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05
나를 보고싶어 찾아오시는 주님
아가 2:8-9절
[8절]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앞절에서는 술람미 여인이 왕의 품속에 안겨 있었습니다.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왕이 직접 자신에게 와서 자신을 그 잔치에 직접 데리고 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술람미 여인은 현기증이 났습니다. 얼른 기운을 차리고자 동료 여인들에게 건포도를 달라 사과를 달라 합니다. 그 때 왕이 자신을 은밀한 침실로 데리고 가서 왼손으로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만져줍니다. 그러면서 술람미 여인은 왕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왕이 자기 안에 자신이 왕 안에 있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간곳없고 오직 왕과 자신 둘만 있는 그러한 상태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8절에 와서는 왕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왕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은 왕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왕이 자기 곁에서 떠낫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시 전까지 왕의 품 안에 있었는데, 그 품안에서 편히 쉬며 왕과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멀리서 왕의 소리가 들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이 방금 전까지 나와 함께 계셨는데, 그리하여 나는 황홀감에 빠져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님은 이미 자기 곁을 떠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아직 천국에 있지않고 이 자상에 있기 떄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육신을 덧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헨리 메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거듭난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과 한몸을 이루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하였는데 주님이 직접오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하지만 잠시 뿐입니다. 잠시 후에는 주님은 또 우리를 떠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덧입고 있는 이상 우리 속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영원히 같이 하실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동안만 Visitation 하셨다가 또 떠나십니다.
그렇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왕이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는 데에도 피곤합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하여 건포도가 필요하고 사과가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저 천국에 있었더라면 그녀는 피곤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건포도나 사과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킬 필요없이 언제든지 먹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주님과 가까이 때로는 멀리, 즉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합니다. 주님은 물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더” 라며 나무에 가지가 꼭 붙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지만 인간인지라 성령 충만하였다가 다음순간에는 깊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제 술람미 여인은 왕이여 속히 돌아오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왕이 달려옵니다. 산을 넘어 달려 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면서 환상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먼 거리에 계실지라도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 분께서 산을 넘고 골을 넘어 오시는 모습, 시 공간을 초월하여 오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또한 음성을 들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헨리 메튜는 요한복음 14:3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를 인용하면서 종말때에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에 비유하였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지만 또한 이 땅으로 오시고 계십니다. 헬라어로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용됩니다. 영어도 이런 개념이 없고 우리 말에도 이런 개념이 없이 오직 헬라어에만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면서 지금 또한 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야 예수그리스도 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종말론적로만 생각하면, 주님이 지금 오시고 계시는 모습을 다 볼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짜와 장소를 알수 있다는 해석이 될수 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위험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리스도의 예비신부된 우리가 깊이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오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통하여 보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9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라고 하였는데 왕은 예비신부와 하나가 되고싶어 그녀가 있는 창가에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 유대인들의 결혼에 대한 풍습을 잘 이해 하여야지 이해 할수 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결혼하고자 하면 우선 자기가 마음에 정한 신부의 아버지를 찾습니다. 그러면 신부의 아버지는 술상을 차려놓고 그 예비신부를 부릅니다. 그러면 신랑될 그 남자가 술을 한잔 따라 줍니다. 그 잔을 받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받아 마시면 “난 당신의 신부가 되겠습니다” 라는 의미로서 그 때부터 신부의 아버지와 신부의 몸값을 흥정하게 됩니다.
일단 신부값이 정해지면 그 남자는 신부의 몸값을 마련하느라 열심히 동분서주하며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값이 어느정도 마련되면 자기 아버지와 함께 혼인 날짜를 정하게 됩니다.
몸값이 다 마련되면 신부를 데릴러 가야 합니다. 우선 몸값이 지불되면 이제 신랑은 자신이 편안한 날에 아버지와 함께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신부를 데릴러 갑니다. 이 과정이 다 끝날때 까지 산랑은 신부를 만날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너무 보고싶어 견딜수 없으면 밤에 몰래 와서 살짝 만나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하였듯이
이처럼 본문의 왕은 술람미 여인을 너무도 보고싶어노루처럼 사슴처럼 서리없이 재빨리 산을 넘고 골을 지나 몰래 예비 신부의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창살 틈으로 예비신부를 바라봅니다.
이처럼 주님은 아직 당신의 신부는 아지니지만, 이미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렀기 때문에 하루속히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날짜를 아직 아버지와 상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우리를 데리러 오실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허락만 떨어지면 오늘이라도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 우리가 너무도 보고 싶어서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관찰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햐 눈치채지 못하게 창문 틈으로 살짝 살짝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예비신부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혼인날짜를 아버지와 상의하시면서 우리를 몰래 찾아와 감찰하시는 우리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어떻게 하여야 겠습니다. 만일 주님의 순결한 신부된 우리가 중간에 외도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창 틈으로 보시는 주님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그저 잠만 쿨쿨 잔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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