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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hovah-Shammah (The Lord is there forever: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23:6절)
March 6/2011
시편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지금까지 보아 왔듯이 날씨가 풀리고 푸른 풀이 돋기 시작하는 봄에 양떼를 이끌고 계곡을 타고 산에 올랐던 목자는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다시 계곡을 타고 내려 옵니다. 산은 겨울이 빨리 오기 때문에 목자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하산을 준비하게 됩니다. 여름 내 좋은 꼴을 먹고 피둥피둥 살이 쪄 뒤뚱뒤뚱 걷는 양떼를 이끌고 목자는 계곡을 따라 천천히 하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등산 할때 보면 산을 오를 때보다 주로 하산할 때 사고가 나듯이 양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올라 갈 때에는 미끄러질 염려가 있지만 내려 올 때에는 굴러 떨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끄러지면 다시 올라가면 되지만 굴러 떨어지면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양들이 살이 쪄서 몸무게가 부쩍 늘었기 때문에 자칫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고 넘어지면 못일어 날 양들도 많습니다. 또한 그간 새끼를 낳은 놈들도 있기 때문에 식구가 부쩍 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린 새끼들 때문에 양떼를 빨리 몰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 어린 새끼들은 야수들이 특별히 노리는 사냥 목표물이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라 갈 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양떼를 끌고 천천히 산에서 내려옵니다. 하산한 후에는 안전한 우리로 한 마리씩 몰아 넣습니다. 이 때 목자는 우리로 들어가는 문에서 병든 양은 없는가, 다리를 절뚝거리는 놈은 없는가, 타인 소유의 양은 없는가, 산양이나 기타 다른 짐승들이 따라 들러오지는 않나, 양이 총 몇 마리나 되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양을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잘 관찰하며 들여 보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7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고 하셨듯이 어느 양이든지 그 문을 통과 하여야지 천국과 같은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하여 양의 우리로 들어가면, 밖에는 살을 에이는듯한 찬 바람이 윙윙 불고 눈보라 휘날릴 지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은 따뜻하고 또한 목자가 여름내 준비한 마른 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자 없이 떠도는 야생의 양, 소위 말하는 산 양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여름에는 그들도 푸른 초장에서 마음껏 식물을 먹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다니며 좋아하는 풀들을 골라 먹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때는 목자에 얽메여 다니는 양들이 어리석고도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사나운 곰이 굶주린 사자가 나타날지 마음 편안한 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늘을 맴도는 독수리가 언제 날아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절벽 아래로 끌어 내릴지 모릅니다. 또한 밤에는 늑대와 여우 우는 소리로 두려움 속에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추운 겨울이 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몰아지치고 하얀 눈이 온 산을 뒤덮고 꽁꽁 얼어붙어 먹을 것이 없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양은 긴긴 겨울내내 덜덜 떨며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절벽 바위틈에 나온 나무뿌리를 먹으려다 그만 수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양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못 먹어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양도 있습니다. 또한 봄이 오기도 전에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마는 양도 부지기수 입니다.
하지만 목자를 따라다닌 양들은 어떻습니까? 그간 목자를 따라 다니면서 높은 산 준령을 넘느라 힘들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사방이 사나운 짐승떼에 둘러 쌓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목자의 눈을 피하여 곁길로 편안한 길로 가다가 목자의 채찍에 맞아 슬피 우는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와 함께 있었기에 태풍의 눈 속을 지나듯 환란을 통과하면서도 다치지도 굶주리지도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사나운 짐승을 만나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면 목자는 잽싸게 달려와 막대기로 짐승을 쫓거나 때려 잡았습니다. 짐승에게 물리고 파리떼나 벌레에 물려 시달릴 때 목자는 찢긴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넘어져 바둥거릴 때면 목자는 급히 달려와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목자 때문에 따뜻한 우리에서 평안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목자는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계속해서 돌봅니다. 어느 양이 아픈가, 밥을 잘 안 먹는가, 새끼를 낳는 양은 없는가 등을 늘 살피며 상처받은 양은 상처를 싸매고 기름을 발라 줍니다.
저는 목자없이 떠돌다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산양과 목자를 따라 사는 이 두 부류의 양을 비교하면서 Robert Frost 의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 을 생각하였습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도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비숫했지만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먼저 길은 다른 날로 미루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라고
주인 없는 양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겨울의 한 복판에 따뜻한 우리 안에서 긴 휴식을 취하는 양처럼 인생의 겨울 녘에 선 다윗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자기 인생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그 분께서 인도하신 길을 택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힘들고 고생스러울 때는 물론 평화롭고 기쁠 때에도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셨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부스 성을 쳐서 정복하고 그 성 이름을 “다윗성” 이라 명명할 때도, 암몬 족속을 쳐서 대승을 거둘 때에도 블레셋을 쳐서 정복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불레셋 왕 아기스 수하에서 수치스럽고 비참한 삶을 살 때에도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도,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계셨음을 알았습니다. 자기 인생 어느 한 순간 한 구석도 주님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음을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의 그 아름답고 고맙고 복된 흔적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주님의 이러한 복된 흔적이 선명히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어느 목사님 부부가 한국에 있는 친구 목사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목사님 역시도 가난하였지만 미국에서 오랜 만에 온 친구인지라 여기 저기 구경도 시켜 드리고 정성껏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융슝한 대접을 받고 미국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이 없는 것입니다. 가방을 여러번 찾아 보아도 없어서 마침내는 한국에 E-Mail 을 보냈습니다:
친구여! 바쁘고 또한 형편이 넉넉하지도 못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해 주어서 정말 감사하오. 덕분에 우리 부부는 평안히 그리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손님도 생선처럼 3일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고 하였는데 혹시 누가 되지 않았는가 염려가 되오. 정말 고맙소. 그런데 혹시 내 수첩을 보지 못했오? 차 속에 놓고 왔는지 아니면 집 어디에 놓고 왔는지. 그 안에 중요한 전화번호들이 들어 있어서 그런데 혹시 찾으면 보내 주소. 거듭 감사 드리오.
