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02

성령의 역사(사도행전 01:01-2절)

Posted by on Jul 02 2011 at 02:51 pm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01:01-2절
                                                                                                                                                                                                               May 15/2011

룻기를 주제로 한 “추수 때더라” 라는 책은 이미 원고를 끝내 출판사에 보냈고 이제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나오미나 룻처럼 그리고 저를 포함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있는, 아직 그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 흑암속에서 너무 고달파 흐느끼는 성도들이 큰 은혜와 도전과 소망을 갖고 다시 일어설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지난번부터 광고를 드렸듯이 오늘부터 사도행전 1장에서부터 5장까지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교회의 권세 혹은 교회의 권능에 대하여 같이 살펴 보겠습니다. 주님의 승천으로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하시기까지 기도에 전념한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해 가면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 그리고 그로 말마암아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갖게되는 교회의 권능과 권세에 대하여 같이 생각하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를 바탕으로 “교회여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를 회복하라” 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을 보시겠습니다.

1. 사도행전의 역할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27권중 가장 중요하거나 가장 고귀한 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긴밀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이 없었더라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세상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께서 오시지 않으시니까 모두 포기하고 다시 옛날처럼 고기잡으로 나갔던 것을 누가복음 21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바로 그 디베랴 호수에서 주님을 다시 만났는데,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왔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았던 사실은 오직 사도행전 만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자살한 가룟유다를 대신으로 맛디야를 선출한 것도 그리하여 맛디야도 12사도 중의 하나가 된 과정도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또한 갑자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엄청난 사역을 하게 되는데 그가 누군지 그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사도행전이 아니면 어떻게 알수 있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등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의 서신서를 사도행전이 아니면 어떻게 깊이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성장해 왔는가? 라는 의문에 명쾌한 답변을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된 과정,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오면서 겪는 혼란과 핍박, 그리고 최초로 이방인 다민족 교회인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은 누가 어떻게 개척한 교회들이었는지, 사도행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알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사도행전이 없었더라면 복음서도 이해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나머지 신약성경의 역사적인 그리고 정치적 및 사회학적 배경들을 분석하여 이해가 훨씬 정확하고 풍부해 집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신약성경들끼리 떨어진 사이를 메꿔주며 서로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잘 이해하면 신약성경의 줄거리가 저절로 잡히게 됩니다. 반대로 사도행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산약성경끼리의 연결이 끊어져 부분적으로 아무리 잘 이해한다 할지라도 총체적인 이해를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2. 사도행전이란 이름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은 의원 누가의 선교일지를 2세기경에 신약성경에 편입시키면서 “사도들의 행적” 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Acts, Acts of Holy Spirit, Acts of Apostles” 둥 여러 제목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말로는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것을 기록했다” 라고하여 성령행전이다, 혹은 회개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하여 회개행전이다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용상으로는 Acts of Holy Spirit 이 가장 타당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수리아의 안디옥, 소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에까지 복음이 퍼지는 것은 물론 사람이 하였지만 실제로는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이 유럽으로 가지않고 아시아쪽으로 먼저 퍼졌다면 중국과 우리나라및 동남아가 먼저 복음화가 되고, 그러면 지금쯕 세상은 굉장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울사도 한 사람이 이렇게 인류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겟습니까? 그런데 우리도 바울사도처럼 성령에 붙잡힌 성령의 사람이 되면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수 있습니다.

최근에 캄보디아를 다녀온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양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를 발전시켰듯이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캄보디아를 개발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찌기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 특히 지방에 내려온 캐톨릭 선교사님들은 농장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양봉을 직접하면서 가르치고, 품질좋은 치즈를 생산하고 가르쳐 지금은 치즈회사로 키워낸 덴마크 선교사님도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100여년이나 앞서서 선교사들의 사역을 허용하였습니다. 일본은 아시아 일대의 교통의 요지가 되겠다고 판단하여 스페인 선교사들이 일찍부터 왔습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받아 드렸고, 그 중의 하나가 일찍부터 총을 만들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반도는 교통의 요지도 아니고, 또한 중국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기 떄문에, 또한 인도처럼 향료도 없었던 지라 선교사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우리나라도 서양 선교사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미얀마나 다름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캄보디아가 우리나라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런 식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관을 짓고 거기서 농장, 가축기르는 사업, 농산물 가공, 지역개발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있습니다. 450여 분의 한인 선교사들이 물론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등 열심히 사역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캄보디아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워낙 가난하니까 오히려 선교사들에게 은근히 도움을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말레이지아나 베트남은 많이 개발이 되었고, 아마도 캄보디아 다음으로는 미얀마 그리고 라오스등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좀 느슨해지면 인도네시아도  이러한 붐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세계역사를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도 곧 이러한 선교를 할수 있을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3. 사도행전 개요
누가복음 1장1-3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1-2절에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고 한 것을 근거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그 다음 이야기, 즉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어떻게 퍼져나가는 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자연스럽게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원 누가가 바울 사도를 따라다니면서 기록한 선교일지로 봅니다. 바울이 처형 당하기 전에 로마에 갇혀 있을 때 기록했든지, 아니면 그후 즉 서기 80-90년 혹은 90-100년 사이에 소아시아 어느곳에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아마도 로마의 대 부호 데오빌로 라는 사람의 종이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헬라어로Theo(God)-philos(Love) 라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실제 그 분 이름이 그런지 아니면 그 분의 별칭이나 별명이 그런지는 알수 없습니다. 여하튼 그 사람은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엄청나게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여러 종들중 가장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누가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보내어 예수님에 대하여 충분한 자료를 찾아 자세히 보고하라 합니다. 그 당시 의원일은 종들이 하였기 때문에, 누가 역시도 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하튼 그는 그 옛날 배를 타고 여러날을 거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와서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샅샅히 수집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장1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하였듯이 알고보니 자기 주인 데오빌로 뿐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책으로 내려고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세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출생시절부터 역사적으로 자세히 기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누가는 과연 연구가처럼, 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가 그리고 그 때 로마 총독은 누구였는가 이러헌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탄생하셨는가를 정확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론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기록하게 하셨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 당시까지 기록된 역사적인 책중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다는 증거도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데오빌로는 참으로 의미있고 값있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복음이나 사도행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값있고 보람된 삶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본 이름조차 정확히 밝히지 않고 예수님을 드러나게 하는 그의 겸손함 또한 높이 살 만합니다. 

