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24

Chamber 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Posted by on Jan 24 2011 at 06:04 pm

시편 23:2절
주님께서 당신의 Chamber 로 인도하심

지난주에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내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미리 아시고 그것들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이 살수 있는 것입니다.
김치와 밥만 있으면 되는 사람에게는 김치에 밥만 갖다 주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수성찬을 준다 할지라도 반찬 타박하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부족함을 많이 느끼거나 부자라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He maketh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eth me beside the still waters” 는 다윗의 고백을 가지고 같이 은혜를 나누시겠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서 자동차로 Texas 주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Interstate 10번을 타고 루이지에나 주 New Orleans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는데 루이지에나 주 수도 Baton Rouge 를 지나자 길 오른쪽으로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두 시간 이상을 달려도 민가도 거의 없이 이따금 식 양 무리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열차를 타면 차창에 비치는 것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 동네들, 논, 그리고 공장지대와 아파트 단지 등뿐이었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원을 보니 마음이 너무 새로 왔습니다. 그 푸른 초원 저 끝에는 하늘이 맞닿아있고, 정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 달리는 차 문을 활짝 열고 멀리 뵈는 그 양떼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면서 간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 그런 곳을 달리면 속이 탁 트일 것 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선한 목자께서 양떼를 이끌고 맑은 하늘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시절을 만난 듯 파릇파릇 돋아난 풀들 위에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고 그 옆에는 시냇물이 잔잔히 흐릅니다. 넓고 푸른 언덕에 하얀 양떼가 무리 지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목자가 긴 지팡이를 들고 서있는 그 모습, 하늘에는 이따금씩 하얀 뭉게 구름이 높이 떠서 흘러갑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롭고 풍족합니까?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을 우리의 선한 목자로 온전히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49: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밤낮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늘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어머니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녀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힘이 약한 여자인지라 자녀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아이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빼앗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고아들을 보십시오. 부모님들이 버리거나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돌보지 못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지극하지만 어머니도 하나의 연약한 인간인지라 지치고 아파 쓰러진 아들을 슬퍼하며 지켜만 볼뿐 일으켜 세울 힘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능력이 없어 푸른 초장을 찾지 못하고 메마른 광야를 걸을 수 밖에 없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돌보시고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아픈 상처를 싸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황량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듯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황량한 거친 들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물도 없는 메마른 길로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길이 없으면 새로운 길을 내 주십니다. 그리고 사막에도 강을 내어 물을 대시고, 그로 말미암아 광야처럼 메마르고 냉랭한 나의 삶이 물 댄 동산처럼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에”He maketh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하였습니다.
양 스스로가 누운 것이 아닙니다. 양이 좋은 양식을 많이 먹고 배가 불러 누운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눕게 하신 것입니다.

소나 염소는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앉아서 되새김질 하거나 편안히 누워있지만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Africa 에서 20여 년 동안이나 양떼를 쳐온 Phillip Keller 는 “A Shepherd looks at Psalm 23” 라는 책에서 “양은 다른 짐승에 비하여 겁이 무척 많다. 그렇기 때문에 배가 완전히 부르고 또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야 비로소 눕는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배가 든든해야지 낮잠을 자든 평안히 누워있든지 하지 배가 고픈데 잠이 옵니까? 배가 고프면 한밤중이라도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고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인내심과 체면을 중요시 여기는 우리 인간도 못 참고 그러는데 하물며 참을성이 전혀 없는 미련한 양은 오죽 더 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역시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어야 잠을 잘 수 있지 근심걱정이 쌓여있는데 어떻게 잠이 옵니까? 그래서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양은 눈이 어두운 대신 귀가 밝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모습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그리고 힘이 약한 동물인지라 겁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짐승의 울음 소리 등 조그마한 소리만 나도 발딱 일어나 안절부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가 옆에 없으면,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이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어도 누워있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양은 스스로 절제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다가 불안하고 두려워서 잠을 못 자고 먹기만 계속하면 고창병등 갖가지 병들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풀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하고 한곳으로 모이게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앉아서 지금까지 먹은 것을 되새김질 하여 소화를 시킵니다. 이 때 목자는 다니면서 파리떼나 모기떼에 물려 상처 난 양들이나 사나운 짐승에 물린 양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을 발라 줍니다. 그러면 양들은 쉬면서 피곤함이 풀리고 건강을 회복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양이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목자가 양을 억지로 쉬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쉬고 싶어서 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나를 억지로 쉬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고 자기 민족들이 일하는 일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또한 자기 민족끼리 다투는 것을 중재하는 등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막으셨습니다. 그는 몸부림쳤지만 애굽인을 죽인 살인죄로 몰려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40년 동안이나 미디안과 시내산의 푸른 초장에 누워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비록 이드로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지만 그저 양이나 치며 세월 보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에 눕히셨다고 자포자기하고 그대로 누워 허송세월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왜 자기 민족이 자기를 그렇게 고소했는지 억울하였겠지만 여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애굽의 노예로 전락한 자기 민족을 구원해야겠다는 비전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양을 치며 밤에는 양과 함께 자면서 시나이반도 지형과 기후를 완전히 익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리고 병사 60만 대군과 그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족히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생활을 하면서 어디에 물이 있는지 어디에 야영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양떼를 이곳 저곳으로 몰고 다니면서 양의 생태를 잘 알게 되었고, 이것 또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에 40여 년 눕히셨던 결과 그는 새 힘을 얻어 마침내는 자기 생각이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기백성을 노예상태에서 구해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 사도를 보십시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교회를 개척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쳐 평신도 사역 자로 키우고, 분쟁이 일어난 교회에 가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등 정말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금의 스페인인 서반아로 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려고 로마 교회에 후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서 겐그리아 여성 사역자 뵈뵈를 통하여 로마에 보냈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로마서 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로 가서 로마 교회를 방문 한 뒤 서반아로 가려고 서둘렀습니다.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바쁜 관계로 예베소 장로들에게 배가 도착하는 밀레도 항구까지 나오라고 합니다.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노중 부흥회를 연 뒤 마지막 작별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는 2년 동안 법적 공방 싸움을 벌리다가 마침내는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에 압송되어 왔습니다.

