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03

여호와는 나의목자

Posted by on Jan 03 2011 at 01:27 am

시편 23:1절
(여호와는 나의목자)

2011년 1월 2일

오늘은 2011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온 가족들과 직장들 그리고 하시는 사업및 사역들  위에 그리고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에도 우리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늘 충만히 임하시기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광고 드렸듯이 오늘부터 7주간 시편 23편을 가지고 같이 은혜를 받고 자 합니다.
여호와는 다른 누구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나의 목자” 이기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시편설교가 끝나면 다시 마가복음을 가지고 말씀을 준비할 것이며, 부활주일 전후부터는 “교회들이여,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회복하라” 는 주제로 사도행전 1-4장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할 예정입니다.
이 말세에, 교회는 무엇이며 왜 모이며, 예배드릴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하며, 그러한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의 권세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수요 예배에는 아가서를 가지고 더욱 깊은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특히 중세때부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아가서를 통하여 은혜를 체험하고 더욱 깊은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였는데, 저와 여러분들도 수요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이 아가서를 통하여 더욱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자 준비합니다.

그리하여 2011년은 말씀으로 다져지고 그 위에 성령님께서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 한분한분 그리고 우리 산호세 생명의 강교회에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이적과 능력이 나타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오늘은 시편 23편의 배경을 살펴보면서 같이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23편처럼 널리 알려진 성경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물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도 이 구절을 즐겨 암송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 23절을 모델로 하는, 특히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기업주와 직원들의 관계에 접목시키는 방법으로 리더십을 개발하고 사업을 운영하는 연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편, 시편 23편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나이가 지긋하였을때 인생을 뒤돌아보며 지었을 것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학자들 간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매일 드리는 제사때 부르려는 목적으로 노래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면서 시편 23편도 노래 형식으로 다듬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나 문장 형식으로 보나 다윗이 지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 23편을 지은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새의 말째아들로 태어난 다윗은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를 일찍 여읜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를 낳자마자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엄격한 아버지와 또한 나이차이가 많이나는 형들틈에서 외롭게 자랐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여성편력, 즉 4명의 아내와 여러 첩들을 두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의 장수 우리아의 아내와 통간을 하기까지 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못한 탓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사무엘이 기름부으러 이새의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다윗은 양을 치러 내 보냈을 만큼 아버지로부터 무시를 받고 자랐습니다.
물론 기름부음을 받기에는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를 제외시켰다고 생각할수도 있었겠지만, 집안에 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다윗 만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것은 그를 그분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 상17:28절에, 맏형 엘리압이 몇마리 안되는 양을 누구에게 맡기고 왔느냐고 꾸짖는 것을 볼때 그 당시 이새가 키우던 양떼는 그리 많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몇마리 되지않는 양들을 양 우리에 가두어두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윗도 그 자리에 초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다윗을 밖으로 내 보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눈에 다윗은 다른 형제에 비하여 형편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무시만 당했지 아버지로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훈도해야 하는지 전혀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장성한 후에도 자기가 아버지에게 무시당한 것만 생각하고  무조건 자녀들을 사랑하고 감싸 주기만 하였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훈계하며 가르쳐야 할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외부적 전쟁에는 승승장구하여 영토를 넓히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절대군주로 군림했지만, 가정교육이나 자녀교육에는 철저하게 실패하였습니다.
맏아들 암논이 자기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하는 그러한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말로 타이르기만 하였지 올바로 훈계하지 못합니다.
그는 율법에서 가르치는 대로 마땅히 암논을 책망하고 다말을 아내로 받아드리고 평생 이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말로만 좀 타일렀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다말은 이미 처녀성을 잃었기 때문에 시집도 못갑니다.
그리하여 밤낮 처량하게 눈물로 살아가는 자기 여동생을 본 압살롬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 형 암논 뿐만이 아니라 암논을 처벌하지 않는 자기 아버지 까지도 살해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다윗의 자녀교육의 실패는 곧 왕실에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도 사랑은 커녕 무시만 당하였던 다윗은 사무엘 상 17:28절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라고 면회온 다윗을 이렇게 심하게 꾸짖는 것으로 보아 그의 형들로 부터도 심하게 구박당하고 무시당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않계시고 아버지로부터 무시를 당하였으며 형제들로부터도 거절당하고 구박당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기댈곳도 설 곳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 하 1:26절에,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라며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으로 부터 참형제 사랑보다 더욱 깊은 사랑을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상처 투성이의 어린 다윗은 자신의 이러한 공허감과 거절감에 대한 상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싸매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다윗은 날마다 양떼를 몰고 들에 나와 양들과 함께 하루종일 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학교 다녀온 후 소 풀을 뜯겨보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재미있게 노는데 나 혼자 소를 뜯기려니 참 지겹고 짜증납니다.
그렇다고 조금만 한눈 팔면 다른집 곡식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항상 지켜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다가 그것도 싫증나면 하모니카를 불고 그것도 지겨우면 소를 매놓고 놀다가 아버님으로 부터 혼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양떼를 돌보아야 하니 얼마나 지겹고 고독했겠습니까?
그렇다고 가정에 돌아가도 아무도 반겨줄 사람은 없고 오직 구박하고 무시하는 아버지와 형들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 고독감을 달래기 위하여 양떼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살려 후에 그렇게 많은 시편을 기록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사무엘 상17:34-37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Teenager 가 될 때까지도 양을 쳤으며, 항상 좋은 풀을 먹이고자 이리저리 찾아 다녔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리떼로부터 그리고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을 지켰습니다.
심지어는 곰이나 사자에 물려간 양을 찾으러 추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왔으며,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을 발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돌보자 않고 곰이나 사자와 싸워 그것들을 쳐 죽이기 까지 하였습니다.

