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6

물고기 뱃속에서 부른찬송

Posted by on Jan 16 2012 at 08:23 pm

요나1:1-2절
(물고기 뱃속에서 부른 찬송)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요나 하면 우선 불순종 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으며, 아마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저 역시도 처음 소명을 받았을때는 요나가 처음 선교사 사명을 받았을 때와 같은 태도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받은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목회자 소명을 받고서도 요나처럼 피하여 도망치던 내가 마침내는 정든 직장과 집을 떠나면서 “이 시대의 바울 사도가 되겠습니다, 이 시대의 베드로가 되겠습니다” 라는 각오와 결단으로 신학교를 향하였습니다. 가장 큰 사이스의 U-Haul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그 옆에는 어린 딸을 태우고 그 뒤에는 제 처가 둘째아이의 젖을 물린체 운전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왔습니다.
실로 소명을 받은지 5년 반만의 일이었습니다.
거의 한 주일에 걸쳐 이삿짐을 쌓는데 마음이 착잡하였었습니다.
나의 손 때가 묻었던 책들과 잡지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짐을 다 싣고 출발을 하였는데, 그 날 따라 비가 얼마나 심하게 오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운전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속으로 이 것이 요나의 뱃속인가 착각하며, “불순종한 요나와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라고 복음성가를 불러대며 운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요나의 뱃속 같은 삶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였습니니다.
그 때는 요나가 얼마나 위대한 선교사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따라부른 노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교만한 생각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요나는, 적어도 처음에는 처음에는 불순종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20여년의 목회를 해 오면서 언젠가 부터 요나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었고, 요나의 갈등이 바로 나의 갈등이었습니다. 북한선교의 소명을 주셨는데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아무런 대책도 없어 “북한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라는 핑계를 대며 미루어 왔습니다.
누군가는 니느웨에 가서 그 백성을 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여야 하듯이 누군가는 니느웨보다 더욱 위험하고 힘든 북한 땅에 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꼭 내가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을 사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땅에 선지자가 어디 요나 하나였겠습니까?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선지자들 중에 왜 요나를 택하셨을까요?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는 북왕국 사마리아는 여로보암 2세 때로써 전성기를 이룰때였습니다. 북왕국 사마리아 바로 위는 아람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열왕기 하에 보면 이 아람이 틈만 있으면 사마리아를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
그리하여 북왕국 사마리아는 아람의 공격에 늘 시달려 오면서 나라는 황폐해지고 약화되어 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람에게 중요한 성읍들을 빼앗긴 후로는 더더욱 힘들고 불안했습니다.

아합왕도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당하여 전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도 사마리아의 운명이 염려되어 죽기전에 왕을 불러 화살을 주면서 아람을 향하여 여호와의 화살을 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람은 목의 가시처럼 사마리아를 늘 괴롭혀 왔는데 여로보암 2세때에 앗시리아가 대대적인 남하정책을 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람을 치게되었고, 그때부터 아람은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약화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람은 이제 더 이상 사마리아를 괴롭힐 힘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사마리아의 여로보암2세는 아람을 쳐서 그 옛날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게 되고 나라는 부강하게 됩니다. 오랜만에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 북왕국 사마리아는 축제 분위기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람을 쳐서 승리하였다는 교만에 빠져 이전보다 더욱더 심각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영적으로 인도하여야 할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자신들의 영적 소경상태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미 아합왕 시대에도 사마리아 선지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웠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합이 아람을 치러 갈 때 선지자 무리들이 모두 승리를 예언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미가야 선지자 한사람만이 반대 하였었고, 그 때문에 화가난 아합은 그에게 내가 승리하고 돌아 올때까지 고난의 떡을 먹으며 기다리라며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왕이 참으로 승리할 진대 그렇게 하라고 반박하였고, 그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아합은 전사합니다.

