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06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사도행전 1:4-5절)

Posted by on Jul 06 2011 at 09:23 pm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사도행전 1:4-5절)

                                                                                                                                                                                                                                                                                                                                              June 5/2011
잘 아시다 시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실망한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치고 숨었다가 결국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등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등극할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따랐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 참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체포되고 신성모독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잠하게 죽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 행여나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까 애타게 기다렸지만 끝내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난 3년간 가정도 포기하다시피 하고 줄기차게 따라다녔는데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만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 그 분을 따라다녔던 잔당들을 색출한다고 합니다. 잡히면 그분처럼 끔찍하게 못박혀 공개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노라고 하여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공포에 질린채 예루살렘의 어느 골방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하루하루를 조바심 속에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즉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의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분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며,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바로 이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지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와는 상관도 없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오셨던 하늘로 당장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40일 동안 사람들, 특히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골방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않고 살아있음을 여러차례 여러방법으로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무너진 제자들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라, 내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그리고 믿어라” 고 하십니다. 그래도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먹는 빵좀 가져와봐, 나는 귀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예수다” 라며 빵을 잡수십니다. 이렇게 하여 무너진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마침내는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게 되는 순교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것이 바로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탄생입니다. 즉, 교회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분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불신과 절망속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순교자로 변화 되었듯이 믿음이 약하고 절망과 불안에 시달리는 자들이 믿음으로 굳게서며 예수님의 귀한 제자들로 거듭태어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실망한 제자들처럼 비록 연약하고 의심으로 가득찬 믿음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때가되면, 주님의 때가되면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한분한분 역시도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그 분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리는 제자들처럼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40일 동안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제자들을 부르셔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4절을 NIV 로 보니까 “On one occasion, while he was eating with them, he gave them this command: ‘‘Do not leave Jerusalem, but wait for the gift my Father promised, which you have heard me speak about.” 고 되어 있습니다. But other versions do not have “while he was eating”.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식사자리였든 아니었던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 승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때, 이제 떠나면 다시는 만날수 없다는 것을 피차 아는 그러한 분위기 일때, 특히 임종을 앞둔 부모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할까요? 여러분들은 무슨 말을 하실것 같습니까? 저는 우리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이런 말은 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저하고 친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서울공대를 나오시고 OSU 에서 공부를 하신뒤 50대에 신학교에 가셔서 사역을 하시다가 얼마 전에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급히 출국을 하셨는데, 95세의 어머님이 이 65세된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예수 잘 믿어라, 얼마 안남았다” 하시고 운명하셨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 한말씀 하시려고 미국에서 목회하는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숨을 거두지 못하시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고 주님께서 부르신 소명대로 성심껏 목회를 해왔고, 이제 은퇴를 앞둔 이 나이든 아들 목사에게 “예수 잘믿어라” 고 하시더랍니다. 지금보다 더 잘 믿어라, 지금보다 더 똑바른 신앙생활하라, 더 확신을 가지고 섬겨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다,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는 의미 아닙니까? 종말이 가까우면 핍박도 심해지고, 살기도 힘들어지고, 유혹도 많아질 텐데, 그 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예수 잘 믿어라 고 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이러한 임종을 앞둔 부모님처럼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서로 헤어지면 저 천국에서나 다시 만날수 있는, 지구상에서는 마지막 만남, 마지막 순간에 주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받을때까지 기다리라” 이 마지막 명령이자 부탁은 구체적으로 3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자기들의 스승을 처형하고 자기들의 꿈을 산산조각낸 끔찍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거기 숨어 있으면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합니까? 그리하여 제자들은 틈만 있으면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번째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십니다.

고난과 불안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피하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다가 엄청난 수치를 당하고 다시 올라옵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 베델로 가지않고 숙곳에 정착하려다가 딸이 강간을 당하는 수치를 당한 후에 베델로 올라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위험이 닥치고 환난이 닥치고 고난이 닥치면 어떻습니까?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리 피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요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은 고난의 예루살렘을 피하지 말고 축복의 예루살렘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실패의 그 자리, 나의 아픔과 고통의 산싫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죽기를 바랐을 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욥 36:20-21) 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의 겨울이 곧 올 텐데 네가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것은 죄다” 라며 위로하거나 동정하시지 않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끝내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욥 40:7) 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믿음이 좋든 그렇지 못하든 고통중에 서 있기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하루속히 피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견디며 해결하고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해결하고 극복할 때까지 피하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고통의 그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예루살렘이 축복의 예루살렘이 될때까지 그 자리를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픔과 수치와 실패의 예루살렘이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인하여 기쁨이요 수치를 씻는 예루살렘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선물은 다름이 아닌 성령을 받는 것이었고,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으로 침례 받는 것이 무엇이길래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하십니까? 왜 무엇때문에 이렇게 간절히 당부를 하십니까?

