고 고통 그 자체로 끝날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반석위에 지은 사람은 비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흔들리고 물이 새 들어오기도 하며 부분적으로 부서지기도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내가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을 더욱 깊게 의지할 때 주님께서는 고난을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하여 나의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이 다듬어 지고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지나면서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신분이 확연해 집니다.
하지만 그 삶을 모래위에 세운 사람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창수가 나면 모래와 함께 떠내려가 버립니다. 자신 안에 예수님이 없기 떄문에 자기 의지로 버티다가 결국은 타협해 버리거나 쓰리지고 포기해 버립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난을 없애시지도 피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견디셨고 마침내는 “다 이루었도다” 선포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없애 주시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당신처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 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인생의 어느 부분을 달리고 계십니까? 어러분들의 GPS는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목적지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두려워 히지도 마십시오. 그 분은 바로 나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내가 쓰러지면 일우켜 세워 주시려고 바로 내 옆에서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παρακλετος, 보혜사 성령님되시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