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04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
아가 1:10-11절
[10-11절]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9절부터는 신랑되신 주님께서 신부된 성도들을 칭찬하는, 아니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모습입니다. 우선 Fairest 가장 예쁜 자, 어여쁜 자야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비록 추하고 부끄러울지라도 현재의 모습이 비록 완전하지 못하고 아직도 죄의 굴레에서 힘들어 하고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Fairest 가장 예쁜자야 라고 부르십니다. 그 이유는 우선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이 제일 예쁘다고 믿는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도 세상의 그 어느 피조물보다도 우리 인간을 가장 예쁜 존재로 여기 십니다. 그리고 특히 당신을 구세주로 믿는 당신의 영적 자녀들은 더욱 예쁘게, 가장 예쁜 존재들로 여기십니다.
또한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은 추하고 부끄러울지라도 마침내는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 될 것임을 주님께서 먼저 믿으시고 우리를 가장 어여쁜자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금방 난 갓난아이가 왜 귀엽고 사랑스럽습니까? 그 아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 아닙니까?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아이가 장성하여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가기 때문에 더욱 예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현재모습이 아니라 앞으로의 모습을 미리 보시면서 “가장 예쁜자여” 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Fairest, 가장 예쁜자”로 불러 주시는 귀한 존재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세상의 평가나 여러분 자신의 평가대로 사시지 마시고, 주님께서 인정하신 주님의 평가, 주님의 가장 아름다운자, 가장 사랑받는자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10-11절에서는,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면서 신부의 장식품까지도 감탄하며 칭찬합니다.
10절 역시도 “얼마나 아름다운고!” 라는 히브리어 감탄사 “Mah” 로 시작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반하여 “오! 아름다운 존재여!” 라고 감탄하듯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주님을 찾고 찾으며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우리가 주님의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주님은 감탄하여 “오! 얼마나 아름다운고” 라며 감탄하십니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지상정인데 주님께서 이렇게 감탄하면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뿌리치며 내가 어떻게 주님을 위하는 일에 목숨을 아까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어떤 면이 그렇게 아름다워 주님께서 반하셨습니까? 우선 “네 두 뺨” 했는데 얼굴은 우리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뺨은 In and Out, 우리 내면의 생각과 겉을 동시에 나타내는 곳입니다. 가슴 설레게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것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아주 싫은 사람을 만나면 얼굴 인상부터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손은 얼굴처럼 옷 밖으로 나와있지만 빨개지거나 파래지지도 않습니다. 화가나거나 심령이 상했으면 얼굴이 붉어지거나 창백해 집니다. 하지만 몸의 다른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두 뺨은 우리 몸 기관중 유일하게 우리의 겉 모양은 물론 속 모양까지도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우리의 속 마음과 겉의 모습을 고스란히 나타나내는 그 두 뺨에 내리운 머리털과 목의 구슬꿰미라 했는데 라틴 불가타 역에는 내리운 머리털을 “Turtle Duck” 이라 번역을 하였습니다. 두 단어로 된 이 합성어를 히브리어 “Katorim” 으로 보느냐 “Batorim” 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런 차이가 난 것입니다.
“Torim” 은 장식품등으로 우선 히브리어 “Batorim” 는 땋아내린 머리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머릿털은 우리들의 성품이나 자질등을 의미하며, 땋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름답게 꾸며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신부로서 우리의 삶에 주님의 의가 나타가 우리의 성품이 착하고 행실이 아름답게 변하여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불가타 역에서는 이 단어를 Katorim 으로 보고 “Turtle dove” 로 번역한 것입니다. Turtle dove 는 높은 절벽의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 종류인데, 우선 세상과 고립되어 삽니다. 그리고 높은 절벽의 바위틈에 살기 때문에 추위를 이겨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새들과 달라 독수리처럼 몸에서 열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Turtle dove 로 비유한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뜨거운 성령에 취하여 살며 또한 숭고한 신앙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두 뺨이 Turtle dove 와 같다는 것은 우리의 속과 같 모두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항상 성령충만하며 숭고한 신앙의 절개를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하였는데 구슬꿰미는 성도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각종의 은사와 및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였듯이, 이 은사와 은혜및 사랑의 구슬꿰미도 잘 꿰어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많이만 달았다고 보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인 만큼 자주 사용하여야 하지만 남용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위하지 않고 오직 주신 분의 영광을 위하여 절제있게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목에 은을 박아서 금사슬 목거리를 만들려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온전히 내 맡기고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과 친밀한 관계요, 주님께 온전히 나의 생명까지도 맡길수 있는 믿는 관계가 될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금사슬을 우리의 목에 달아주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주님께서 주신 은사나 축복이나 기타 무엇이든 주님께 다 내 맡기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마음대로 단장시키시고 또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 신부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행실을 본받아 참된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주신 각종의 은사로 주님을 열심히 섬길때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나의 사랑이여, 나의 가장 아름다운 자여 이렇게 불리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시면서 주님께서 나를 마음껏 단장하시고 사용하시도록 온전히 내 맡기는 결단을 하실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 부터 “나의 사랑이여” 라는 음성을 들을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요 설교,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