바울은 가택 연금을 당하였고 궁궐을 지키던 로마의 친위대가 바울을 12시간씩 맞교대를 하며 지키게 됩니다. 바울이 갇혀있는 집에 주로 로마의 귀족 아들들로 구성된 친위대원들이 와서 바울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가택연금을 당하여 외부출입이 금지되었던 바울은, 열심히 나가서 전도해야 하는데 감옥에 갇혀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 바울은 많은 고민을 했었던 같습니다. 전도 해야 할 곳도 많고 또한 개척해 놓은 교회들 중에 가서 돌보아야 할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꼭 붙들어서 감옥에 갇히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 바울은 많은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보니까 빌립보 교인들이 더욱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자기를 지키려고 찾아오는 로마의 친위대원들에게 전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깨우친 후 바울은 빌립보서 1:13-14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친위대들을 상대로 전도하였고, 바울의 전도를 받은 자들 중 다수의 친위대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들 중에 상당수가 후에 로마 상원의원이 되어 정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이들로 인하여 로마의 기독교화가 가속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께서 로마에 가택연금이 되어있었기에 빌립보서,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등의 성경이 기록되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도 사도행전에 서반아 사역에 대한 부분이 조금 소개되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입니까?

그래서 저도 지금 책을 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고난이 없이 그저 목회한다고 아침저녁으로 뛰어다니기만 한다면 평생 책 한 권도 못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금년에는 “추수 때더라, 북한선교 정책, 교회들이여 권세를 회복하라” 등 3권을 출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바울은 지금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가택연금 당해서 오직 이 친위대원들을 전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사역이 얼마나 소중한 사역인가를 깨닫고 이같이 감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영적으로 보면 풀은 먹는 양식 즉 말씀입니다.
양식을 먹었으면 잘 소화시키기 위한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주님 일을 하면서 받은 상처도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 안에서 받은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휴식과 자기반성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한 주일 동안 열심히 일한 후 주일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쉬면서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영의 양식을 많이 먹고 되새김질 하면서 주님께서 발라주시는 기름, 즉 기름부음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즉 나의 의지대로가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7:1-2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하였습니다.
에스겔이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성전 문지방 사이로 물이 흘러 나오는 환상을 본 것인데, 이것은 성령을 상징하며,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없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어주실 새 예루살렘 성전은 생명력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오늘 날은 성령시대라 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아직 성령의 역사하심은 커녕 성령의 존재자체도 잘 모르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여 주신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스겔의 환상은 이어집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3-5)

에스겔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단계를 환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령님께 발목이 붙잡혔습니다.  발은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발목이 잡혔다는 것은 우리의 가야 할 곳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일은 아침부터 골프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성령님께 발목이 잡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릎입니다. 무릎은 그 사람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무릎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존경을 표하거나 자비를 구할 때 끓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의 모든 권세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무릎이 사로잡혔다는 의미는 예수님 앞에 나의 권세를 포기하고 항복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는 허리까지 찼다 했는데 허리는 힘의 근원이자 히브리서 7:10절에,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라고 한 것처럼 생명의 근원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허리를 사로잡혔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나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건너지 못할 만큼 불어난 강, 헤엄쳐야 하는 상태는 물의 흐름을 보면서 헤엄을 쳐야 하듯이 이제는 나의 자아는 온전히 사라지고 성령의 흐름을 따라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영의 양식을 먹여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로고스, 즉 살아계신 진리와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를 당신의 Chamber 로 이끄셨다는 의미입니다.
아가서 1:4절에, “나를 당신의 은밀한 침실로 인도하소서” 하였는데 여기서 은밀한 침실이 바로 왕의 Chamber 입니다. Chamber 는 보통 침실이 아니라,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오직 신랑과 신부만이 들어가는 은밀한 곳입니다.
그 곳에 있으면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오직 신랑과 신부만이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Chamber 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가 주님과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도 말리지도 훼방할 수도 중단할 수도 없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 그리고 그 사랑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거나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서 어느 때에는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Impartation 이라 해서 Anointing 이 강한 사람이 안수해주면 강한 성령을 받고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역을 멈추고 잠시 쉬도록 잡아 두시는 것입니다. 막연히 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역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은밀한 침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다 가까이 두시고 싶으셔서, 더 깊고 더 중요한 사역을 맡기시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Chamber 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과 만의 깊은 관계를 통하여 아픈 상처기 치유되고 그분의 기름 부으심이 강하고 깊어지며 각종의 은사와 능력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전보다 한 차원 더 높고 깊은 사역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Chamber 에 계십니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님께 더욱 밀착된 관계를 맺으십시오. 더욱 열심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Chamber 에서 나오게 하실 때까지 주님께서 온전히 치유하시고 사역에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주시기까지 쉬지 말고 근신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그러한 체험을 하시지 못하셨습니까? 사모하며 주님께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약속하신 주님께서 반듯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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