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7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창세기27:1-10)

Posted by on Aug 27 2011 at 11:04 pm

창세기 27:1-10절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
                                                                                                                                                                                                                         June 19/ 2011

미국의 아버지날은 본래 6월 19일인데 실제로는 6월의 세번째 일요일에 지킵니다. 그런데 오늘이 6월 19일 인만큼 처음 재정했을 때와 동일한 날짜입니다. 첫 아버지날은 미국 워싱턴주 스포케인에 살던 Sonora Smart Dodd 여사에 의하여 제청되었습니다.

어머니날이 처음 시작된 웨스트 버지니아주에서 어머니날이 공식적으로 지켜진지 2년 후인 1910년 5월, 교회에서 어머니날 설교를 듣던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자신을 비롯한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곧 아버지날도 제정할 것을 제안했고, 이 안은 곧 그 도시의 목회자와 스포케인 YMCA 회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날짜는 Dodd 여사의 아버지 생일인 6월 5일로 정하기로 했으나, 그때로부터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로 2주일 뒤로 미루어 19일이 되었습니다.

곧 전국적으로 아버지날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으나 어머니날처럼 빨리 의회에서 이 날 제정에 대한 안이 통과되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남성으로만 되어 있던 당시 의회에서 의원들이 아버지날 제정이 자화자찬하려는 의도로 오해될까봐 꺼려했던 탓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전승 탈무드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스릴수 없어 이 땅에 아버지를 두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신한다 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모로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첫째, 본능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비하여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관계속에서 개발됩니다.
자녀는 어머니의 몸의 일부이기 떄문에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9개월을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Bondage 는 본능적입니다. 서로 탯줄로 이어졌는데 이 탯줄을 통하여 서로의 감정도 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만할때 탯줄을 짤라내지만 그래도 그 탯줄 양끝에 남아있는 세포를 통하여 어느 일정기간동안 어느정도는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보이지 않아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아이가 극한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는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느낄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체험을 통하여 이해되고 발전되어 갑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이런 생물학적인 Bondage 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처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삭은 자기 두 아들들과 특히 작은 아들과는 대화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맏아들 에서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그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는 것 외에 그 아들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장자권을 물려주겠다는 그것으로 아들에게 자기의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사냥을 같이 나갔으면 좋았으리만, 장자권을 물려 줄 터이니 아들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된 것입니다.

야곱 역시도 자기 형과 거래를 합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저권을 사겠다는 장삿꾼 속셈을 언제부터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이삭의 가족은 본의아니게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오늘날에도 이런 가정들이 있습니다. 부부싸움도 물론 성격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 때문에 싸웁니다. 성격차이도 알고보면 돈을 어떻게 벌고 사용하느냐에 대한 이견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관계로 다져져야 할 가족끼리의 관계가 물론 사랑도 있지만 그 사랑 마져도 거래관계로 전락해 버린다면 얼마나 슬픈 관계입니까?

사랑하는 아버지들이여!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십시다. 조건없는 희생의 사랑, “너를 위해서는 내 목숨도 포기할수 있다” 라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다.

아버지의 사랑은 더불어 살면서 관계를 통하여 개발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면 아버지의 사랑도 끊어집니다.
나이든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삭은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은 배웠지만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백세된 아버지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만한 기회가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나이차이가 많아서 그랬었는지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기는 하였어도 아들로서 아버지와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결박하고 죽여 재물로 바치려했던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 충격은 평생 잊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권리가 있는 것인지,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다는 것은 어떤 사랑인지……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녀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너무 바쁘다보니 아들과 시간을 같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서는 힘들 것입니다. 한때 큰 회사의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임종시에 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낼수 있었을 텐데 인생을 참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저도 아버지와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은데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이 아들은 고등학교때 풋볼 쿼터백이었다고 합니다. 평소 게임에는 아버지가 바빠서 오지 못했지만 마지막 졸업 게임에는 아버지께서 참석해 달라고 미리부터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제일 잘 보이는 제일 좋은 좌석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아들은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아버지의 예약된 좌석에만 눈이 갑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고 양 팀이 입장을 하는데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크게 울리자 아버지께서 자기 스탭들과 막 들어오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응원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저절로 났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뛰면서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쌓은 기록을 이미 갱신하고도 남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아버지께 손을 흔들려고 보니 아버지는 언제 퇴장하셨는지 죄석은 비어있었습니다.
그 뒤로 아들은 집을 나갔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무척 사랑하였지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회사일을 우선순위로 살앗던 아버지, 회사의 번영이 모든것을 다 해결해 줄지 알고 회사를 위하여 헌신하였건만 그 결과는 실로 비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둘째, 하나님의 사랑처럼 아버지의 권위도 주변사람들이 인정할 때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남편 이삭을 무시합니다. 이삭에게 어떠한 약점이 있었는지 아니면 리브가의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녀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채 남편의 사랑하는 맏아들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을 속일 계획을 세웁니다.
가족끼리 이러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니 정말 기가막힐 지경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이런 모든 음모를 다 알고서도 말한마디 못합니다. 어떤 분은 이삭이 놀란 것은 하나님께서 큰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신 약속을 망각했었다가 생각해 내고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비약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 말씀은 리브가가 들은 것이지 이삭이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그 말을 했을 지라도 이삭이 믿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삭이 놀란것은 자신이 속임을 당했다는,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인 리브가가 아버지 이삭의 권위를 무시하자 자녀들도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아버지 역할을 전혀 할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권세도 주변에서 인정해 주어야 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세가 무너지자, 자녀들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쟁을 아무도 말릴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처럼 돌일킬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셋째, 이바지의 권위를 무시한 자녀는 더 큰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부모님으로 부터 편애를 배웠던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요셉에게는 비단옷을 입히고 양치는 형제들이 양을 잘 치고있나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형제들의 감독이 되게 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무시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을 속였듯이 유다는 야곱을 속입니다.
그것도 똑같이 염소새끼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맏아들 루우벤으로 부터 아버지로서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첩과 동침을 하는 치욕, 야곱은 죽는 그 순간까지 루우벤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보다는 다른사람(뱀)의 말을 중시여기던 하와나 아내의 과오를 덮어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변명하고 덮어씌운 아담으로 부터 아버지의 권위는 약탈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멀어 자녀의 잘못된 행위에 아무런 훈계도 하지 못한채 아내의 눈치를 보며 축복을 해야했던 이삭, 혹시 오늘 우리 가정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아버지들이여 영적으로 깨어 영적인 가장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3 Responses to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창세기2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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