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20

여호와 이레(하나님은 나의 공급자)

Posted by on Jan 20 2011 at 10:41 am

시편 23:1절
(Yahweh Jireh (Yireh): “The Lord will provide.”여호와 이레)

여러분들은 주님 안에서 평안 하셨습니까?
지난주는 스릴 넘치는 한주간이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저희 부부가 건물 사용에 대하여 미국교회 목사님과 집사장님과 같이 만남을 가졌습니다. Tim 목사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과 시간이 너무 길다고 불평을 하였고, 집사장님은 렌트비를 올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렌트비를 아주 조금만 내면서 온 건물을 우리 마음대로 다 쓰고 있다 는 불평이겠지요.

렌트비를 올린다면 도대체 얼마를 올린다는 것일까?  이번 주일 설교는 특히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정말 여호와 이레를 믿느냐” 고 나를 시험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면서, 역대하 14:6절 14절의 아사 왕의 기도,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를 인용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교회 집사장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 목요일 오전에 Tim목사님과 그 집사장님과 저 이렇게 셋이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미팅에서는 집사장님은 “렌트비는 올리지 않겠지만 사용공간과 시간을 제한하여야겠다. 왜 새벽마다 와서 기도를 해야 하나, 집에서 기도해도 되지 않느냐? 기도를 꼭 교회에서만 해야 되냐? 그리고 왜 친교는 해야 하냐?” 하면서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그는 완전히Business 식의 말만 거듭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했다가는 엉뚱한 소리만 할 것 같고 해서, “아마도 문화적인 차이 갔다, 당신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이민교회는 친교도 있어야 되겠고 또한 우리는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축복이 너무도 갈급하고,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도 날마다 아침과 저녁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정말 너무 힘들다.  물론 집에서 기도해도 되겠지만 교회에 나와서 해야지 기도도 잘 되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이 더욱 빨리 오실 것 같다.  그래서 힘들고 귀찮지만 매일 교회에 아침 저녁으로 와서 기도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으면서 “지난 주에 사무총회를 가졌는데 사람들이 김목사님에 대하여 매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굉장히 희망적이더라. 하지만 그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나는 김목사님의 사역이 정말 비관적이다. 이 문제를 Executive board 에 상정하여 거기서 설명을 해야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마침기도를 하라고 해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Thank you Jesus your presence here. I pray for pastor Tim. Heal him” 라고 하자 그때까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듣고 있던 미국 목사님이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내려 앉았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지더니 성령님이 강하게 임재하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마치고 나서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렌트비를 안 올리는 것으로 한가지는 해결되었지만 건물 쓰는 시간을 제한하겠다는 것에는 아직 이견이 있으므로, 이 문제를 제 처에게 이 일을 알렸더니 제 처도 종일 기도하였고, 저도 역시 기도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밤에 저희 부부가 기도하고 있는데 Caren 이라는 분이 와서 “자신도 Executive board member 라면서 왜 집사장님이 그렇게 말했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라, 달라진 것은 없다. 예전처럼 계속해서 기도하고 예배 드려라, 내가 미팅에서 이 문제를 확실히 해 두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약하니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구나,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여호와 이레이심을 다시한번 감사 드렸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이레,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말씀 드렸듯이 양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모릅니다. 목마른 사슴은 스스로 물을 찾지만 양은 스스로 풀도 물도 찾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양은 굶어 죽고 물려 죽고 병들어 죽게 됩니다.

언젠가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는데, 산양이 절벽에 서 있습니다. 왜 멀리서도 쉽게 노출되도록 벼랑 끝에 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위험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멀리서 이 모습을 본 독수리가 공중에서 한 바퀴 맴돌더니 급하게 하강하여 날카로운 발톱으로 양 머리를 탁 치고 갔습니다. 싸움은커녕 두 번 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안타깝게도 이 양은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양이 굴러 떨어지는 대로 독수리도 따라서 내려가더니 아직 숨도 끊어지지 않은 양을 그 자리에서 뜯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 없이는 살수 없기 때문에 목자를 철저히 의존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양의 필요를 일일이 다 챙겨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나의 유일한 목자로 철저히 의존할때 목자되시며 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되: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먼저 아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채워 주십니다.
양이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모르듯이 우리도 우리의 필요를 잘 모릅니다.
가난할 때에는 돈만 있으면 다 될 것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교에 있었을 때 어느 사모님이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돈이나 한번 실컷 써 보았으면 좋겠다” 고 하여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은 또 다른 것을 원하고 있더라고요.

최근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가 G20 나라중에서는 경제회복세가 가장 빠른 나라중의 하나라고 하던데, 자살률도 일등이더라고요. 자살률 2위를 달리는 일본 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그런가 하면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부탄이라는 나라는 일인당 국민 소득이 우리의 10분의 일 정도 입니다. 그러면 가난하기 때문에 범죄자들도 많을 것이고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평화로운 나라이며, 범죄 율도 아주 낮고 자살률은 우리나라의 1/6 정도밖에 안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는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는 잘 모르며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거나 어떠한 놀이에 빠지면 밥도 안 먹습니다. 자신이 감기에 걸리는 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불러서 챙겨 먹이고 더러운 옷은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야 되고, 아프면 약을 먹여야 합니다.

