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1
이렇게 행하라
에베소서 4:32절
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보았기 때문에 벼농사에 대하여서는 좀 압니다.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 논에 옮겨 심으면 처음 몇 일은 몸살을 하고 잘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어떤 사람은 논에 옮겨 심은 벼가 잘 크지 않으니까 큰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약간씩 뽑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벼 조자 길 장자 조장인데, 무슨 일을 저질렀을 때 조장 났다 고 하지요!
예인교회와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의 연합을 놓고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몸살을 하지않고 한 살이 될까, 그리고 조장이 나지않고 잘 성장할 수 있을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본문의 말씀이 떠올라 본문 4:32절 말씀을 붙잡고 준비하였습니다. 앞으로 서로 힘들어질 때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한 형제요 끝까지 같이 가야 할 한 지체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사도께서 3년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개척한 에베소 교회가 바울사도가 떠나 얼마 되지않아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거짓말 하는자들, 교회 물건을 훔치는 자들, 거룩한 예배당 안에서 화를 벝컥벌컥 내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데미 신을 비롯하여 우상숭배의 산실이었던 에베소에서 온갖 핍박과 영적 전투를 이겨가며 성장해 나아갔던 교회가 얼마 가지 않아 크게 타락하여 문제 있는 교회로 전락해 버린 것 같습니다. 개척목사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었겠지요.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의 이 슬픈 소식을 들은 바울사도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긴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열거하다가 오늘 본문에 와서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우리 서로가 이 말씀대로 행하면 앞으로 어떤 장애가 온다 할지라도 큰 분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뜻이 구체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같이 생각하며 은혜와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인자하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제가 유식한 체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말로 인자하게 하라 는 헬라어χρεστοζ(크레스토스) 는Kindness(친절한), Useful(요긴한), Excellent(탁월한), Goodness(좋은, 유익한) 이런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원래 이 뜻은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나의 상대방에 대한 태도가 달라 지는 것이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하였듯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도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나를 아프게 하고 조롱하고 고통 속에 밀어 넣는 사람에게는 나도 그렇게 대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크레스토스는 그럴지라도 나의 사적인 감정은 접어두고 똑같이, 한결같이, 나에게 따뜻하게 한 사람처럼 동일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물론 노예해방으로도 유명하지만 매우 훌륭한 인격자로서 존경을 받는 분이십니다. 남북 전쟁 때 한번은 참모총장하고 작전 문제로 말다툼이 생겼다고 합니다. 서로 대립이 되가지고, 서로 싸우다가, 링컨이 대통령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아주 크게 실패를 했습니다. 자기가 아끼는 부하들이 죽고 남은 병사들도 사기가 떨어져 참모 총장이 아주 화가 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 링컨이 메모지에다가, “I am sorry. 아브라함 링컨.” 이렇게 써 가지고, 비서를 통해서 참모총장에게 보내줬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메모를 본 참모 총장은 아직도 화가 잔뜩 나있는 터라 “That’s a ridiculous guy 어리석은 자 같으니라고!”라며 비난을 하더랍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안 보이는 데서는 무슨 욕을 못하겠습니까?
얼굴이 침울하여 돌아온 비서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솔직히 말해 주시오!” 라고 링컨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아니 글쎄 각하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디다.” 그 말을 듣던 링컨은 껄껄 웃으면서 “아, 그 사람. 사람 볼 줄 아는구먼” 하더랍니다. 자기를, 그것도 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인데 자신을 향하여 비난을 한 사람을 보고 “사람 볼 줄 아는구먼” 했다니 감동이 안 갑니까?
