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7

임마누 엘(시편 23:4절)

Posted by on Feb 17 2011 at 10:24 am

시편 23:4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Jesus with me)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Yes,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지금은 대부분 산을 개간하여 방목장을 만들고 거기에 양을 가두어 두고서 칩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목자가 양을 끌고 이 산 저 산을 다니면서 꼴을 먹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목자입니다. 그는 양을 끌고 메소포다미아 지역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가나안 지방으로, 또 다시 이집트까지 내려갔었던 것을 성경에서 볼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도 여러달씩 집을 떠나 양들을 쳤습니다. 이처럼 목자들은 봄에 땅이 풀리면 그 때부터 겨울에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양들을 이끌고 여기 저기 다닙니다.

그런데 무더운 여름에는 물론 파리떼나 벌레들도 많고 여기에 따르는 각종 병도 많습니다. 더구나 염소는 흩어져서 따로따로 자는데 양은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자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둔한 양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뭉쳐 잡니다. 그러므로 피부에 종기도 나고 심하면 썩기도 합니다. 떠한 한곳에 오래 머물 만큼 좋은 목초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봄부터 양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 갑니다. 서두를 것이 없이 천천히 양떼들을 몰로 정상을 향하여 올라 갑니다. 그리고 한 여름에는 서늘한 정상 부근에서 양을 치다가 가을이 시작되면 천천히 양떼를 몰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되면 우리에 모아놓고 건초를 주며 겨울을 나게 합니다.

그런데 산으로 정상을 향하여 올라갈 때 계곡을 따라 올라갑니다. 그 이유는 첫째, 계곡을 따라 올라가기가 가장 쉽기 때문입니다. 계곡은 대개 정상근처의 샘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계곡만 따라 올라가면 저절로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또한 하산 할 때도 계곡만 타고 내려오면 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습니다.

둘째는 물 때문입니다. 양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들에게 있어서 산을 오르고 내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그런데 저수지나 우물이 없는 이상 산에는 계곡외에는 물이 없습니다. 또한 우물물을 마시게 하려면 그 많은 우물을 다 필수고 없고, 또한 많은 양들이 그 물을 마시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물론 양은 흐르는 강물은 두려워서 마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계곡에 고인 물 웅덩이를 찾거나 돌멩이로 흐르는 물을 막아 거기서 물을 먹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계곡에 가장 좋은 풀들이 있습니다. 계곡에 습기가 많기 때문에 좋은 풀이 가장 많이 자랍니다. 그리고 양들이 좋아하는 연한 나무잎들 풀 뿌리등을 먹을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곡으로 가면 최소한 물걱정 풀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곡이 이렇게 좋은 점이 많는 대신에 가장 위험스러운 지역이기도 합니다. 곰, 사자, 늑대등 사나운 짐승들도 계곡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 짐승들도 물을 먹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먹잇감을 구하는 것입니다. 계곡의 음침한 곳에 숨어 잠복하고 있다가 사슴이나 노루등 약한 짐승들이 물을 먹으러 오거나 풀을 뜯어 먹으러 오면 덜컥 잡아 먹습니다.

또한 계곡은 절벽이 있습니다.  자칫 절벽에 떨어질 수도 있고 위험한 계곡을 건너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U-Tube 에서 본 것인데, 양이 절벽에 서 있으니까 하늘 높이 날던 독수리가 그 양을 향하여 천천히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가까이 오자 잽사게 양에게 날아가서 발톱으로 양을 절벽 아래로 끌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절벽 아래로 미끄러진 양은 계속해서 데굴데굴 굴러 내립니다. 그러면 독수리는 그 양이 굴러떨어지는대로 쫓아 내려갑니다. 그리고 저 아래에 떨어졌을 때에는 이미 양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독수리는 그 자리에 앉아서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산에 오를때 독수리나 솔개같은 날짐승이 혹시 내 머리위를 맴도는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계곡에는 좋은 풀과 연한 나뭇잎등 양들이 좋아하는 먹잇감들이 많지만 독성이 있는 풀도 같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독초가 있는가 늘 살펴야 하며 발견되면 즉시 양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계곡은 일기가 매우 불순합니다. 산 꼭데기에 있는 눈의 녹으면서 계곡에는 차가운 물이 흐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곡의 공기는 차갑습니다. 더운 공기를 만나면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혹은 한 여름에도 산 꼭대기의 찬바람이 불어오기도 하고 심하면 산 꼭대기에 내리던 눈이 바람을 타고 계곡 아래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가지 불편하고 또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양을 다른 곳이 아닌 계곡으로 몰고 갑니다. 왜냐하면 계곡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자들은 계곡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곡의 이러한 위험성을 잘 아는 목자는 하늘에 독수리나 솔개가  양을 노리고 날고 있지는 않은지, 양들이 혹시 벼랑에 서있지는 않는지 늘 살핍니다. 그리고 양이 먹으면 안되는 독풀이 있는지도 살피고 혹시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지지는 않을까 일기 변화에 신경을 쓰면서 양들을 가까이서 보살핍니다. 그리고 밤에는 곰, 호랑이, 늑대, 이리떼 등을 경계하며 쉬지 않고 혼심을 다하여 양떼를 돌봅니다. 그래서 이 때가 사실 가장 위험하고 힘든 때이지만 양과 목자가 가장 친밀한 때입니다. 그리고 교통하고도 고불거리고 위험한 길보다는 평지에서 사고가 더 자주 나듯이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사실 다치고 희생되는 양이 평지에서 한가로이 있을 때보다 더 적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계곡이 험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노리고 있을지라도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목자가 옆에 있는 이상 양들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동요됨이 없이 목자와 함께 정상을 향하여 천천히 풀을 뜯으며 올라 갑니다.

