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1

안위하시는 하나님(Yahweh Nâcham)

Posted by on Feb 21 2011 at 02:21 pm

안위하시는 하나님:Yahweh Nâcham
(시편23:4절)

 February 20/2011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금은 대부분 울타리 안에서 방목을 하면서 차를 타고 다니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양떼를 돌봅니다. 그러므로 목자들도 먹을 음식과 마실 물 그리고 웬만한 장비는 모두 차에 싣고 다닙니다. 그리고 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나운 짐승이나 도둑이 나타나면 탕탕 총을 쏘기 때문에 그 옛날 다윗 시절의 목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옛날 목자들이 양을 치러 나갈때에는 여기 저기를 뛰어다니며 양떼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최대한으로 간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목자들은 막대기와 지팡이 그리고 륙색이라고 하지요, 뒤에 메는 가방에 볶은 곡식이나 Beef Jerky 와 같은 마른음식과 물병을 넣어 등에 메고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막대기는 목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무기로서 위급할 시에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늘 허리부근에 차고 다녔습니다.  또한 양을 치는 막대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양을 칠만큼 자란 성년이라는 의미도 되었습니다. 그 옛날에 목자들도 대부분 대를 물리게 되는데, 아들이 자라 양을 칠수있는 나이정도 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양치기 막대기를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들은 신이나서 아름답고 단단한 나무를 잘라다가 칼로 정성껏 다듬어 자기 손에 잘 맞는 막대기를 만들었습니다.

일단 막대기를 만들면 이제는 그 막대기를 가지고 짐승을 쫓고 때려눕히는 연습을 합니다. 이 막대기는 위급할 때 적을 물리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내려 치거나 던지면 백발 백중할수 있도록 날마다 틈만 있으면 그 막대기를 던지고 내려치는 연습을 합니다. 그리하여 충분히 숙달되면 드디어 양을 치러 가게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계곡을 통과하다가 독초가 발견되면 휘파람을 훅 불며 독초 있는 곳에 막대기를 툭 던져서 양의 접근을 막습니다. 갑자기 코브라나 보아같은 위험한 뱀이 나타나면 목자는 막대기로 내려치거나 세게 던져 한방에 끝내버립니다. 혹은 사자나 곰이 나타나도 막대기로 내려치거나 정수리를 명중시켜 때려 잡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양떼를 보호하는데, 그렇게 숙련이 될 때까지 목자는 엄청난 연습을 합니다.

목자는 막대기 외에 또 하나의 긴 막대기, 즉 지팡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막대기는 허리에 차고 다니는대신 지팡이는 길기 때문에 모세가 양을 칠때 지팡이를 짚고다녔듯이 짚고다녔습니다. 특히 지팡이는 대개 한쪽 끝이 구부러져 있는데 그것으로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해내기도 하고 어미잃은 양새끼를 살살 몰아 어미를 찾아 주기도 합니다. 양떼가 크면 같은 날에 새끼를 낳는 양들이 많아 어미를 잃어버리는 새끼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린 양들은 어미 양이 풀을 뜯는 동안 풀섶에 앉아 졸다가 어미를 잃어버립니다. 어미 양은 대개 새끼에게서 나는 자기 오줌 냄새를 맡아 자기 새끼를 구분하는데, 하루만 아미를 잃어버려도 다른 양 오줌냄새와 섞여 자기 새끼를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풀섶에 잠자느라고 자기 어미를 잃은 양이 있는가 살피면서, 긴 지팡이로 양 새끼를 이리저리 몰아서 어미를 찾아 줍니다. 그리고 양떼를 몰고 갈때 긴 지팡이로 이쪽 저쪽 몰면서 갑니다.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때 발이 미끄러져 계곡에 빠지거나 웅덩이에 빠진 양들을 지팡이로 건져 냅니다. 이처럼 긴 지팡이는 적을 물리치는데 보다는 양을 보호하고 구하는데 사용합니다.

