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21

예수님의 리더십

Posted by on Jul 21 2010 at 08:57 pm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Brother Kim! Good to see you again” 하시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James 목사님은 1961년부터 목회를 시작하셨으니 장장 50년째 사역을 해오시는 현역 목사님이시다. 10년 전에 이미 은퇴를 하셨지만, 곧바로 당신 연세만큼이나 오래된 교회를 맡아 사역하고 계신다. 낡은 포스터와 빛 바랜 흑백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만 보아도 이 사무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가구라고는 낡은 소파와 삐걱거리는 의자뿐이다. 처음에 장만할 때에는 모두 새것이었겠지만 그간 교회와 함께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었기에 이제는 기력이 쇠미한 노인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소파에 앉으니 쿠숀이 워낙 낡았는지라 푹 들어가 내가 소파에 묻히는 듯 했다.

내가 James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 분의 낙천성이다. 만날 때마다 항상 껄껄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그분이라고 무슨 사연이 없었겠는가? 슬픔이나 아픔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낡은 회전의자를 좌우로 돌리며 “Brother Kim! Do you know what?” 을 연발하시면서 흥겹게 말씀을 하신다. 그러다가도 사모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기 때문에 점심때가 되면 만사 제쳐놓고 집에 가신다.

젊은 날 사역 현장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껄껄 웃으시면서 말씀하신다. “어느 교회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지. 교인수가 약 250명 정도는 되었었어. 그래서 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고자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아마도 부임한지 한달쯤 되었을 거야. 집사 한사람이 내 사무실에 찾아와서 ‘교인들에게 보내시는 편지 제가 먼저 읽고 부치겠습니다’ 라고 하더군.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기가 검열하겠다는 거야. 참 웃기는 사람도 다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사람이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 교회였던 셈이었지. 그래서 그 다음주로 사표를 내 버렸어.”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웃는 것은 항상 기뻐서 그런 것만은 아닐세. 언젠가부터 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이렇게 웃는 법을 배운 거야” 라고 하시더니 시선의 초점을 창 너머 먼 곳에 맞추시는 듯 하신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용해진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목사님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눈물 대신 완전히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그 날 그 말을 해 버렸어.” 그리고 또다시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나도 잠시 갚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저도 전임교회 문 앞에서 강제로 떠밀려 나올 때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당신들이 지금은 힘으로 밀어 부치며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무슨 어려운 일이나 뜻밖의 불행이 닥칠 때마다 오늘 이 상황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해 버렸습니다. 그 때에는 너무 어이없고 억울하고 화가나서 한 말인데, 그들의 담임목사로서 그런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하였더니, 잠시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조용히 입을 여셨다:

그러니까 벌써 오래 된 일이지, 그 녀석이 그 당시 31살 때이니까. 그러고 보니 꼭 20년이 되었고만. 나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네. 참 착한 아이였지. 키도 나보다 훨씬 컷고 마음씨도 착하였었지. 참 좋은 아이였는데 의지가 좀 약했어.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당뇨를 앓았지. 상당히 심각했어. 당뇨가 심해지니까 콩팥도 나빠지더라고. 그리고 음식을 절제하여야 하는데 녀석이 그러지 못했어. 나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고, 나중에는 투석을 하다가 결국 내 콩팥을 하나 떼어 주었지. 내 아들을 살리겠다는데 그까짓 콩팥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녀석이 내 콩팥을 가지고 살면 이제 좀 절제해야지.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어.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이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는 거야. 그래서 어느날은 내 콩팥에 무리를 주지 말라고 내 콩팥을 Abuse 하지 말라고 야단을 쳤지. 그런데 그것이 그만 그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야. 내가 왜 그런말을 했을까? 그 말만은 하지 말아야 했었는데, ‘네 몸 속에 있는 내 콩팥 잘 간수하라’ 고 해 버렸어.

갑자기 요한복음 21장의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생각났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 사랑 할수 있느냐? 아니요 주님, 난 우정의 사랑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두 번째까지 똑 같은 질문이 오가더니 세 번째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우정의 사랑밖에는 할 수 없단 말이냐?” 라고 물으시자 이번에는 “세상 모든 것을 아시며 내 마음의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우정의 사랑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까지 포기하셨는데, 나는 과연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얼마나 양보하고 희생했는가?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준 아들에게 콩팥하나 떼주고서도 ‘내 콩팥 잘 간수해’ 라며 아까워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내가 떼어준 내 몸의 일부가 Abuse 당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내 피붙이 아들일지라도 이렇게 섭섭하고 화가 나는데, 나와 피를 나누지 않은 이웃에게는 얼마나 더 섭섭하고 화가 날까?

 물론 수혜를 받은 사람도 항변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주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잊어야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 매주마다 당신 장기를 내가 잘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서라도 올리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아깝습니까? 그렇게 후회스럽습니까? 자, 내 배를 째고 꺼내 가시오.

하지만 나에게 생명을 떼어주신 우리 주님, 우리가 그 분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면 최소한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 분의 심장을 달고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산호세 생명의 강 교회 김 진환 목사
www.riveroflifes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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