1862년 4월 30일 링컨 대통령은 온 나라에 금식 일을 선포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라고 연설했습니다. 요지는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의 비극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얼굴을 맞대고 총칼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리는 비극을 종식시키는 길 역사도 오직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인교회와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가 연합하여 잘 성장해 나가는 길도 오직 저부터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다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남북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가도하고 있던 링컨은 “내가 염려하고 마음에 걱정하는 하나는 내가 정말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링컨의 이러한 믿음을 배울 수만 있다면, 아니 링컨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면 우리는 능히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이겨내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항상 승리의 찬양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링컨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역시 스탠턴 과의 일일 것입니다. 그는 링컨을 “고릴라의 원종”이라고까지 비난했습니다. 미국식 발음으로 에이브라함을 줄여서 “에이브” 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원숭이 종류를 “APE” 라 해서 발음이 비슷하여 그렇게 놀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굴 형태도 조금은 그렇게 생긴 것도 같고, 그래서 스탠턴은 링컨을 아주 저급하게 놀려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듀사이듀” 라는 사냥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을 사냥해서 미국에 있는 동물원에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스탠턴은 링컨을 비난하기를 “듀사이듀, 당신은 정말 바보입니다. 고릴라를 잡으러 왜 그 먼 아프리카까지 갑니까?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가면, 거기에 링컨이라는 고릴라가 있는데” 라고 링컨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스탠턴의 이러한 노골적인 비판에 대해서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스탠턴을 미국의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그 때 측근들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그가 아무리 나를 욕하고 모욕을 준다 하여도 국방장관으로서의 제일 적임자는 바로 스탠턴 입니다. 나에게 욕을 한 것은 사적인 일이고 그것 때문에 미국의 유능한 장관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링컨은 비록 자신을 비난하고 심한 모욕을 주었어도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를 다른 사람이나 똑같이 공정하게 대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인자하게 대하라, 친절하게 하라는 크레스토스” 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는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내편 네편 가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에서 서로 공평하게 대하라” 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문제는 바로 사적인 감정 때문에 공평하게 대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사적인 감정이나 혈연 및 지연 등의 특별한 관계를 내려놓고 서로 편을 가르지 않으며 공평하게 대할 수만 있다면 많은 문제들을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인교회 성도님들과 산호세 생명의 강 성도님들은 능히 이러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벽을 넘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줄 믿습니다.
둘째, 불쌍히 여기라 하였습니다.
우리 말로 불쌍히 여기라, 영어로는 Tender-hearted 라고 번역된 헬라어 유스플랑크노스 는 서로 이해하라 는 의미입니다. 이해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Understand 라고 하지요? 그런데 Understand 란 Under 즉 한발 아래에 서있다, 아래서 위로 올려본다 그러한 의미입니다. 즉, 나보다 상대방을 더 높이 본다 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면 오른쪽에 앉아있는 분들이 왼쪽에 앉아있는 분들에게 “I Understand you” 한번 해보시지요. 낮은 자세에서 위로 올려보면서 I Understand 하셔야지 옆에서 그냥 그렇게 하시는 것은 “I 옆에Stand you” 하시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왼쪽 분이 오른쪽 분에게 “I understand you” 해보시지요.
이번에는 바꾸어서 오른쪽 분이 왼쪽 분에게 “I understand you” 해 보시지요.
That’s good. Thank you. 교회에서 누가 벌컥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나도 맞대서 분을 내지 말고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그 사람의 속 사정을 이해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주 친한 친구관계를 관포지교라 하지요. 중국 춘추시대 제 나라에 관중과 포숙이 있었는데 둘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관중과 포숙아가 동업을 하였는데, 어느 날 보니까 관중의 집에 가게 물건이 있는 것입니다. 관중이 포숙아 몰래 가게 물건을 가져다 쓴 것입니다. 하지만 포숙아는 “그래, 관중은 처자가 있지 않은가, 물건이 많이 필요하겠지” 하면서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관중이 가게 돈을 훔치는 것을 포숙아가 몰래 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포숙아는 “그래, 관중은 노모를 모시고 있지 않은가! 노모님을 봉양하려면 돈이 더 필요해서 그랬을 거야” 하면서 이해해 줍니다. 후에 관중이 제나라 재상으로 올랐을 때 포숙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릴 적 곤궁할 적에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의 분배를 내가
포숙보다 더 많이 가져갔는데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벼슬 길에 올라 많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 주었다. 또한 내가 포숙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내가 세 번이나 도망을 치자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다고 질책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집에 연로한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알아 주었다.
