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16

어머니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사야49:13-19)

Posted by on Jun 16 2011 at 01:25 pm

Isaiah 49:13-19절
(어머니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

                                                                                                                                                     May 08/2011
오늘은 어머니 주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어머니보다 더 좋으신 분이 있을 까요? 내가 잘했든 잘못했든 항상 내 편에 서 계셨던 우리 어머님, 나이가 한살 두 살 더 들면서 어머니 사랑이 더욱 고맙고 간절해 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머니 생각만 하여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 하면 무엇보다도 성 오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빗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평생을 기도하신 어머니, 마침내는 그 아들이 성 오거스틴으로 만들어 질 때까지 얼마나 애절하며 절규하는 기도를 했을까요? 그래서 그런 어머니 되라고 딸을 낳으면 “모니카” 라고 이름 짓는 부모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몇 년 전 만두 속 사건으로 전국을 혼란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만두를 먹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리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 벌써 여러 달을 먹어 왔는데, 그 더러운 것을 먹었고 그 더러운 것 중의 일부가 내 몸의 피와 살이 되었다는 것 얼마나 기분 나쁜 일입니까? 밤 먹을 때마다 생각이 낫을 것이며, 그 놈의 만두 보기만 해도 밤맛이 싹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놈 잡아서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 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제 수사망이 좁혀오고 곧 붙잡힐 것 같자 그 아들은 한강에 투신 자살을 하였습니다.

아들이 빠진 자리를 망연자실 한 채 멍 하고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그 자리에 홀로 서서 망연자실한 채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있던 그 모습, 주름진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넋나간 사람처럼 아들의 간 자리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고 아무리 죄질이 고약한 놈이라고 정죄한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가장 소중한 아들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 정신 분열증을 일으켜 큰 소동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국 통합병원으로 후송조치를 취하였는데, 집에서는 군대간 아들이 걱정되어서 편지를 써도 답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면회를 왔습니다. 위병소를 찾아와 면회신청을 하는데 당시 위병소장이 “그런 미친놈은 죽어나 버려야 하는데” 라고 하였습니다. 그 병사 때문에 온 부대가 긴장하고 한 밤중에 5분 대기조 출동을 하고 제압하느라 한숨 자지 못하고 고생한 터였던 지라 화가 나서 한마디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 그 때부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부대를 고소하는데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사령부 헌병대장이 와서 모든 부대장 이하 모든 장교들을 집합시키더니, 일주일 만에 사건을 종결짓고 떠났습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어머니는 청와대 간부를 통하여 진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한 6개월 후 어느날은 갑자기 청와대에서 밀사가 와서 우리 부대뿐만이 아니라 그 일대 부대를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여기 저기서 모여든 부대장들로 인하여 그 날 연병장에 헬기가 가득하였습니다. 헬기가 한곳에 그렇게 많이 앉는 것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 후로 장교들이 한사람 한 사람씩 사령부로 끌려가가 시작하였고 화기 애애하였던 부대는 공포의 분위기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후 약 6개월 후에는 사령부에서 보안대장이 나와서 부대장 이하 모든 장교들을 집합시키더니 그 자리에서 문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약 한달 후에 장교 몇명이 징계를 받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정신 분열자였고, 국가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그 한사람 때문에 온 부대가 1년 이상을 영외 출입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으며 헌병대원들과 보안대원들이 수시로 드나듦으로 인하여 시달려야 했습니다. 언제 끌려가서 심문을 당할지 모르니까 아무도 가슴 펴고 크게 웃음 한번 웃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 어머니에게 돌을 던질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어머님의 사랑이요 어머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살아 계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어머님 오래 살게 해 주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머님께 잘못한 것들이 생각나서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자유스러운 사람이 있을까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부르기만 하여도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의 사랑이 이렇게 크신데, 어머님도 사람인지라 아니 연약한 여자인지라 마음은 그렇지만 할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여인이 어찌 젖먹이를 잊을수 있겠는가”하였는데 마음속으로는 잊을 수 없지만 잃어버리거나 하는 수 없이 잊고 살아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제가 고난당할 때 어머님께서 급히 달려 오셨습니다. 어머님이 옆에 계시니까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어 주실수 있습니까? 옆에서 걱정하고 위로하여 주셨지만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는 못합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아들의 몹쓸 병을 고칠수 있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면서 아들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실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 딸을 위하여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의사가 고칠 병이라면 병원비가 아무리 많이 든다 할지라도 고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할 수 없으니까 예수님께로 와서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련한 어머니의 간청을 “자식의 상에 있는 것을 집어 개에게 던짐이 옳지 않다” 며 냉정하게 뿌리칩니다. 웬만한 일이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욕을 먹으면서도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화를 벌컥 내고 욕을 한마디 해 주던지 고쳐주기 싫으면 그만두지 왜 욕은 하느냐고 따지고 덤벼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어머니, 자기 딸을 살려야 합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자기 딸은 영원히 귀신들려 미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딸을 위하여 그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억지로 꾹 참으며 “나를 개로 여겨도 좋습니다. 그런데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습니까?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게 주십시오” 라면서 더욱 강하게 매달립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라, 네 딸이 구원을 얻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머니는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며 간구할 수는 있어도 그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왜 나의 기도는 이렇게 응답되지 않는가 혹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라고 탄식을 하게 됩니다. 특히 갑작스런 환난으로 고난을 받을 때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잊으시지 않고 항상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아무런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지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를 결단코 잊지 않고 있다.  어미가 자녀를 잊을지언정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49:19절에는 “대저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지금은 원수들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짓밣혔고 멸망을 당하여 황폐해져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그 땅을 고칠 것이며, 무너진 성을 수축하리라. 예전보다 더욱 크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할 것이며 원근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하여 도시는 북적이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선포입니다.

