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02

순종이 열심히 사역하는 것보다 낫다.

Posted by on Jun 02 2011 at 07:37 pm

                                                             순종이 열심히 사역하는 것보다 낫다.
                                                                          마가복음 01:39-45절 
                                                                                                                                                                                  2011-04-03
갈릴리의 가버나움 성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예수님은 곧바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자 베드로 장모님이 열병으로 심히 앓고있는 것을 보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녀가 곧 일어났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날 밤에 각색 병든자들, 귀신 들린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베드로의 집에 왔습니다. 밤 늦게까지 그들을 고쳐 주시고, 무척 피곤하셨겠지만 더 큰 사역을 위하여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자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그곳을 떠나셔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렇게 바삐 사역을 하시고 계시는데 하루는 한 문둥병자가 주님께로 나옵니다.
지금도 한센씨 병이라 하여 무서운 병인데, 예수님 당시 문둥병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데다가 한번 걸렸다하면 회복되지 않는 무서운 병으로 알고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무서워 했는지 문둥병에 대하여서는 레위기 13장과 14장 두장에 걸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에 감염되면 처음에는 각 마디 관절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며 신경조직을 교란시키고 상하게 하여 몸의 감각을 잃게 합니다. 어느 분이 소록도에 계시는 자기 아버지를 방문하고 와서 쓴 글에, 가장 슬펐던 일은 자기 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해 오시면서 발에 가시가 찔려 피가 철철 나는데도 전혀 감각이 없어 가시가 찔린 줄도 모르더랍니다. 가시에 찔려 피가 줄줄 흐르는 데도 아픈줄도 모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감각이 없다는 것, 발이 썪어들어가도 아픈 줄도 모르고, 손이 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벌겋게 타는 난로에서 손을 뗄줄 모르는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무감각 한 상태를 영적으로 문둥병이 걸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무서운 문둥병에 한번 걸리면, 물론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완치가 되지만, 대개 9년 만에 죽게 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각 마디가 무감각해지고 통증이 오다가 점차 감각이 사라지고, 손가락이 썪어들어가고 코가 무너지며 얼굴 형상이 이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아주 비참하게 죽습니다.

또한 전염성이 강하였기 때문에 문둥병자가 만진 것이나 그의 몸이 닿은 곳은 어디든지 부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레위기 13장45-46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 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하였듯이 문둥병에 걸리면 주변사람들은 물론 자기 가족과도 생 이별을 하게되고 완전히 고립된 채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신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자로 판명되는 그 날부터 그는 세상으로부터, 그의 가족으로부터도 철저하게 고립된, 정말 삶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욱 많은 제도들을 강화하여서 문둥병에 걸린 자들은 살 가치도 없는, 아니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암적인 존재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굴속이나 골짜기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음식을 담은 바구니를 줄로 달아서 굴 입구나 혹은 골짜기에 놓아두면 그것을 먹으면서 연명하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굶어 죽거나 거기서 그렇게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둥병은 저주받은 병으로 믿고 있었으며, 누구든지 문둥병에 걸리면 엄청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환자들에 비하여 문둥병자들에 대한 동정심도 적었습니다.

만일 문둥병자가 일반 거리에 나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문둥병자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흙모래를 뿌립니다. 그 흙모래가 얼굴이고 어디고 상처난 곳에 밖히면 얼마나 아프고 괴롭겠습니까? 그러므로 문둥병자는 수용소에서 나와서도 안되지만 길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이 흙모래와 돌맹이를 던지기 때문에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문둥병 환자다 아니다 는 오직 그 관할구역 제사장이 판단하였습니다.

이렇게 문둥병 환자들은 길거리에 나올수도 없고 굴속이나 어떤 골짜기에 철저하게 격리수용되어야 하는데, 지금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행렬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간구합니다. 그가 어떻게 나올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율법을 어기고 지금 세상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알고 나왔을까요?