또한 목자는 긴 지팡이를 의지하여 가파른 산이나 계곡을 올라가고 한 낮의 뜨거운 볕에 피곤하고 나른하면 긴 지팡이를 의지하고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막대기는 목자의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무기인 반면에 자신의 힘을 지탱해줄 수 있는 버팀목입니다.  그리고 막대기는 다른 짐승을 모는 사람들, 약초를 캐는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는 뱀을 잡는 사람들도 가지고 다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긴 지팡이는 오직 양떼를 치는 목자들만 가지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지팡이는 목자의 목자로서의 신분이며 권위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 하면 사무엘 하7:14-15절의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지팡이는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권세요 전지 전능하신 신분을 상징하며, 막대기는 내가 실족하였을 때 징계하고 내가 위태할 때 나를 보호하는 무기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낰함’,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 말로 “안위” 라고 그리고 영어로 Comfort 로 번역된 히브리 낰함(nâcham) 은 단순히 위로한다 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동정하다, 회개하다, 불쌍히 여긴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7:35절에,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슬퍼하는 야곱에게 나머지 자녀들이 위로하였지만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단어가 사사기 21:16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 즉 뉘우쳤다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물론 동정하였다 불쌍히 여겼다 라는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뉘우쳤다 혹은 회개하였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처럼 이 단어의 이중성을 연구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초창기 이민 오셨던 분들이 지금은 거의 씨가 말라버린 말 조개를 엄청나게 많이 잡았다고 합니다. 한 사람당 2마리밖에 허용되지 않는데, 네댓 시간씩 운전하고 가서 겨우 몇 마리 잡아서는 양이 차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보이는 대로 다 잡아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었습니다. 그 날도 새벽에 출발하여 점심 먹을 새도 없이 열심히 잡아서 트렁크에 싣고 급히 운전하고 오는데,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차가 서더랍니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고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백인부부가 지나가다가 차를 멈추고 친절하게 그 차를 고쳐주더랍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오는데, 얼마 가지 않아 경찰이 뒤 따라오더니 잡더랍니다. 그 백인부부가 차를 고쳐주면서 연장을 찾다가 트렁크를 열었는데, 그 속에서 여러 마리의 말 조개를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차가 고장 나서 고속도로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고쳐는 주었지만, 법을 어긴 죄는 치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낰함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의도한 바는 무엇이었을 까요?  우선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He comforts me 합니다.
사울왕에게 쫓길때 다윗은 불안하고 두려워 견딜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그를 불쌍하 여기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황무지에서 사울 왕으로부터 쫓기는 다윗에게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을 보내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시글락에서 병사들이 자기를 돌로치려 할때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 아말렉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소년 하나를 포로로 잡게 하셔서 그를 통하여 모든 정보를 알고 아말렉을 급습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과 제물들을 모두 되찾았습니다.

맏아들 암논이 셋째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였을때, 이에 압살롬이 암논을 쳐 주겨 앙갚음 할때, 압살롬이 병사들을 데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쳐들어 올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아버지로서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사건 한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수 있었겠습니까? 문제가 심각하고 위급한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수 없을 때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느껴집니까?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집니까?

제가 신학교 다닐때 아들 하나를 잃었습니다. 날때부터 건강하지 못했는데 결국 그렇게 짧은 인연을 맺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아파서 사경을 헤메고 있을때,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앉아서 기도만 했을뿐 다른 아무것도 할수 없었고 오직 의사들의 시술에만 의존해야하는 그 때의 비참함, 자괴감마져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라고 설교를 할 수 있는가?” 대답 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호흡을 쉬었을 때 나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본격적인 고통은 그 때부터였습니다. 당시 선교신학 PhD 를 막 시작하였는데 “사람이, 아니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이렇게 무기력한데 신학은 해서 무엇 하나,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가? 내 아들 하나도 보살피지 못하면서 무슨 목회나 선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목사니까 교인들 앞에서는 이를 꽉 물고 태연한 척 해야 하나?”