그랬더니 이틀 후 “그런 염려 마시게. 자네 부부 덕택에 우리 부부도 여행 잘 했네. 그리고 그 수첩을 찾느라 우리 집 지붕 아래는 샅샅이 다 뒤져보았지만 자네가 남기고 간 것은 단지 축복뿐 다른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네” 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자네가 남기고 간 것은 단지 축복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네!”
새가 앉았던 곳에는 꽃과 같은 발자국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좋은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고마운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슬프게 하는 흔적, 괴롭게 하는 흔적, 분노가 이르게 하는 흔적, 아프게 하는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부부간에도 가족들끼리도 서로 많은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부부싸움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고 비 정상적인 관계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부부가 평생을 살면서 항상 좋은 흔적만을 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는 서로 좋은 흔적만을 기억하고 삽니다. 아니 좋은 흔적만을 말하고 삽니다. 그런데 서로 나쁜 흔적만을 말하고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 좋은 흔적을 남기려고도 노력하여야겠지만 좋은 흔적만을 기억하는 습성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삶에 좋은 흔적, 아름다운 흔적, 그리고 축복의 흔적 밖에는 남기지 않으십니다. 그 분께서 지나가신 흔적에는 항상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 분께서 남기신 흔적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 분의 은혜와 그 분을 향한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시 싫은 흔적, 불평의 흔적, 부끄러운 흔적,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흔적은 남기지 않았나 염려가 됩니다. 고의 적인 것은 아닐 지라도 본의 아니게 혹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고 분노를 일으키게 하였을 수도 있고 대단한 실망을 안겨 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저도 철이 들어가는지 그러한 일들 까지도 염려가 됩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인생에 각인된 주님의 자신에게 한없이 부어주신 축복의 흔적을 되새기며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겨울을 넘기고 오는 봄을 또 맞이할수 있을지 아니면 그 전에 주님께서 부르실지 아무런 기약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좋고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옆에 서서 자신을 지켜주신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하나님이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이제 삶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선한 길로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을 체험한 그는 앞으로 얼마를 더 살든지 주님나라 갈 때까지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따를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도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환난이 닥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었기에 아무런 염려나 근심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처럼 소쩍새 우는 화려한 봄의 꿈을 꿀 때도 있지만 구름 낀 날도 있고, 천둥 번개속에 가슴 조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얀 서릿발 속에서도 청초롭게 피어나는 들국화처럼 이러한 산전 수전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만 있다면 두려워하거나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환난 가운데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 주님의 은혜와 축복의 흔적을 보면서 우리는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만찬을 들수 있을 것입니다.
춘천에서 닭을 직접 키워 보았다는 손학규 대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선거에서 패배한 후 춘천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서 병아리를 사다 키웠답니다. 날씨가 추워서 난로를 놓고 전깃불까지 켜놓고 정성껏 돌보아도 어미없이 크는 기계 병아리는 죽는 놈이 많이 생기더랍니다. 하지만 암탉이 안고 있는 병아리는 밖의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얼어 죽기는커녕 병도 안 걸리고 잘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산골의 맹 추위에도 암탉의 품속에 있으면 절대 죽지 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탉이 안고 있는 병아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는 것을 깨우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리 모진 바람이 불고 혹독한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날개로 안아 주시면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아래, 아니 그 분의 품에 파고 들어가기만 하면 어떤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병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일찍부터 이러한 하나님의 품을 깨우쳤습니다. 사울왕의 그러한 집요하고 모진 공격을 이겨낼수 있었던 것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치부를 드러내는 수치를 당하게 하고 자신을 향하여 칼을 빼들고 진격해 와도 그는 오히려 그 아들을 염려했던 것은 그가 선하심과 인자하신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야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저 영원한 천국에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His Eternal Presence 그 분의 영원한 임재하심 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이 힘들고 고달파서 속히 주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거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어디를 가든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며 내가 그러한 삶을 살고싶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7:20-21절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듯이 내 마음속에 주님께서 임재하신다면 내 마음은 이미 천국으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물론 지역적인 개념도 있지만 주님 계시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어느 곳이든, 그 곳이 예배당이든 골방이든 차 속이든 전쟁터이든 심지어는 가옥이든 주님께서 임재 하시는 그곳, 주님이 초청된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내가 주님의 날개 안에, 주님의 품 안에 있기만 한다면 나는 환경을 초월하여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정에 여러분들의 일터에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찬송가 495장의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고 하였듯이 주님이 초청되어 임재하시 곳 마다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고 하였듯이 주님과 동행하는 바로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제 결단하십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고백한 다윗처럼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의 소원을 고백하고 결단 하십시다:
오 주님! 내가 주님의 날개 안에 영원토록 거하고 싶습니다. 세상이 날 몰라주고 세상이 나를 핍박하고 세상이 나를 아프고 슬프게 할지라도, 내가 때로는 현실 앞에 슬픈 눈물을 흘렸을 지라도 내가 주님 품 안에 있다면 내가 있는 이 곳이 바로 천국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좌정하시어 내 일평생 뿐만이 아니라 내 호흡이 끝날지라도 주님은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영원토록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삶을 천국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시편,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