아마도 그 누군가 그 문둥이 격리촌에 와서 그 소식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문둥이들이 모여사는 굴 입구나 혹은 골짜기 근처에 와서 큰 소리로 “예수님이 우리 지방에 오셨습니다. 그 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여러분들의 병도 고침을 받을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도 문둥병에 감염될수도 있는 위험을 무릎쓰고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 이 문둥병자의 가슴을 열어주고 그로 하여금 설레게 만드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문둥병자는 그날부터 목숨을 걸고 그 수용소를 빠져나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고자 결심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누가복음 5:12 절에서는 “Full of leprosy,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린 자”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문둥병이 전신에에 퍼져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 되었으면 걷는 것은 물론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먹는 것도 시원치 않고 입을 의복도 다 떨어져 여기저기 살이 다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문둥병이 그의 전신에 퍼졌는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목욕은 언제 하였는지, 정말 그 옆에 갈수도 없을 만큼 썪는 냄새가 풍겼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수용소에서 매일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저기 음식썪은 것들이 나 뒹굴고, 사람이 죽어도 제대로 매장할수가 없기 때문에 여기저기 시체가 썪어 나자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썪어가는 시체위에 쉬파리들이 끓고, 들개들이 와서 뜯어먹는등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처참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이미 삶을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 분은 나를 고쳐 주실 거야. 여기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는 없어. 내가 그 분을 뵈올 수만 있다면, 내가 그 분 앞에 나아갈수만 있다면 난 반듯이 완쾌 될수 있을거야. 그는 여러번 다짐하고 다짐하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물론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지금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있는데 율법이 문제입니까, 체면이 문제입니까?
물론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모래를 던져댔겠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 이 사람에게는 그까짓 것이 문제가 될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장면을 다 보셨습니다. 아니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인생에 대하여서도 모두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결단을 하고 여기까지 왔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 날 주님께로 나아올 줄 미리 아시고 그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맞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하였습니다. 더럽다고 피하고 병이 옮을까 피하고 무서워서 피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직 주님은 그를 반가히 맞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장17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듯이 주님 앞에는 깨끗한 자가 가는 것 아닙니다. 더러운 자들이 깨끗해 지려고 갑니다. 문둥병자가 씻음을 받으려고 가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으려고 나아갑니다. 죄인들이 용서받고 싶어 가는 것입니다.

그 문둥병자는 예수님 앞에 감히 나갈 수도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자기 병이 고침 받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고쳐주실지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자기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분 앞에 가기만 하면 반듯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려,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나이다” 라고 합니다.

나의 병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당신께 달려 있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살리시고 싶으면 살리실수 있고, 그대로 놓아두면 나는 죽습니다. 여기 까지는 내 발로 왔지만 여기서부터는 주님 차례입니다. 나는 이미 율법을 어기고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문둥이 격리촌으로 되돌아 갈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미 율법이 그어놓은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당신께서 고쳐 주시면 나는 살겠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나의 목숨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이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한 믿음의 고백입니까?

그러한 그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긴다, Compassion 이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향한 깊은 동정심을 의미합니다. 그를 보자마자 주님은 아주 특이한 행동을 하십니다. 4장1절에,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피부가 새까맣게 썩어들어가고, 이쯤되면 손가락도 마디마다가 썪어 들어갈텐데, 그리고 온 몸에서 진물이 줄줄흐르는 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하였습니다.

그 더러운 몸에, 아니 그 부정한 몸에, 나의 피부에 닿으면 나도 즉시 문둥병에 걸리는 그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주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셨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율법적으로는 그에게 손을 대기는 커녕 가까이 하는 것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일이지만 주님은 그 율법을 어기고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난 너를 사랑한다, 너 있는 그 대로 사랑한다.” 라는 의미로 그를 민망히 여기시며 그에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고통을, 상한 심령을 만져 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만져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이러한 Touch, 만져주심을 체험하셨는지요?