물론 죄를 지은 백성들이 회개하지도 않는데 왜 축복을 주십니까? 이것은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라고 반박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하면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강하며 깊고 높다고 하였는데, 우선 어머니의 사랑을 봅시다.

자녀가 때가 되면 밥을 잘 먹기를 바라는 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너는 말 안들었으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 전에는 밥 안줘” 라고 하는 어머니가 있을까요? 설령 화가 나서 말은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정말 그 자녀가 미워서 그럴까요?  용서를 빌지 않았다고 자식이 굶어 비실비실 하는 모습을 보기를 좋아하는 어머니가 있을까요? 수저에 밥을 담아서 자식을 따라다니며 “자, 이 한숫갈만 더 먹어라” 고 하시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닙니까?

제가 군에 사병으로 입대 할 때 산지 얼마 안된 새 테니스화를 신고 갔습니다. 훈련소로 투입되기 전에 우선 수용연대라는 곳에서 지냈는데, 거기서 하룻밤 자고 났더니 제 새 신발은 간데없고 다 떨어진 운동화 몇 짝이 남더라고요. 맨발로 다닐 수 없어 제 발에 맞지도 않는 짝 자기 신발을 신고 다니다 보니 발 뒤꿈치가 까지고 피가 났습니다.

훈련소로 들어가는 날 군복을 지급받고 입고 있던 옷을 다 싸서 집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옷을 보고 우리 어머님 얼마나 우실까 생각하니 차라리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법이라니 부쳐야지요. 그리고 훈련소로 들어갔는데 수중에 있던 돈을 다 신고하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발가 벗겨놓고 속 내의까지 다 샅샅이 뒤져서 빼앗아 가더라고요. 심지어는 영화에서 배웠는지 심지어는 궁뎅이 속까지 검사를 하더라고요.