다윗은 인생말년에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인도해 오셨는지 살펴본 것입니다. 때로는 평안한 날도 있었지만 때로는 근심 걱정에 빠진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정말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사울 왕 집에 거할 때 하루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갑자기 단창을 던집니다. 다윗이 급히 피하면서 도망쳐 나와 요나단에게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 20:3) 라고 두려워 심경을 토로합니다. 그 후 사울 왕 집을 도망쳐 나와 십 황무지에 숨어 살 때 사울 왕이 자기를 체포하려고 틈만 있으면 병사들을 데리고 내려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던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칠 때 그는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부자간에 전쟁을 하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가드 토인에게 붙잡혔을 때 또한 그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그의 생명이 붙어있고, 아직 그의 왕관이 자기 머리 위에 있음을 확인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치 목자가 양을 데리고 더 좋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양떼를 계곡으로 인도하듯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평지 신앙이 아닌 한 단계 성숙한 단계로 올리시기 위해 때로는 광야로 내 쫓는가 하면 때로는 정상을 향해 올라 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깊고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험하고 험난한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다른 지름길이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자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을 계곡으로 이끌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목자와 양이 가장 친밀하듯이, 이때가 주님께서 우리를 가장 가까이서 조심스럽게 돌보시는 때이며 주님을 가장 자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그리하여 주님과 가장 친밀해지는 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주님께 더욱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그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온 열정을 다하여 우리를 돌보십니다. 행여 바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질까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사나운 짐승이 오는가 어떠한 원수마귀가 우리 주변에 있는가 예고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한 단계 더 성숙한 단계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픈 양이나 절뚝거리는 양은 같이 갈수 없습니다. 이런 양들은 양 우리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거나, 설령 따라온다 할지라도 얼마 가지 않아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양들은 목자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으로 병들고 나약한 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수 없습니다.  가다가 시험에 빠져 넘어지고 그나마 남은 신앙까지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것, 생명을 잃을 만큼이나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인생의 밑바닥을 길수 있는 것은 오직 건강하고 강한 신앙의 소유자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그 험난하고 괴로운 계곡을 지나면 푸른 초장이 놓여있듯이, 평지에서는 맛보지 못한 각종의 아름다운 식물을 먹을 수 있듯이 이전에 보지도 알지도 못한 크고 비밀한 주님의 은혜를 깨우칠 것이요 우리의 삶이 푸른 초장처럼 아름답게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계곡을 지나다 보면 물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데, 원문은 사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죽음의 골짜기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힘이 없습니다.  가끔씩 그림자로 인하여 놀라는데,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음을 알고 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멋있게 만든 인형이 사람보다 더 확실하고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전에 제가 Computer Science 공부할 때 Image Processing, 특히 Visual Image Processing 에 대하여 연구하였었습니다. 비행물체나 탱크 등을 식별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였는데, 잘 위장된 실체와 화려하게 잘 그린 그림을 놓았더니 컴퓨터는 화려하게 잘 그린 그림에다가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그림자가 실체처럼 행세를 하게 되는데 그림자 자체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또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생기는 것이지 빛이 없으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빛이 오면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다윗이 사망의 그림자라고 한 것이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놀라 겁을 집어먹었지만 사실 알고보니 그림자 이었구나, 내가 정말 죽는 줄 알았더니 그것은 사망의 그림자뿐이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까 그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구나. 그러면서 그는 “I feel no evil, I feel no fear”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크고작은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가정 일에, 자녀들 일이 어떻게 될지 두려워 걱정합니다. 아들녀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직장상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혹시 정리해고 대상은 되지 않을까 , 주식값이 더 떨어지지는 않을까, 속이 안 좋고 기침이 자주 나오는데 혹시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남자 친구가 혹은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 많은 두려움 속에 삽니다. 어쩌면 두려움에 포위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확실히 믿을수만 있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이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다윗은 오늘 우리에게 이같이 가르칩니다. 다윗은 외칩니다, 그림자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빛이 비춰지면 그림자는 사라지듯이 주님이 오시면 두려움은 사라지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앞으로 어떤 더 큰 일이 닥칠지 모르지, 2007년 제 처가 암수술을 할때 어쩌면 우리 인생중 가장 힘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2008년 교회에서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집사님들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두려움도 없이 행하는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95년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때 겪었던 슬픔에 비하면 그리 큰 고통은 아니었습니다. 