2008년 2월 첫째 주일날 이었습니다. 그 날은 Guest Speaker 가 설교를 하기로 하여서 마음에 여유가 좀 있었습니다. 그리고 웬지 모르게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벽 2시쯤 자리에 들었습니다. 모처럼 늦게까지 자려고 하였는데 5시에 잠이 깨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졸리는 눈을 지긋이 감고 소파에 비스듬히 엎드려 “Lord! What can I do at this situation? What do you want me to do?” 라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손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시더니 다시 이마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내 몸에서 이상이 일어났습니다. 감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무겁고 착잡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걱정 근심은 사라지고, 무슨 일도 감당할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 났다면 여러분들에게도 반듯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져주심, Toutch 를 구하십시오.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만쟈주심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얹으신 주님은 “Be Clean! 깨끗함을 받아라” 하시니 그 즉시로 문둥병이 그에서 떠나고 그가 깨끗해졌습니다. 머리부터 발까지 순서대로 천천히 낫게된 것이 아니라 즉시로 전신이 다 깨끗하고 정결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이상 문둥병자가 아닙니다. 그는 깨끗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기쁘고 감사할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제 그는 잃었던 자기의 삶을 되찾았고 그간 떨어져있던 자기 가족들과 다시 만날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몹시 들떠있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주님은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뵈어라” 고 하십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여서 제사장으로 부터 건강하다는 판결을 받아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문둥병자는 아무리 꼐끗하게 고침을 받았을 지라도 제사장이 깨끗해졌다고 선포를 해야 께끗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에 제일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기쁜나머지 제사장에게 가지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 고침받은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이곳 저곳에 간증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왔는가요? 주님나라가 크게 확장되었는가요? 예수님이 기뻐하셨는가요?

주님께서 그 지경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더이상 공개적으로 사역하실수 없어서 그곳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그는 참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깎아내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옳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쫓겨나야 됩니까?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주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는 전도하느라 너무 바빠서 제사장에게 알려 네 신분부터 회복하라 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주님은 아마도 제사장을 통하여 그의 문둥병이 고침을 받게 되었음을 확인하게되고, 제사장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의 문둥병을 치료하셨다는 소식이 퍼지게 하시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의 사역이 증거되기를 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제사장에게로 가서 네 몸을 보이라 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의 사역에 대한 열성이 주님을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이란 실수를 범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열심히 사역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 이전에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무엘 상서 15장2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열심히 사역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실수를 범합니까? 몰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열심히 사역하는 것 보다 더욱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사역하는 것으로 순종하는 것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아니 열심히 사역하는 것을 순종하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합리화 시키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역에는 주님께서 안계실 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함을 이 사건은 잘 보여 준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문둥병자 촌에까지 가서 전도한 전도자의 본을 받아 우리도 하루에 최소한 한사람 이상에게 전도하십시다. 이 문둥병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께 나아왔듯이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논리와 상식에 맞지 않다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와 선교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John Steinbeck 의 The East of Eden 에 이런 사건이 소개됩니다. Salinas, CA 에서 상치농사를 지어 LA 로 출하를 하여야 하는데 열차가 제시간에 맞추지 못하여 열차에 가득 실은 상치가 다 썪어 버립니다. 막대한 손해를 입은 아버지는 침을해 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궁리를 하게 되는데, 마침 2차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때에는 군량미가 필요한데 그 중에 콩이 가장 많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밭을 빌려 콩을 잔뜩심었더니 정말 예상한 데로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됩니다. 아버지가 상치농사로 잃은 것보다도 더 많은 돈을 내밀면서 상심하시지 말라고 합니다.그때 아버지는 고맙다 수고했다 라고 하지 않으시고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하라고 했느너. 내거 돈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너는 언제나 이 아비를 기쁘게 할수 있느냐” 하십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 심정은 아닐까요? 주님은 요한복음 14장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계명을 자킬때 우리의 사역의 현장속에 주님의 임재하심과 권능이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까?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생각하기 전에 우선 이 약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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