그가 나를 알아 주었다, 나를 이해해 주었다, 유스 플랑크노스 해 주었다며 칭송한 것입니다. 우리도 관중과 포숙아의 관계처럼 상대방의 허물을 나무라거나 책망하기 전에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해야만 했던가 하고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해준다면, 유스 플랑크 노스를 한다면 분쟁이 서있을 자리는 없어질 것입니다.
아니 존재했던 분쟁도 안개가 갇히듯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지난 여름에 Central Park에서 Homeless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금방이라도 칠 것 같은 기세로 “It’s not fair, it’s not fair”하며 고함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속 사정을 다 들어 보았더니 그럴 만도 하였습니다.
Georgia 주에서 목수일을 하다가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집을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혼자 LA로 왔다가 살기 힘들어 여기 산호세로 온 것입니다.
와서 목수일을 하면서 여자를 하나 알게 되었고, 곧 동거를 시작하였는데 여자가 자기 돈을 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심하게 다투었는데, 여자가 경찰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자 달려온 경찰은 자기에게는 말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 여자 말만 듣고 그 밤중에 자기를 내 쫓아 버린 것입니다. 자기는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후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I understand you, The world is not kind to you. The world is not fair”하고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동거하던 그 여자도 너를 버렸고, 네 아내도 너를 버렸지만 네 아버지는 성경에 나오는 이 탕자의 아버지처럼 너를 버릴 수 없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혹시 네가 돌아오는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속히 너를 기다리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You are the man of God, nobody told me like this. I went to the church to get the food. But no one said like you.” 하면서 서러움에 북받쳐 울기 시작하는데 T-shirt 앞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Homeless라는 선입견으로 버리고, 저 사람이 왜 Homeless 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저렇게 해야만 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에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사람을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서로 유스 플랑크노스, 서로 이해하도록 서로 노력하십시다.
겉 모양이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속사정을 보면서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내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갈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
원래 용서란 에피 헤이마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Send away, 떨어 버리다 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면 그것이 나에게 Bondage 가 되어 나의 자유 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기분이 좋았다가도 그것만 혹은 그 사람만 생각하면, 화가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그 사건의, 혹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리하여 온전히 떨어버리고 참 자유 함을 얻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 에피 헤이마스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했다고 해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저 내가 자유로와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헤아우토이스, 서로 용서하여 하나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서로를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고치려 하지 않고 서로의 허물을 덮고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시카고에 있는 휘튼 칼리지라는 복음주의 학교가 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졸업하셨고, 이 학교 안에 빌리그래함 센터가 있어서 더욱 유명하지요.
그리고 매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세계 한인선교대회가 바로 이 학교에서 열리기 때문에 우리 한인들에게는 더욱 많이 알려졌습니다. 지난 2008년에 열렸고, 이제 금년 7월 마지막 주에 열리는데 저도 북한 선교 세미나를 인도하러 갈 것입니다.
여하튼 이 학교에도 한번은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머리는 길게 따고 옷은 다 헤진 것을 입고서 이유 없는 반항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업시간에도 고성이 오가고 학교는 점차 질서를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긴장하게 된 이사진들은 마침내 총장을 해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총장은 전 이사진들, 전 교수진들, 그고 전 학생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설도중 그는 장발에 아주 불량한 복장을 한 학생을 지목하여 강단으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학생은 “왜 하필이면 나야, 나만 머리 길렀나? 내 복장만 불량한가?” 하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총장은 “존경하는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 여러분, 그리고 교수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나는 오늘 이 학생을 비판하거나 책망하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겉 모양은 이럴지라도, 이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위한 열정, 앞으로 주님을 위한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음을 여러분들께 보여주기 위하여 앞으로 나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학생에게로 다가가서 “My Brother! I love you” 하면서 Hug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집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장내는 울음바다가 됩니다. 그 사건 이후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삭발을 하고 복장을 단정히 하였으며, 학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것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적인 감정이나 인연을 모두 내려놓고 서로 공평하게 대하며, 상대방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며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능히 서로 헤아우토이스 할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헤아우토이스, 서로 용서하여 하나가 된다면 우리 교회는 주님의 임재하심 뿐만이 아니라 산을 옮기는 능력은 물론 이 지역의 토양을 바꾸는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베이지역의 큰 부흥을 몰고 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및 말씀자료,에베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