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03

교회의 본질과 능력(사도행전 01:03절)

Posted by on Jul 03 2011 at 09:18 pm

교회의 본질과 능력
(사도행전 01:03절)
                                                                                                                                                                                                                                                                                                                      May 22/2011

지난 주에 본 것과 같이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입니다. 의원 누가는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며 자신이 먼저 기록한 누가복음을 한줄로 간단히 요약합니다. 누가복음의 소위 말하는 Scope(범위) 는 예수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고 사도들에게 명하시고 또한 승천 하실 때까지의 일이라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그 후부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3절에,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했는데,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하신 사역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당신께서 다시 사셨음을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여러 곳에 나타내셨습니다. 곧바로 아버지께로 달려가고 싶었겠지만 아직 세상에 할 일이 계셨던지라 40일 동안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40일 동안이나 머무시면서 그 일을 하셨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고린도 전서 15:13-15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16-20절에 다시한번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이 다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으면 예수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죽어서 아무것도 해 줄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까? 죽은 사람을 믿어서 무엇이 유익이 됩니까? 또한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어떻고 모세가 어떻고 다윗왕이 어떻고 모두 교훈적인 이야기일뿐 아무런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면 뭣하러 기도는 하는 것이며, 무엇하러 교회는 다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도 나이든 영감의 미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로마군에 의하여 십자가에 매달린채 불태워 죽임을 당하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웃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원형극장에서 소에 떠받쳐 갈비가 부러지고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와도 “내가 지금 나의 왕 예수님 앞에 나아가니 나의 옷깃을 여미어라” 고 호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몰래 숨어서 만나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도둑질 하지말고 거짓말 하지 맙시다” 라고 서로 말하고 또 다음장소를 약속하고 헤어졌답니다. 찬송가는 커녕 성경도 없었던 그들에게는 몰래 잠시만나서 서로 “주님께서 살아계심” 을 확인하고 다음 만날 장소를 약속한후 헤어지는 이것이 예배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순교할 수있는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 라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를 하는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이 지금 나와함꼐 하신다 라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저같이 절망하고 낙심하여 우울증에 빠져있어야 마땅한 사람도 평강을 누리며 삽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알고 느끼기 때문에 내 처지에 상관없이 허허 웃으며 살수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웃고 다니니까 더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분들도 있지만, 나를 보면 힘이난다 라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이러한 환경속에서도 언젠가는 주님의 때가 이를 것이요, 그 때에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아니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기에 주님은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동안이나 지상에 머무시며 당신께서 살아계심을 나타내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다시 사셔서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에수님의 제자들도 믿지 못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였다고 그 장면을 다 보여주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저희 아버님이 1981년 6월 9일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당시 모습이 생생한데, 제가 돌아가시기 14일 전에 4일 휴가를 얻어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온 10일 만에 돌아가셔서, 제 친척되시는 분께서 염하는 것도 다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산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금 이 장소에, 이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나타나셨다면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그 분을 철저하게 여기 저기를 보면서 확인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얼굴 모양은 어떠한지, 키는 비슷한가, 옷차림은 어떠한가 등을 볼 것입니다. 남북 이산가족을 확인 할 때에는 어렸을때 흉터를 보고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마찬가지로 몸에 무슨 특별한 흉터는 없는가?

그 다음으로는 목소리도 확인하겠지요. 그리고 묻겠지요, 당신이 정말로 우리 아버님이십니까? 내가 분명히 우리 선산에 묻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디 계셨다가 이제 오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당신이 귀신이 아니라 실제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하고, 먹을것을 주어도 보고 등등 확이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다시 돌아오시자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귀신인가 하여 놀라 기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 있는 분이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신지 아니면 허상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눈으로 자세히 확인하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있던 방에 나타나셨을 때 하였는데, 나타나셨다는 Greek word “ophthalmia” 는 눈 혹은 눈알에 라는 의미입니다. 눈에 대하여 연구하고 눈병을 치료하는 안과를 “Ophthalmology” 라고 하는데 바로 헬라어 Ophthalmia 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 뜻대로 말한다면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자세히 관찰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몇명이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20명이 있었다면 “이 분이 과연 예수님이신가?” 하고 40개의 눈으로 자세히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참다못하신 예수님은 “애들아, 먹을것 좀 가져와 보아라” 하시면서 귀신은 먹지 못하지만 나는 살아있기 떄문에 먹는다 라며 잡수십니다.