2007년 8월, 처음 진찰을 받았을 때 “이상하다, 정밀 검사를 받아야겠지만 암 같다” 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몇일뒤 의사가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하더니 “암이다”고 합니다. 이해는 하겠는데 실감이 안났습니다. 그래서 “그러냐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자기 말을 못 믿느냐 는 식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암세포입니다, 가로 1미리 세로 7미리 정도 이게 암 덩어리입니다” 라고 재차 말합니다.

저는 원래 충격적인 일이 닥쳐도 이해는 하되 느낌은 당장 오지 않습니다. 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무덤에 안치할때까지는 느낌이 오지 않았습니다. 삽으로 흙을 떠서 뿌릴때에야 비로소 느낌이 오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날도 의사가 “퍼지기 전에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요” 해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떨리지 않고 태연하게 “알았습니다, 속히 날짜를 정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 부흥 집회를 하였습니다. 이미 날짜도 잡혔으니 미룰수도 없어서 수술 날짜를 두주 후로 미루고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참 평안했습니다. 제 처도 “나야 지금 죽어도 아쉬울 것 하나도 없어. 죽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갈 텐데, 당신이 애들 키우느라 고생은 좀 하겠지” 그러더라고요. 나는 이 병이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덤덤하였고 제처는 이미 죽음을 초월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초조할 것도 없고 불안해 할 것도 없이 수술날 아침까지 똑같이 먹고 자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수술 후에도 한 순간도 불안해 해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암에 걸려 죽는 사람들 중 대부분의 경우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의사가 “암입니다” 하면 그때부터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 살고싶고 꼭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라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면 병세는 더욱 악화되고 마침내는 목숨을 잃게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니 내가 곧 회복되리라,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할지라도 나는 주님과 함께 저 영원한 천국에서 살텐데 무엇이 걱정인가 라는 태도로 사는 분들이 대부분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치고 극한 고통이 짓누른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 약속하십니다. 또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40:9절에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고 하십니다. 그림자에 두려워 떨지 말고 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명령입니다.

물론 인간인지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닥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가져오는 것인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고통 중에서 그리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빛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두려움의 근원인 그림자를 없애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조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으시고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 통과하여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Mary Stevenson 이라는 분이 1936 년에 지은 Footprints in the Sand 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십시다. 물론 1963년에 그리고 1964년에 또 다른 분들이 같은 이름으로 약간 변형된 문구를 사용하여 내 놓았지만, Mary Stevenson 의 1936년 것이 원본입니다:

One night I dreamed I was walking along the beach with the Lord. Many scenes from my life flashed across the sky. 어느 날밤 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나의 삶의 장면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처럼 펼쳐졌습니다.

In each scene I noticed footprints in the sand. Sometimes there were two sets of footprints, other times there was one only. 각 장면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어느 때에는 두 쌍의 발자국인데 어느 때에는 오직 한쌍 뿐이었습니다.

This bothered me because I noticed that during the low periods of my life, when I was suffering from anguish, sorrow or defeat, I could see only one set of footprints, so I said to the Lord, 나의 삶의 여정에서 특히 내가 가장 Low 할 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오직 하나의 발자국만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참으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You promised me Lord, that if I followed you, you would walk with me always. But I have noticed that during the most trying periods of my life there has only been one set of footprints in the sand. Why, when I needed you most, have you not been there for me?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하면 당신은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제 삶의 가장 어려웠던 순간마다에는 오직 하나의 발자국밖에 없음은 어찌된 일입니까? 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주님께서 저와 함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The Lord replied, The years when you have seen only one set of footprints, my child, is when I carried you. 주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네가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 때에 모래 위에서 한 쌍의 발자국만을 본 것은 바로 그때에 내가 너를 안고 갔기 때문이란다.

One Response to “임마누 엘(시편 2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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