이미 이렇게 선지자들의 영적인 눈이 감겨있었는데, 여로보암 2세때에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더더욱 감감한 소경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부르십니다. 그것은 다른 선지자들은 영적인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깨어있는 요나를 발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요나는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열정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시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징벌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앗시리아가 빨리 망하라고,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산을 약탈해 간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빨리 망하라고 기도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진실한” 이란 의미의 아밋대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비둘기라는 의미가 있는데, 아마도 진실을 원하며 사모하며 살아왔던 그의 아버지가 “너는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평화를 사랑하라”는 의미로 요나라 이름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비둘기의 눈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아가서에 네 눈은 비둘기처럼 아름답다 하였는데 비둘기는 한번에 하나씩 밖에는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오직 솔로몬 왕에게 그렇게 하였듯이 성도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그 눈, 그것을 아름답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 다른 선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택하셔서 아주 힘든 사역지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선지자들은 감당하지 못하는 사명인지라 요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다는 것은 부담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또한 요나는 자기민족을 괴롭히고 힘들게하고 고통을 안겨준 니느웨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용인할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그러한 악한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여야지 왜 그 나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까? 그대로 악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을 당하고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아야 마땅하지,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까? 만에 하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실 텐데, 자기 원수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을 받아 드릴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우리 동포들이 회개없이 멸망을 당하여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 들에게도 우리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우리 못지않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왜 아프리카는 가고 페루나 아마존 정글은 가면서도, 아니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는 아프가니스탄에는 가면서도 정작 우리 동포에게는 가기를 꺼려합니까? 그러므로 북한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북한에도 복음을 증거하십시다. 북한 동포들에게도 하루속히 주님의 복음이 들릴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또한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된 것은 단순히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서 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니느웨 보다는 다시스가 자신의 적성이나 성격에 더 잘 맞고 또한 거기서 선교활동하는 것이 훨신 더 효과적일 것 같아 그렇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도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미루다보니 주님께서 부르신 그 소명도 점차 희미해지고, 북한 선교에 대하여서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깊은 잠에빠진 요나처럼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가 지금 물고기 뱃속처럼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요나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낯선 뱃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기꺼이 죄의 댓가를 치르겠다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책임을 지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고 코끝이 찡한 설교입니다. 저는 특별히 죄가 많아서 그런지 눈물없이는 이 말씀을 대하지 못하겠습니다.

서로 누구의 탓인가 가려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쓸 때, “내가 이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위하여 지금 당장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어서 내 목을 치시요” 외치는 요나의 모습, 저도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요나처럼 책임감과 용기가 있는 설교를 할 수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요나가 너무나도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비둘기” 라는 의미를 가진 요나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평온한 배에 나쁜 소식을 가져온 비둘기라 해서 요나라고 이름 짓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요나가 너무도 존경스럽스럽습니다. 그 분을 생각할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도 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저 요나만큼만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가장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은 그 분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주님께 드린 찬송입니다. 물고기 뱃속과 같은 상황에서 찬송을 부를때 요나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 분이 물고기 뱃속에서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체험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가라 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인하고 굳건하며 고집도 세며 의사표시를 확실히 하는 요나를 선택하여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그 험하고 위험한 사지에 가서도 선교활동을 할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요나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요나에게도 니느웨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물고기 뱃속” 이라는 연단이 필요하였습니다. 연단 가운데 다시만난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숨도 못쉴만큼 갑갑하고 한시도 못견딜만큼 온몸이 끈적거리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요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거역한 죄, 이 얼마나 끔찍한 죄입니까? 가룟유다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져버리고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밖습니다. 그 후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자기 밭에있던 나무에 목을 매었는데 줄이 끊어졌는지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밖으로 빠져나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는 사도행전 1:16-20절에,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잡는 자들을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간 자신, 이로 인하여 환난과 연단을 받게 되며 주변사람들, 배에 탄 사람들 까지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감당하겠다며 자신을 희생하였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아직 그 생명을 거두워가시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다시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기뻤습니다. 요나는 행복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다움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요나의 이 감사찬송이 끝난 다음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고기 뱃속에 처한 요나와 같은 심정으로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불평하지 마십시다.
오히려 요나처럼 감사하십시다.
그러면 요나처럼 우리 주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마른 땅, 육지로 보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마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현재의 위치에서 감사의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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