당시 상담학 교수였던 Dr. Conver 를 찾아가 나의 고민을 털어 놓았더니 그 분이 “Tracks of a Fellow Struggler” 라는 조그만 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John Clypool 목사님의 그 조그만 책으로 내가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12살 먹은 자기 딸이 Leukemia에 걸려 점차 약해져 가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워 강단에 설수 없었던 그의 심정이 내 가슴에 그대로 박히면서 그때까지 뻥 뚤렸던 내 가슴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오리건주에 있는  Beaverton Foursquare Church 담임목사였던 Ron Mehl 목사님은 1980 년도에 림프암의 일종인 Lymphocytic Leukemia 에 걸려 고통을 겪었습니다. 의사는 길면 5-6개월 살거라고 하였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그후 22년 동안 사역을 하시면서 그 사이 교회는 6000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분이 투병생활로 엄청난 고통을 겪던 1999년에 시편 37편을 주제로 한 “The Cure for a Troubled Heart” 우리 말로 한다면 “괴롭고 불안한 심령의 치유” 라고 할까 하는 책을 섰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몇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 중 아들 하나가 큰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상심한 그는 절망감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애써 숨겼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도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괴로워하는 아들에게 “왜 그러냐?”라고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물으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아들의 고민은 자신이 나서서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그냥 내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어떻게 위로할까 고민하던 그는 밤이면 아들이 자는 방으로 가서 그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그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천장을 바라보면서 아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누웠다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또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서 옆에 누웠습니다. 그 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왔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아들 방에 들어가 옆에 누워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밤마다 아버지가 들어 와서 자기 옆에 눕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어도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시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위로하러 오신 아버지의 그 사랑에 힘입어 그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절망의 늪에서 일어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 곁에 말없이 계십니다. 나의 잘못,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고통 중에 눈물을 흘릴 때 그 분은 말없이 내 곁에 누우셔서 같이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그 분도 같이 아파 하십니다. 이러한 위로의 하나님, 친밀한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또한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통하여 자기 죄를 깨닫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진정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밧세바와 의 불륜으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괴로왔습니까?
밤마다 눈물로 지샜고, 베게가 눈물로 흠뻑 젖었다고 하였습니다. 압살롬이 쳐들어 왔어도 자기의 죄로 인한 대가로 여기고 꾹 참았습니다. 군사를 계수하다 백성들에게 염병이 퍼지자 자기의 죄에 대한 결과로 믿고 회개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지난 2008년도에 당하였던 환난을 통하여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평소에는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하찮은 일도 그 상황이 되니까 회개가 되었습니다. 나로 인하여 알게 모르게 상처받고 아파하였을 것 같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대로  나를 용서하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사람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그 분”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간증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닙니다. 그 분의 낰함, 막대기와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나를 위로하시고 회개를 시키시는 친밀하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꽤 유명하신 목사님이신데,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하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설교할 수가 없더랍니다. 고민 끝에 YWAM 의 DDS를 다니면서 발견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어느날 이버지와 같이 어디를 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 춥고 손이 시려워 하니까 아버지가 자기 손을 아버지 포켓에 넣어 주셨는데, 그 때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도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렇게 믿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우치는 열쇠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 말은 없으셨지만 자신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신 그것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듯이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깨우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 분의 위로하심과 회개시키심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도 막대기와 지팡이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게 하실수 있습니다. 혹은 John Claypool목사님처럼 죽어가는 딸을 보며 깨우치게 하실수 있으십니다. 혹은 Ron Dhel 목사님처럼 사랑하는 아들의 고민을 도와 주면서 깨우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그저 상징적인 매체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의 처지에 따라 하나님꼐서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양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로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있다는 증거가 되듯이 하나님께서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곁에 계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하시면서 이러한 하나님을 “보혜사” 헬라어로는 파라글레토스 라 하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원래 법정 용어로서 옆에서 나를 돕고 위로하고 나를 위하여 변론해주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치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넘어지면 얼른 일으켜 세워주려고 그 옆에 바짝 따라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변호자, 중재자, 조력자, 위안자로 다가오셔서 늘 곁에 계시는 보혜사 하나님, 선한 목자되신 우리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현재 여러븐들이 서 있는 곳이 어느 곳이든지, 그 곳이 푸른 초장이든지 벼랑 끝이든지 혹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일지라도 여러분들이 현재 서 있는 곳에서 낰함 하나님, 파라클레토스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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