물론 이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어느 곳에 가셨을때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귀신으로 생각하면 예수니께서 하신대로 “너희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가져오라” 고 해 보십시오. 귀신들도 많은 짓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이 사람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을 지상에 머무시면서 우선 실망하고 넘어져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가 다시 모으셨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주님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꾸준히 격려하고 힘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 주님께서 임재하신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배도 부활하신 주님께 드리고 선교도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하여야 하고 구제와 봉사및 각종 행사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설교도 부활하신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요, 기도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만일 교회에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빠진다면 성경에서 의미하는 교회와는 다른 기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결여 되었다면 그 예배는 온전하지 못한 예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행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은 이 40일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일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40일 동안이나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공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일반 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가는가에 대하여서는 자주 언급하면서도 정적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라에 대하여서는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허지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였으면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무려 40일 동안이나 설명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신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잘 이해하는 것이 우리 믿는자들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에 Heaven 과 Kingdom of God 이 있는데 우리 말로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나 천국이나 모두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지만 그 성질에 대하여 말할때에는 다릅니다.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지역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안식할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성도들이 주님앞에서 밤낮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합니다. 성벽은 청옥 황옥 백옥등 이루 말할수 없이 화려한 보석으로 되어있고 밤과 낮이 따로 없이 항상 밝고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하며 평화스러운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지역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아래에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몰아내고 병든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병이 나을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이러한 이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에는 일어나지만 어느때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하에 있을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악의 새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가복음 1:15절에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하셨습니다.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께서 사역을 하시기 시작하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지역적인 개념이 아니라 진행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자를 고칠때, 그 모인 무리들이 교회이며 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자들이 늘어나면서 Kingdom of God 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근원을 따지자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광야교회를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민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맛보게 하며 또한 그 나라를 목표로 두고 살게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설립 목적은 죽 예수님께서 당신의 칫값을 주고 교회를 세우시는 첫번째 목적은 우선 당신께서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주신 첫번째 사명은 전도를 포함한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기초를 둔 교회라면 우선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나 설교등 예배의 모든 순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슬프고 절망적인 마음이 위로받고 새힘을 얻어야 할 것이며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기적의 능력을 체험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자가 귀신이 나가며 고통에 시달리던 자가 평안을 되찾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후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세상으로 나가서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배에서 이러한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채 전도하고 선교하러 나간다면 과연 주님의 능력이 그 자리에 임하실 것을 기대할수 있을까? 그저 책임감이나 채면 때문에 하는수 없이 하는 전도나 선교에 과연 주님의 능력을 기대할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에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떄문에 교회들이 점차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능력을 거론하면 이단이나 이상한 종교인으로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의 일환으로 생긴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서도 프로그램 잘 짜고 다양한 행사를 주관하여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교회에서 성경에 없는 일, 부활하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 전서 2: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합니다. 왜 이런 각오와 결단을 말합니까?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아덴에서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철학적 지식이 높았던 아덴사람들 앞에서 당대의 최고학문을 배운 학자처럼 남성명사 여상명사를 교대로 사용해가며 최고의 명설교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저 몇사람만 관심을 가졌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교만했음을 철저히 회개한 바울은 고린도로 내려와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겠노라” 고 작정을 합니다. 이제는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지식적인 설교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터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갰다” 고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제 부터는 아덴에서처럼 전도하러 나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아름답게 할까 연구하고 연습하자 않고 그 시간에 기도 한번 더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결론적으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결국은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4: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결국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 그분의 기름부으심(Anointing) 을 체험하며 그 분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때 우리를 통하여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능력이요 권세이며, 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 인 것입니다.

하지만 깨우침으로 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획한다고 그렇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9: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신 것처럼 기도외에는 이런 능력을 받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교회의 본질과 권세가 회복되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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