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7

주님의 권세와 능력(마가복음1:21-28)

Posted by on Mar 17 2011 at 09:36 pm

주님의 권세와 능력
(막 1:21-28)

 March 13, 2011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아버지가 하시던 목수일을 하시다가 약 30세쯤 되시어 광야로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으로 부터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바로 직후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에서 40 주야를 금식하신 후 고향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오셨습니다. 아마도 광대뼈는 휑하게 튀어 나왔을 것이고 옷차림은 노숙자와 같았겠지만 성령 두 눈에는 섬광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오시면서 베드로와 세베데의 아들들 등의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고 드디어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12-17절에,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나사렛 동네에 계시다가 요한이 감옥에 갇힌 직후 나사렛에서 그리 멀지않은 가버나움 성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주님의 본격적인 사역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가버나움에 가셔서 안식일이 될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안식일 날 회당에 가셨습니까? 가버나움은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성이 있고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갈리리 지방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꽤 큰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되면 율법대로 유대인들은 반듯이 회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유대지방에 살던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요즘 미국에는 여자 랍비도 있고 Messianic Jew 라 해서 유대인 크리스천들로 있지만, 지금도 유대 정교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예배를 꼭 참석합니다. 십일조는 회당에서 내는 것이 아니라 월급에서 자동적으로 빼내어 회당으로 자동 이체되도록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회당의 멤버가 되어 회당에서 결혼식도 하고, 장례식도 하고, 바 미스바 성년식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얼마나 더욱 철저하게 지켰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을 만나려면, 특히 그 지역 유지들을 만나려면 안식일 날 회당으로 오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 예배시간에 맞추어 회당으로 오신 것입니다. 가도 바울도 선교지에서 회당이 있으면 안식 일까지 기다렸다가 안식일 날 회당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 사도행전에 여러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아주 남루한 옷차림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등 제자 몇명과 함께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섰을 것입니다. 회당 안의 사람들은 이 낯선 시골 사람들을 보고 마치 “오늘은 장날도 아닌데 왠 시골사람들이 왔지?” 하는 눈초리로 쳐다 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 회당 안은 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모세 오경을 비롯한 율법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예화까지 겯드리면서 잘 해설해 놓은 미드래쉬 와 오늘날로 한다면 예화집과 같은 탈무드등 여러 책을 참조하며 잘 준비하여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사렛 시골에서 온 촌사람이 그들 틈에 끼여 “그것은 이런 의미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것이다” 라고 아주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이 아니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주께 가오니, Lord I come to you” 라는 찬양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수들의 노래들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레나 마리아가 부르는 것을 듣고서는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나올 것 같았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애끓는 그 목소리, 아픔과 설움과 고통이 점철되어 나오는 그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그 피끓는 목소리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같은 노래라도 누가 부르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옛날 시골교회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생각이 났습니다. 대학 1학년때 소풍가서 배운 노래와 율동을 약간 변역하여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가르쳤더니 애들이 참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여선생님들이 제가 하던 것을 곧장 따라 하더니, 금새 저보다 훨씬 잘 하였습니다. 유연한 몸매를 흔들면서 손을 흔들고 싱글싱글 웃어가면서 노래를 하는데 제가 보아도 참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제가 할 때처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요즘 말로 원조가 아니라 짝퉁이라서 그럴까?

거기에는 노래를 잘 하고 못하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소리나 율동에 반한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무엇인가 끌리는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틀어서 하나님께서 선물, 능력을 의미하는 “카리스마”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방문으로 안하여 그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소란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하여 특별 교육을 받아온 랍비나 서기관들이 방대한 자료와 풍부한 해설로 백성들을 지식적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의 목수아들 예수라는 사람은 달랐습니다. 성경을 풀어 해설하는데, 내용이야 뭐 그리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인가가 달랐습니다. 랍비나 서기관들이 가르칠 때에는 새로운 지식이요 좋은 교훈으로 받아드렸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한 마디 하시면 그 말씀에 압도되어 그 분께 복종해야 되고 그 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이 없었던 “권세”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권세를 헬라어로 잇수스(Ισχύς) 라고 합니다.

