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4

나의 사랑아 너는 화창하구나

Posted by on May 14 2011 at 12:45 pm

나의 사랑아 너는 화창하구나
아가서 1:16-17절

16-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본문은 술람미 여인의 신랑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며, 성도의 주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했는데, 원문에는 Indeed, 실제로 혹은 참으로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그냥 일시적인 감정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겪어보니 실제로 조사해보니 당신은 참으로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분,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야” 라고 부르듯이 신부된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감정이 아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우리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공개적으로 고백할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일시적인 사랑이 아닌, 주님과 실제로 교제해보면서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지는 그러한 체험적인 사랑을 고백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술람미 여인의 사랑하는 신랑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선 “당신은 어여쁘고” 했는데, 우리말로 어여쁘다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페” 는 예쁘다 라기 보다는 바르고 공정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남자에게 어여쁘다 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것은 외모적인 사랑이 아니라 인격과 성품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며, 항상 공정하고 바르신 성품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님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항상 바르고 공정하신 성품을 본받아야 합니다.

또한 화창하다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임”은 날씨가 화창하듯 외모가 훤칠하고 아름답다 라는 것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의미는 아주 매혹적인, 아주 홀딱 반해버리도록 매력적인 모습을 의미합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은 자기 신랑을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3: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고 하였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흠모할 만큼 핸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잘생겼다 핸썸하고 매력적이다 고 한 곳이 없습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그분의 외모에 반해서 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 사랑, 그리고 생명력있는 가르침과 베푸신 이적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이 반해버린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외모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외모에 반해서 예수믿는사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설교자의 외모에 반해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를 위한 희생의 사랑, 그 생명력있는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들도 외모나 설교를 얼마나 잘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하면 생명력있는 말씀 예언의 말씀을 선포할수 있어야 할 것인가와 설교자의 인격과 성품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술람미 여인은 고백합니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다” 고.
그런데 푸르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syskois는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화려한가, 엄숙한가, 웅장한가, 값진가, 경건한가 등의 그 분위기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침상은 쉬는 곳이요 잠을 자는 곳입니다. 사람이 제대로 쉬지못하고 잠을 재대로 자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는 건강하다는 의미로 “푸르다” 라고 번역했는지도 모릅니다. 침상은 아늑하고 평안한 곳인데, 여하튼 술람미 여인은 아주 화려하다, 웅장하고 경건하며 생명력이 넘친다 라고 합니다.

이방 문헌에는 이 단어가 Fertile 한 침실, 즉 생산을 많이하는 침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침실에 쾌락이 넘치고, 자녀를 많이 낳듯이 농산물이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하는 염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의 해석인 미드래쉬에서는 본문의 침상을 성전에 비유하였습니다. 성전을 짓기 전 까지는 텐트에서 유리하며 살았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음으로써 한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화려한 침상에서 편안 잠을 잘수 있게 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즉 방황기가 끝나고 안정기에 들어온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반하여 오리겐을 비롯한 초대 크리스천들은 침상을 교회의 예배당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예배당의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 침상에서 부부가 동침하여 자녀가 태어나게 되듯 예배들 통하여 주님을 만나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믿어왔던 것입니다.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했는데, 먼저는 침상을 말씀했고 이번에는 그 집이 어떠한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성경에서 매우 아름답고 아주 고귀한 나무로서 레바논의 특산품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므로 백향목 들보와 잣나무 석가래라는 것은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집인 미드래쉬에서는 이 대목을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게하고 잔 그 돌,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성전에 비유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이 돌을 기초로 그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성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전승 탈무드에서는 이 대목을 니골라 문의 기적과 연관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7개의 문이 있었는데 그중 동쪽으로 난 문을 니골라 문의 기적과 연관하여 니골라 문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문은 황금으로 변하게 되지만 이 동쪽으로 난 문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라 믿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특히 남편들로부터 바람핀 의심을 받게된 여인들이 제사장에 끌려나오면 제사장은 그 여인들을 이 문 앞에서 그 의심을 밝히는 쓰디쓴 물을 마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혹은 문둥병자나 출산한 여인을 정결하는 예식을 할 때에도 이 문 앞으로 데리고 와서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직을 밝힌다, 정결하게 하는 곳이다, 깨끗하고 흠없고 거룩한 곳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라는 것은 나의 집은 거룩하고 흠이없는 곳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백향목을 성경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향료를 잣나무에 비유하면서, 이 16-17절을 각 교회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구원받은 성도들과의 영적 교제로 이해하였습니다.

의심을 받는 여인이나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나 출생하기 전의 아이는 생명은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이들이 니골라 문 앞으로 와서 검증을 받고 제사장이 선포할 때 비로소 온 사회가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니골라 문은 주님의 심판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니골라 문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님 앞에 흠없는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로서 주님과의 영적 결합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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