주님은 앞으로 닥칠 심한 박해에 대하여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8:23절 이하에 사건은 바로 앞으로 닥칠 교회의 핍박에 대한 예고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떠있는 나룻배, 잔잔한 호수를 저어가야하는 나룻배가 갈릴리 호수 복판에 떠 있으니, 풍랑은 일고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날이 뜨거운 날은 뜨거운 태양볕으로 인하여 무덮고 습기많은 공기로 뒤덮혀 있습니다.  거기에 위의 북쪽에 있는 시리아의 허르몬 산의 눈녹은 찬물이 내려오면 소용돌이 바람이 불고 커친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더운날 갈릴리 호수를 노저어 간다는 것은 풍랑을 만나러 간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한낮에 갈릴리 호수로 노저어 가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획된 대로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 깊은 잠이 드십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아 공포에 질립니다. 배가 그렇게 흔들려도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깊은 잠이 들었다 할지라도 배가 그렇게 물결이 그렇게 출렁이고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이 흔들리면 그리고 제자들의 비명소리가 나면 금방 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깨우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으시고 주무십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배에 함께 하시는 이상 그 배는 절대로 뒤집히거나 침몰하지 않을 터인데, 제자들은 두려워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렇게 위험한 위험하고 숨막히는 상황에서도 주무시는 것 같이 침묵하시는 주님을 소리질러 깨운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만난 이 나룻배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떠있는 유람선처럼 시설좋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신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앞으로 태어날 교회는 쉴새없이 풍랑을 만나고,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비바람을 다 맞으면서 열심히 노를 저어도 금새라도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무시는듯 침묵하시는, 하지만 주님께서 그 배에 함께 하시기 떄문에 침몰하지는 않는 이러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누가복음 21:27-28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앞으로 너희에게 닥칠 박해와 핍박은 오늘 나에게 한 것보다 더욱 심할 터이니 그 때를 위하여 오늘은 눈물을 흘리지 말고 보관해 두어라 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닥칠 박해와 핍박이 이렇게 극심할 것임을 미리보신 주님은, 이 핍박과 박해를 이겨낼 무기를 주고자 제자들로 하여금 그 무기를 갖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기는 다름아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의견도 분분하고 신학적으로 정립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자들이 그떄까지 얻지 못한 것, 체험하지 못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므로 제자들은 지금 귀신을 몰아내는 권세와 병든 자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은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 자들 고치는 능력이나 은사가 아닙니다. 아마도 이것은 육안으로 볼수없고 만질수도 없는 영적인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함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받은 정도를 지나,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셔서 특별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으면 이제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것을 깨우치거나 지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이 늘 나에게 인식을 시켜주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가 되면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으며,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함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함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 나면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할수 없으며 믿어지는 정도를 넘어서 그 분과 함께 살게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정할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모두 이러한 상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극심한 박해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기 떄문임을 주님께서 먼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성령으로 침례 받으신 체험이 없으십니까? 성령으로 침례 받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으로 침례받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의심하지 않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참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저를 포함한 한국사람들은 서양사람들에 비하여 인내심이 더욱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저에게 인내심을 갖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기도는 즉시 응답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식품점에 가면 마이크로 오븐에 덮히면 곧 먹을수 있도록 한 얼린 음식이 많이 나옵니다. 커피도 끓여 먹으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귀찮으니까 인스탄트로 먹고, 더구나 요즘 우리가 먹는 그 커피 좀 보십시오. 그 안에 프림과 설탕까지 다 들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오늘 점심 메뉴는 피자입니다. 밀가루 반죽하여 펴서 그 위에 피자소스 뿌리고, 양파, 버섯, 토마토 썰어넣고, 그 위에 치즈 얹혀서 오븐안에 10분만 넣으면 금새 뜨끈뜨끈한 피자가 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하기 싫으니까 소파에 반쯤 누워 텔레비젼 보면서 피자 Order합니다. 그러면 30분 이내에 문 앞에서 “딩동, 피자 가지고 왔습니다”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내하기 힘든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기다리라고 당부하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중에 기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의 성패는 얼마나 잘 인내하고 기다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사랑은 오래참고” 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오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오래 참을 수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지 못하고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거나 다른 길로 빠져버리니까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Lord, do not turn away from me. How long should I wait? 주님,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한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 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때까지 기다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응답을,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단련됩니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자기성찰을 하게 됩니다. 기다림을 통하여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하시며 기다림을 통하여 일꾼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고자 하면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일꾼을 찾으십니다. 우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자입니다. 고난의 장소를 피하지 않고 실패의 언덕에서 도망치지 않고 고난과 실패의 장소를 기쁨과 승리의 장소로 변화시키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자를 택하십니다. 단순히 예수믿고 구원얻은 수준을 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자,  예수가 항상 심장에서 고동치는자,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생명까지도 내 놓을수 있는 열정있는 자들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줄 아는 신앙의 소유자를 택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바로 항상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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