배는 고프고 몸은 고달프고 누웠다 하면 집 생각이 나는데, 어느 날은 옆 중대에 있던 고향친구가 제 형이 다녀가면서 전해주고 가라고 하면서 돈을 주더라고요. 현역 장교였던 지라 면회신청을 하지 않고 훈련소 안에까지 들어 왔었는데, 내가 야외 훈련을 나갔기 때문에 못 만나고 대신 친구에게 돈을 남겨두고 간 것입니다.

부대에서 보내온 내 마지막으로 입고 갔던 옷을 보면서 네 생각이 나서 형에게 들려보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그 돈을 꼬깃꼬깃 접어서 옷 소매 사이에 숨기고 바늘로 한번 떠서 빠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몰래 빠져나가 PX에서 빵을 사먹는데, 그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님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해서 어머님이 “그래, 잘 했다, 그럼 내가 지금부터 축복을 주마” 그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고생하는데 “그래, 그것이 다 네 잘못으로 인한 탓이야, 지금 속히 용서를 빌라” 라고 하는 어머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회개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회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갓난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알기나 하는가요? 그저 젖이나 먹고 기저귀나 적시고 배고프면 울기나 하는 것 밖에 아기가 무슨 일을 합니까?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어가면서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님께 죄송하고, 나아가서는 어머님께서 살아계시는 것만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 상태에까지 자라게 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체험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인과응보 식으로 생각하다가는 이해가 가지 않는 때가 종종 생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죄악에 빠져있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명망을 당하고 고통 중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 환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아직 회개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왜 망했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그렇게 경고하였지만 모두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죄악에서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실 것이라 그러므로 이제 바벨론에 항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고 불타자, 하나님께서 항상 임재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왜 함락이 되고 불타야 되느냐고 탄식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은혜를 선포하십니다. 내가 이 불탄 성을 다시 수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유다는 역사상으로 사라진 나라요, 예루살렘 성은 예로부터 반역하는 왕이 많이 나타난 성이라고 바벨론 왕이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초토화를 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성에 살수가 없고 이제는 들짐승이 사는 곳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위에 성을 다시 쌓으시겠다 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부르시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집 나간 호세아의 아내가 창녀가 되었을 때 호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직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팔 때 호세아는 그녀를 찾아 갔습니다. 그녀는 지금 호세아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아직도 몸을 팔고 싶어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법으로 한다면 그녀는 반듯이 돌에 맞아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그 모든 것을 눈감아 주고 같이 살려고 자기 아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왠 일입니까? 몸을 팔았으면 돈을 벌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빚까지 몽땅 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자기를 버리고 간 아내, 한 남자도 아니고 여러 남자와 통간하면서 빚만 몽땅 진 아내, 그 아내를 찾아올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사람과 혼인을 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찾아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가 막힌 고백을 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고 추악해진 아내에게 “이제는 다른 남자들 잊고 나하고만 사랑을 나누자, 나도 다른 여자들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너와만 사랑을 나누겠노라” 라고 약속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만일 호세아가 자기 아내에게 “지금부터 진정으로 회개 하라” 라고 하였으면 지정으로 회개를 하였을까요? 물론 생명을 구하고자 회개하는 척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남자에게서 돌이키지 않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가 2:4절에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He has taken me to the banquet hall, and his banner over me is love.” 하였습니다. 그 분이 먼저 잔치를 배설하고 나를 그 잔치로 인도하시는구나. 그리고 내 위에 승리의 기를 꽂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승리의 깃발이로구나 하였습니다. 그 분이 나의 사랑을 빼앗게 된 것, 그 분이 나를 정복하게 된 것은 그분의 어떠한 능력이나 겉모양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라 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빼앗은 것은 솔로몬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솔로몬의 그녀를 향한 희생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하였듯이,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도 그 분의 우리를 향한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희생의 사랑이라면 나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아무도 어머니의 사랑 앞에 뻔뻔스럽거나 자유스럽지 못하고 그저 감사할 뿐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그 사랑보다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랑을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머님의 사랑에 늘 감사하며 어머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아까우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라는 심정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도 최소한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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