그 당시 로마에는 데오빌로 못지않게 높은 직책과 많은 종들을 거느리며 부를 누린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올바른 곳에 자기의 재물과 정력을 투자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까지, 아니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의 이름은 계속해서 회자 될 것입니다.

누가는 자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에 대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상세히 보고한 후 바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바울사도와 동역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일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 후서 4:10-11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하신 것을 보면 바울 사도가 처형당할 때까지 바울사도와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그토록 따르면서 같이 동역하였던 동역자들이 바울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니까 모두 떠납니다. 바울에게서 더이상의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자 하나 둘 이런이유 저런이유를 대며 떠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원 누가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킵니다.

몰락하는 사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끝까지 같이하기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참으로 바보스런 일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병원사역은 그런대로 하여도 양노원 사역은 잘 하지 않습니다. 병자가 낫으면 자기 교회에 올수도 있지만 양노원의 노인들은 그럴 소망이 없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양노원에 있는 분들이 연금을 받아 십일조를 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성실하게 사역을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분들은 그런것도 잘 안되기 때문에 그저 일년에 몇번씩 심방하는 정도가 대부분 일 것입니다.

이처럼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소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어쩌면 주님은 소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더 크게 사용하시는 지도 모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그렇게 유명하게 된 것도, 노벨상까지 수여하면서 그 분의 공로를 높히 치하하였던 것은 그 분의 사역이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분보다 훨씬 더 큰 사역, 더 많은 사람들 전도, 더 획기적인 일들을 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빌 브라이트, 로렌 커닝햄, 빌리 그래함 등 쟁쟁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사역은 다른 사람들의 사역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나면서 부터 가난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원망하며 자기 운명을 저주하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원하는 것 먹게하고 따뜻한 방에 재워 주었습니다. 얼마 남지않은 그들의 마지막 남은 삶을 정성껏 돌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래도 이 세상에 왔었던 것이 불행만은 아니었다” 며 행복하게 죽어갔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의 철학은 누구나 아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이 보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심어주기 보다는 짧은 기간만이나마 사랑을 베풀어 기쁨을주고,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하며 마침내는 평안히 눈을 감을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간단하고 쉬운 것 같지만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역입니다. 돈만 있으면 후원자만 있으면 할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곧 죽을 사람, 그렇다고 전부터 알던 사람도 아니고 생면 부지의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주고 진정으로 사랑을 베푼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죽고난 후 그 허전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래서 의사들도 불치의 병으로 입원하는 환자들에게 마음을 주고 정성껏 돌보다가 그 환자가 죽고나면 다음부터는 그러한 환자들을 맡고싶지 않다 고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테레사 수녀님의 이러한 사역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였고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의원 누가 역시도 이제 곧 처형당할 바울, 다른 사람들은 그의 종말을 미리 예견하고 다 떠났는데 끝까지 바울사도와 함께 하여 바울을 위로하였습니다. 누가라고 바울이 풀려날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순교를 앞둔 이 선교사님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어주기 위하여 끝까지 목숨을 걸고 그 옆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바울사도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사도행전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우리가 앞으로 중점적으로 볼 사도행전 1-5:42절 까지는 배경이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6-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 선교이며 13-28장은 바울에 의한 세계선교로서 연대기 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에 대하여서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훨씬 이전에 기록된 데살로니카 전서에서는 주님께서 당장이라도 오실 것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기록된 데살로니카 후서에서는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두손 다 놓고 오실 때만을 마냥 기다리지만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였었는데, 당장에는 오시지 않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지, 즉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도록 선교를 해야지 그때에 주님께서 오심을 암시합니다. 어쩌면 한 단계 더 발전된 좀더 구체화된 종말론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구체화된 종말론을 근거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어느 골방에 함꼐 모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이제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며 기도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선교및 전도 그리고 구제등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는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 목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이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신 그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성령이 강림하셨는데 교회가 아무런 능력을 받지 못했다면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문제들은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주님께서 각 교회에게 주신 능력을 받지 못했거나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주님꼐서 주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일반 사교단체와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기관에서는 할수없는 하나님꼐서 교회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곳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을 통하여서만 나타나는 이적을 행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마가복음 9:28-29절에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였듯이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도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고 상식적인 일일지라도 우선 기도로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받았음을 확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우리 온 교우들을 통하여 항상 나타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One Response to “성령의 역사(사도행전 01:01-2절)”

  1. Marsha says:

    A little rationality lifts the quality of the debate here. Thanks for conbirtu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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