또한 갓난 아이는 무엇을 쥐어주면 그것이 장난감인지 먹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입에 넣으려고 하듯이, 우리들 역시도 무조건 소유하려고 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감을 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조건 소유하려고 하였다가, 일단 그것을 소유하고 나면 곧 싫증을 내게 되고, 또 다른 것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족이 없이 늘 불안하고 마음 한 구석은 비어있는 것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가 자기 양이 무엇이 필요한지, 먹이가 필요한지 치료가 필요한지, 휴식이 필요한지를 알고 때로는 풀밭으로 때로는 물가로 인도하듯이, 부모님이 아이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젖을 먹이고 때로는 안아주고 때로는 잠을 재우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함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것이 혹은 우리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음식도 몸에 해롭다고 하는 것이 더 맛이 있지만 맛을 찾아 해로운 음식을 먹습니다. 고기도 기름투성이인 삼겹살이나 갈비 부분이 맛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자꾸만 우리의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네게 해로우니 그것은 삼가고 이것을 먹어라” 고 다른 것을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면서 그것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 내가 이것을 구했지 그것을 구했습니까? 싫습니다” 라고 거절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의 자녀가 여러분들의 성의를 무시하고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이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신 분이시기에 그런 일가지고 화를 내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좋아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이레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할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부족함이 없는 만족된 삶으로 인도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은 많이 쌓아 두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풍족히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더이상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가 현재 가지고있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풍족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꼭 필요한 것들을 충족히 주시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서는 부족하다고 불평할 사람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16:17-1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주어 식량으로 삼았습니다.
좀 많이 거두어 쌓아두고 싶었지만 그렇게하면 벌레가 슬고 곰팡이가 피워 그렇게 할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쌓아두고 먹을 만큼 많이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것을 쌓아두고 먹으려고 하였다면 그 때문에 누군가는 굶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것 없이 모두나와 만나를 줍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된 삶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족한 삶을 살던 그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십시오. 민수기 11:5-6절에,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라고 불평합니다. 처음에는 맛있게 잘 먹다가 좀 먹으니까 식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먹던 식물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옛날 노예생활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은 들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자기 주인들 것이었지만 어떻든 간에 먹을것은 잔뜩 쌓아놓고 막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악은 쌓아두고자 하는 욕심에서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호랑이나 사는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도 사람은 지금 배거 고프지 않아도 사냥하여 쌓아 둡니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짐승보다 뛰어나 미래를 예비할줄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지혜가 나쁜 방법으로 사용되면 치명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실 애굽의 노예 생활할 때나 광야생활 때에는 비교적 범죄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끔찍한 범죄들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그 근본적인 인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물자가 풍부해지자 쌓아두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정당한 방법이 아닌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창고에 쌓다보니 그러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행복은 많이 쌓아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으로 만족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6:6-8절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살지만, 사실 따져보면 가진 것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보지않고, 우리가 없는 것만을 보며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가르치십니다. 이 당시 바울 사도께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이란, 한 벌 외투와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의 삶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절 6:9-10절에, “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고 하였습니다
가진 그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축적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시험과 올무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서 결국 악한 일들을 저지르게 되고, 믿음에서 떠나 예수님을 떠나는 삶을 살게되고, 결국 근심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목자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굶어죽게 만드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단 한가지로 족합니다.
창세기 22: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고 하십니다. 나이 많아 난 외아들, 자기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외아들을 죽여서 각을 떠서 태우라는 참으로 기가막힌 명령입니다. 아내 사라에게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사라가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그리하여 번뇌 속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창세기 22:7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라는 부자간의 대화가 나옵니다.

“아버지, 제사할 양은 어디서 구하실 것입니까?” 라고 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기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자간의 친밀함,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100% 온전히 믿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착한 아들, 이렇게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며 따르는 아들을 아브라함은 죽여 각을 떠서 번제로 드려야 하니 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 아비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순진한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 “번제할 양은 어디 있나이까?” 라고 물을 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그렇게 대답하였는지 아니면 하는 수없이 그렇게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은 아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고 묵묵히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들을 결박하고 죽여 각을 뜨려고 합니다. 이제 행여 하나님께서 중단하라고 하실까? 그 아들을 죽이지 말고 대신 다른 것으로 하라고 하실까?  내 아들을 살려 주셔야 할 텐데……. 아브라함은 그 몇분이 얼마나 긴박하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을 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말씀도 징조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는가 보고만 계십니다.

하는 수 없이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아 결박합니다. 그런데 이놈이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반항하지도 않습니다. 순순히 결박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결박할 때에 그의 마음속에 이삭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아주 비참한 마음으로 아들을 결박하고 칼로 그를 찌르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 왜 사람을 그것도 내 외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 집에 내 아들보다 더 늠름하고 잘 성장한 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내 아들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까?
양을 드리라고 한다면 내가 수천 마리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양이 얼마나 많습니까? 100마리 천머리 아니 있는 양 다 드리라고 하시더라도 내가 기쁜 마음으로 드릴 테니 제발 내 아들은 살려 주옵소서” 라고 항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자 아브라함은 포기한 체 우울한 마음으로 이들 이삭을 칼로 죽여 포를 뜨려고 칼을 들었습니다. 이때 이삭은 어떠했을 까요? 너무도 무섭고 떨려 공포에 질린 채 눈을 감고 말로 못하고 부들 부들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그리고 앞으로 보라고 합니다, 그를 대신할 숫양이 준비되었노라고. 이때 이삭도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이삭은 이러한 끔찍한 경험을 후에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은 너무도 감격하여 “여호와 이레” 를 외칩니다. 그리고 결박했던 이삭을 풀어주고 부자간에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들을 대신할 단 한 마리의 양의 필요했습니다. 자기 우리에 수천 수만 마리가 있어도 그 양들은 자기 아들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한 마리의 양, 우리에게는 이 양 한 마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대신할 한 마리의 양,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 하십시오.
그 분의 축복만 바라지 말고 그분 자체를 소유하십시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여호와 이레의 실체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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