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09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고벨화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고벨화
아가서 1:14절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3절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금관을 쓴 임금님이 아니라, Alas! 피투성이 시체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밖히신 그 피투성이 시체를 나의 두 가슴사이에 두고 밤을 새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14절에 와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있어서 엔게디에 있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NASV에는,“My beloved is unto me as a cluster of henna-flowers In the vineyards of En-gedi.”라고 하였고 NIV 에는, “My lover is to me a cluster of henna blossoms from the vineyards of En Gedi.”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를 왜 하필 엔게디의 고벨화에 비유하였을까요? 고벨화는 어떤 꽃이며, 또한 엔게디에만 피는 꽃인가요?
히브리어로 “well 혹은 spring of kids, 염소 새끼의 샘” 이라는 뜻을 가진 엔게디는 사해 서안, 유다 광야 동쪽 끝의 성읍입니다. 아열대적 기후이며, 오아시스가 있어서 매우 비옥합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에스골, 엔게디의 아주 크고 달고 맛있는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밭에 피어나는 고벨화다 라고 고백합니다.
엔게디는 이처럼 아주 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비옥한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위로 된 천연 요새지 입니다. 그 바위 모습이 염소처럼 되어있다고 하여 “염소바위” 라고 부른 것인데, 사울왕으로 부터 쫓긴 다윗의 피신처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칠 때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계시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 부음은 곧바로 왕으로 이어지는 영광과 축복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Anointing 이 있음을 안 사울왕이 질투와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생명을 보전하고자 엔게디 황무지로 도망칩니다. 삼상 24:2절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엔게디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핍박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면, 사울왕이 그를 핍박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엔게디 황무지, 광야, 연단은 그가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과 성품을 위하여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 지낼 때 항상 괴롭고 절망상태에만 빠진 것은 아닙니다. 사울 왕이 쳐들어 올 때마다 피할 구멍을 주셨고, 먹을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마치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불기둥 구름기등으로 인도를 받았듯이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는 기름진 땅에 피어나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고난속에 어렵게 피어난 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영어로 Henna-cluster 라고 번역된 이 꽃은 그렇게 예쁘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독한 향기가 나는 꽃으로 알려졌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때, 그 메마르고 험한 엔게디 황무지에서도 피어난 고벨화 송이를 보면서 힘을 얻었던 것을 상기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황무지에 피어난 고벨화 같다고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빌어서 노래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고벨화는 영어 성경은 아라비아어의 El-Henna를 따라서 Henna로 번역하였고, 우리 성경은 히브리어 발음 코페르(Kopher)대로 고벨화 라고 변역하였습니다. 그런데, Kopher 는 창세기 6장14절에,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했는데, 여기 역청이라는 단어가 바로 Kopher 입니다. 그러므로 Kopher 는 보호막, 방패막 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대인들의 미드래쉬에는 고벨화의 모습이 마치 줄로 동여메진 꽃다발처럼 생겼다 하여 이것을 재물로 쓰여지기 위하여 줄로 묶인 이삭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엔게디 포도밭에 피어난 것을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인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앞으로 나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염소털 가죽을 두르고 얼굴에 가면을 쓰고 아버지 앞으로 나갔듯이, 엔게디 포도밭에 고벨화가 피지 말아야 하는데 몰래 들어가 피었다는 의미로 본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21장30절에,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했는데, 여기 “속으로 낼 것”이라는 단어가 바로 Kopher 입니다. 그러므로 Kopher는 또한 대속(Redeemption)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속량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대속하여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엔게디의 고벨화는 나의 죄를 다 덮어씌고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떄문에,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고난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받는 고난은 오직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받는 특권입니다.
또한, 고난 중에있던 다윗이 고난중에 피어난 고벨화를 보면서 힘을 얻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힘을 얻을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황무지에 피어난 고벨화를 보면서 소망을 갖게 되었다면, 골고다 메마른 언덕에서 고벨화보다 더욱 붉은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소망을 갖아야 할 것입니다.
힘드시고 고통스럽습니까? 지금 엔게디 황무지를 지나고 계십니까?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아침해는 더욱 밝게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주님이 계셨기에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 엔게디의 고벨화가 되신 예수님, 나의 소망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영원한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고난 주간입니다. 특히 고난중에 계시는 분들!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서 고벨화를 보면서 힘을 얻었듯이, 메마르고 황무한 인생의 엔게디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 힘을 얻으시기를, 능력을 받으시기를, 다시 일어서시기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