창세기 49:1-2절에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임종 직전인지라 야곱은 침상에 제대로 앉아 있을수도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 12 아들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힘에 굴복하여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로서의 권세(Ισχύς)에 복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2:9-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하신 것처럼 만물이 모두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게하는 권세(Ισχύς)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권세로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는 귀신들린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순간 그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런데 이 소리는 귀신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귀신들린 그 사람을 통하여 나오는 소리입니다. 귀신도 영적인 존재인지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먼저 알아 보고 그사람을 통하여 말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5:1절 이하에 보면 거라사인 지역 공동묘지에 살던 군대 귀신 들린 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가까이 이르자 한 청년이 나오더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7절에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했듯이 귀신이 먼저 알아채고 두려워 주님께 애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24절에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며 두려워 벌벌 떱니다. 그 때 주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왔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귀신등 모든 생명체는 물론 영적인 존재와 자연을 포함 우주 만물을 복종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헬라어로 두나미스(δύναμις) 라고 합니다. 영어의 Dinamite 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물 위를 걸으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으며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수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거센 풍랑이 몰아칠 때 주님은 그 거센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라’ 고 명령하니 곧 풍랑이 멈췄습니다. 베드로에게 가서 고기를 잡아 처음 올라오는 고기의 입을 열어라. 그러면 동전이 나올텐데 그것을 가지고 너와 나의 세금을 지불하라 고 하시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능력(δύναμις) 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모든 만물을 발 앞에 복종시키는 Ισχύς(권세) 와 능력(δύναμις) 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교회든 주님의 임재하심에는 이러한 주님의 권세와 능력이 임제하심을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세에 온 성도는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모든 말씀에 목회자와 장로와 집사등 온 교인들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자아를 죽이고 예수님이 자신 안에 살게 하시기 위하여 온 교인들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하였듯이 자신을 쳐서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복종시켜 구원을 이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4: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였듯이 천국의 모형인 이 땅의 주님의 몸된 교회에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아픈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절망에 빠진 자가 예수님의 말씀 붙잡고 일어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문둥병이나 유출병 걸린 자처럼 이 땅에서 소외되고 절망에 빠져 죽어가는 자가 예배때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함을 찾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귀신들린 자들이 귀신들로부터 해방되고 암환자들도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저를 포함한 우리 예배자들의 믿음이 그리고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되신 각 교회에 그리고 그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6:7절에 “12제자를 부르사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가장 먼저 주신 것은 바로 주님의 권세와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뿐만이 아니라 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권세와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와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탓이요 또한 이 일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꼭 이루어지리라 는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자들을 고칠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권세와 능력을 주저하지 마시고 항상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보여주신 주님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들을 통하여서도 나타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의 가버나움 회당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애원하면서 물러가는 장면을 가버나움 회당에 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회당 예배에 참여했던 사람들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먼저 알고 두려워하였으며, 그 귀신들을 향해서 책망하시고 나오라고 명령하셨을때 그 귀신들이 벌벌 떨며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광경을 보면서 회당에 나왔던 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귀신들린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들은 우선 귀신들린 그 사람 때문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회당 사람 모두에게 잘 알려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열심히 잘 섬기고 회당에서 봉사도 잘 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도시의 유지요 지도자 격인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혹은 회당장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 사람에게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신이 다른 곳이 아닌 거룩한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시간에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놀라 발작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설마 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백성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귀신이 들리지 않을 줄로 믿었는데 회당 멤버가 귀신들렸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버나움 회당, 아니 그 당시 유대인들의 그 거룩한 회당이라는 곳이 무엇입니까?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는커녕 회당 멤버들 중에 귀신이 들린 자도 있다는 그 자체도 모르는 곳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교회는 아무리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 할지라도 아무런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 가버나움 성, 그 때까지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예배를 드려오다가 그날 처음으로 예수님의 Visitation 을 받고 이러한 놀라운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듯이 오늘 우리 교회도 주님의 Visitation 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성들이 매 예배 때마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배에 오셨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자들이 발작을 일으키고 귀신들이 물러가는 것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병든자가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의사가 포기한 환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칠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떻게 해야랍니까? 마가복음 9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사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셔서 그 아이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멋적은 제자들은 왜 자기들은 그 병을 고칠수 없었느냐 고 묻자 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귀신도 약한 것은 곧 물러 가지만 강한 것은 그 만큼 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지금보다 기도를 더욱 세게 더욱 오랫동안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양보다 질이라는 말도 있지만 기도를 오래 하는 것도, 주님과 오랫동안 교제하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는 왜 가셨을 까요? 물론 전도하러 가셨습니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의 임재없이 드리는 예배와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관망만 하시지 않습니다. 가버나움 성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회당 사람들을 직접 가르치셨둣이 주님도 교회에 오셔서 사역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권세와 능력이 교회 안에 나타나게됩니다.

그러므로 매 예배에 우리는 주님을 초청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사역하시도록 그 분께 맡겨야 합니다. 틀과 형식과 시간에 얽매인 인위적인 예배,  진정한 회개와 감사가 없는 예배에는 주님께서 사역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분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예배가 아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지시에 따르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분께 모든 것을 온전히 내 맡겨드리는 그리하여 그분꼐서 마음껏 사역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더욱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도들이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자 10일후에는 성령님께서 불같이 내리시는 것을 온 기도자들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나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와서는 더욱 깊이 기도하자 병고침이 일어 났습니다.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병고치는 은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기도하였더니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임을 당하는 그리하여 교회의 정화가 일어나고 마침내는 교회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매 예배때마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우리 교회, 주님께서 직접 사역하시는 우리 교회, 또한 이러한 역사가 항상 일어나도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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