만일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천재적인 재질과 비상한 머리 그리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맹이 끔찍한 참극을 불러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찍부터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운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됩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 골리앗 대장을 향하여 돌진하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고 절대적으로 의지하였는지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울왕으로 부터 쫏길 때 자기 부모와 형제들을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였던 것으로 보아,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받았던 상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나 형들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들을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안전한 곳 모압 요세지로 모셔다 드리고 자신은 다시 유다 황무지로 돌아 옵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추격하던 사울의 목숨을 두번씩이나 살려 줍니다.
그는 사울을 존경하거나 사울을 좋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아비새처럼 그도 사울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기를 원하였지언정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를 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끝까지 거절하였습니다.

그후 사울을 따르던 병사들이 탈영하여 십황무지에 있던 다윗을 찾아 옵니다.
한 때는 사울의 수하에서 다윗의 목숨을 찾았던 자들이었지만, 다윗은 이들을 책망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또한 사울 왕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한후 사울을 따르던 많은 장수들을 포용하여 군대의 지휘관들로 삼았습니다.

어디서 이러한 포용력이 길러졌을까요?
어디서 누구에게로부터 보복을 포기하고 이러한 용서와 아량을 배웠을까요?
사무엘을 통하여 배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절감에 대한 상처를 치유받으면서 공허감과 고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의 거절감에 대한 상처 때문에 그는 아무도 거절하지 않고 아무도 차별대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갈급하게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사랑등 세상사의 사랑에 궁핍합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찾고 찾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평탄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더라면 아마도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갈급하게 찾지도 또한 절대적으로 의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아무도 고난이나 고통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6: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절망과 파멸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와 무기력함을 체험하게 되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찾게되기 때문입니다.

엊그제는 평소에 믿음도 없어 보이던 분이 갑자기 찾아와서 기도를 부턱하면서, “목사님, 평소에는 기도할 생각도 못하던 제가 힘들고 어려우니까 자동적으로 기도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제가 이렇게 변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제 주변에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는 체험을 한 분들이 부지기 수입니다.

저도 고난을 통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제 삶이 평탄하다면 일주일 내내 하루도 안빠지고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잠도 못자서 졸립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며 바쁜 일이 있어도 하는 수 없이 예배당에 나와서 엎드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God’s Season 즉 주님의 때가 곧 오고 있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하여 제 처와 저는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그 때를 준비하며 날마다 주님 전에 나와서 엎드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난은 축복의 통로가 될수도 있음을, 아니 우리 믿는자들은 고난을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다윗은 오늘 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여호와 이래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살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의의 하나님 여호와 취드테누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의 원수들 앞에 상을 베푸시고 승리를 외치게 하시는 승리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세상에서 받은 나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시는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를 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나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삼마를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야훼는 나의 목자시다” 라고 확실히 고백할수 있으십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야훼는 나의 목자시다” 라고 확실히 고백할수만 있다면, 양이 목자를 절대적이며 필사적으로 따르듯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이며 필사적으로 따를 수만 있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셀수없고 헤아릴수 없을 만큼 크고 좋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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